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인도 독립 투쟁의 역사(A History of Indian Freedom Struggle) (22)

 

 

 

 

남부디리파드(E.M.S. Namboodiripad)

번역 : 이병진(양심수, 회원)

Ⅲ “분리지배” 전술과 후퇴

영국 관료층의 축복과 조력으로 결성되었고 순전히 온건주의 강령에 기초해 영국에 충성을 선언한 국민회의가 오래지 않아 식민당국의 반대와 보복행위에 직면하였음을 앞서 살펴보았다. 몇 년이 지나자 그런 반대와 보복행위가 강력해졌다. 띨라크와 기타 인물들의 지도와 국민회의의 채택으로 급진주의 분파가 결정되고 그 활동의 결과로서의 스와데시, 스와라지 강령은 식민당국의 적대와 보복행위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지배자들이 사용한 첫 번째 방법은 지배를 위협하며 발전하는 운동의 싹을 잘라버리기 위해 지도자들을 탄압하여 억압하는 것이었다. 인도 국민회의 결성 이전에도 벵골의 수렌드라나쓰 바네르지와 마하라쉬트라의 띨라크를 투옥하였다. 국민회의가 결성되고 급진주의 경향이 고조되자 탄압이 더 가혹해졌다.

하지만 그런 탄압조치하에서도 운동이 약화될 조짐을 보이지 않고 반대로 꾸준하게 발전하고 있음을 알게 된 지배자들은 운동을 짓밟기 위해서 또 다른 수단을 시도하였다. 커즌(Curzon) 총독은 그 전략의 일환으로써 벵갈 분할 계획을 입안하고 집행하였다.

당시 벵골 지역은 전체 독립운동의 — 특히 급진주의 경향의 ― 힘과 영감의 원천이었다. 특히, 급진주의 경향의 원천지였다. 운동의 뿌리는 캘커타나 벵골 동부 지역이나 똑같았다. 국민회의 지도자들은 민족운동의 일환으로써 국민회의 내의 급진파가, 봄베이에서 마라띠(Marathi)어로 말하는 인민들을 성공적으로 조직했었던 것처럼 , 벵골어로 말하는 지역의 인민들을 조직해냈다. 벵골 분할은 그 운동의 성장을 막고 분열시키기 위한 정치적 계책이었다. 권력기관들은 분할을 정당화하려고 여러 가지 “행정편의”를 이용하였다. 그러나 실제 동기는 정치적이었다는 증거는 충분하였다. 벵골어를 사용하는 세 개 군이 아쌈에 속했다. 벵골어를 사용하는 나머지 군들과, 비하르, 오리샤, 초따 낙뿌르(Chota Nagpur)가 당시 벵골 주를 구성하였다. 분할이 정당하다는 주장의 근거는 주(벵골: 역자)가 너무 방대한 지역이라서 행정 효율성을 위해 분할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커즌 총독과 여러 고위 공무원들의 문서와 편지들은 분할의 진짜 이유가 다른 것임을 보여주었다. 벵골뿐만 아니라 인도 전역에서 정치 시위에 가장 앞장 선 사람들은 교양 있는 중간 계급(the Baboos; 서기들)이었다. 그들은 벵골어 신문에 글을 쓰고 연설을 통해 영국 지배자들과 싸우는 대중들 편으로 돌아섰다. 운동의 진전은 그런 활동을 허용하지 않는 기관들에 의해서 사실상 억제되었다. 커즌이 말하기를 “물론 그들 스스로를 국가(nation)로 생각하고, 영국이 물러날 것이고 벵골 서기가 캘커타 정부 청사를 차지할 것이라는 미래의 꿈에 부푼 벵골인들은, 현실이 그 꿈을 방해하는 것에 비참하도록 분개한다. 우리가 그 시끄러운 소리들에 양보할 만큼 약하다면 지금 우리는 분할할 수 없거나 벵골을 다시 줄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현재에도 거대하고 미래에는 더욱 커질 골칫거리의 근원임에 틀림없는 집단의 결속을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것이다.1)

만약 오로지 행정 효율성의 관점에서 주의 크기를 작게 하려는 의도였다면, 힌디어와 오리야(Oriya)어 사용 지역 및 부족민 지역을 벵골주로부터 분리시키고 아쌈에 속해 있는 벵골어 지역들을 포함시키면 되는 것이었다. 대신에 동부 벵갈 군들과 아쌈으로 구성되는 새 주를 만들고 예전처럼 힌디어와 오리야어 지역들과 부족민 지역을 벵골에 계속 유지시키는 계획이었다. 그 결과는 단지 언어 집단을 파괴시키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벵골어와 아싸미야(Assamiya)어 지역들과 부족민들 지역으로 구성된 주와 벵골어, 힌디어, 오리야어 지역들과 부족민 지역들로 구성된 또 다른 주 사이의 언어 모순과 싸움을 야기하였다. 더구나, 다카(Dacca)는 새로운 동부 벵골주의 주도였는데 그곳 대중의 대다수가 무슬림이었기 때문에 분할 계획은 통합된 벵골의 힌두 지배로부터 해방이라는 느낌을 가지게끔 하였다.

그러므로 벵골 분리계획은 벵골 인민들의 단결을 방해하고 인도 전체 주민들에게 힌두-무슬림 갈등의 씨앗을 심어 반제국주의 세력을 분열시키고 약화시켜 지배자들을 도왔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벵골 분할이 곧 시작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벵골 전체에서 시위자의 목소리가 크게 일어났다. 수백, 수천 명의 인민들이 참가하는 주 단위 집회와 시위가 벌어졌다. 5만 명의 인민들이 참가하는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학생들과 변호사들, 고용자들과 기타 인민들이 슬픔을 상징하는 검은 표지를 달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대중 시위는 파업, 여러 계급들의 거부운동(boycott)과 하르딸2)과 같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런 일들이 단지 벵골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다른 주들의 정치 활동가들은 역시 잔혹하게 공격받고 있는 벵골 사람들과 연대의식을 표출하였다. 벵골 분할 폐지 요구 결의서가 인도 국민회의와 모든 기타 정치조직들에서 채택되었다.

그런 시위의 일환으로 급진주의자들이 초기에 옹호했던 거부 투쟁이 나라 전체에 통용되었다. 그전에는 일부 지역에서 외국 상품 거부가 정치적 동기 없이 일어났다. 이제는 정치 투쟁의 형태로 받아들여졌다.

1905년 7월 6일 인도 언론에 분할과 관련된 공식적인 공지가 나오기 전에, 분할 시도에 반대하는 저항을 표현하기 위해 거부행동을 실행하자는 여론이 표출되었다. 하지만 거부운동은 8월 7일에서야 캘커타 시청에서 열린 회의의 결정으로 조직적 틀이 갖추어졌다. 그 회의는 다양한 지역 집회에서 거부운동을 이미 결의한 학생들과 청년들 그리고 그런 결의는 아직 하지 않았지만 (운동에: 역자) 참가 했던 기타 수천 명의 사람들이 거대한 시위를 일으킨 뒤에 열렸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것은 단순한 외국 상품 거부운동이 아니었다. 거부행동은 다양한 영역들에 퍼져갔고 다양한 형태들로 실행되었다. 예를 들면, 구두수선공은 영국인의 신발 수선을 거부하였다. 오리샤에서는 요리사들과 시종들이 외국 상품을 쓰는 주인을 모시기를 거부했다. 세탁업자들은 외국 옷 세탁을 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사제들은 외국 옷을 입는 결혼식에 참여하지 않기로 선언하였다. 이렇게 각계각층의 인민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거부운동을 실천하였다.

이런 선동적인 운동이 벵골에서 더욱 강하게 일어났지만, 그 물결은 나라 곳곳으로 퍼졌다. 분할 반대 시위와 그 일환이었던 거부운동은 스와데시, 스와라지라는 새로운 전투적 강령과 민족교육과 함께 전진하는 급진주의 계층이 국민회의와 인도 전체 인민들의 찬사를 얻게끔 도왔다. 이 시위의 광범위한 물결의 후속편으로써 1906년 캘커타에서 국민회의를 주도했던 다다브하이 나오로지는 스와라지가 인도 인민들의 목표임을 선언하였다.

또한 이 회의는 분할에 반대하는 항의로 벵골에서 시작된 거부운동을 정당화했고 이를 지속할 것임을 선언하였다. 마단 모한 말라비야(Madan Mohan Malaviya), 고팔 크리쉬나 고칼레(Gopal Krishna Gokhale)와 같은 여러 온건주의 지도자들조차 분할에 반대하는 항의의 목소리를 냈고 벵골에서 진행되고 있던 거부운동을 정당화하였다. 이런 배경 아래 그 회의에서는 스와데시, 민족 교육 등과 같은 쟁점들이 채택되었고 자치권이 있는 영국 식민지와 같은 형태를 인도에도 확대할 필요성을 결의하였다.

이와 같이 벵골 분할 계획은 민족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해 고안되었지만, 실제로는 급진주의 강령에 기초한 민족단합 발전에 기여하였다. 벵골 동포들을 향한 공감의 표현으로 시작되었던 시위들과 외국상품 거부운동은 스와라지를 위한 전인도 정치운동의 뗄 수 없는 한 축이 되었다. 온건주의자들은 이렇게 발전된 정세에 못마땅해 했지만 이들은 인민들의 치열한 반제국주의 감정을 적절히 고려하지 않고는 아무 역할도 할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혁명적인 고양은 그 자체에 취약점이 있었다. 운동은 두 측면의 한계점이 있었다. 그로 인해 지배자들은 인민들의 반제국주의 감정을 분열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 한계점은 처음에는 벵골 분할기에 일어나 후일에는 인도 전체로 확산되었고 1906년 국민회의 회의에도 반영되었다.

첫째로, 캘커타 회의에서 스와데시와 거부운동을 포함하여 급진주의 진영이 제기했던 스와라지까지 거의 모든 구호들을 채택하였음에도, 국민회의 지도부는 여전히 온건파였다. 캘커타에서 일어났던 일은 페로제샤 메타(Pherozeshah Mehta), 고팔 크리쉬나 고칼레, 라쉬 베하리 고쉬(Rash Behari Gosh)와 같은 온건파 지도자들을 한편으로 하는 측과 띨라끄, 비삔 찬드라 빨, 그리고 랄라 라브빠트 라이(Lala Lajpat Rai) 같은 급진주의 지도자들을 또 다른 한편으로 하는 진영 사이에서 일시적인 타협이었다. 온건파들이 단지 급진파들과 타협하게끔 강제했던 환경(예를 들어, 벵골 분할 이후 대중들의 고조)이 변하기 시작하면서 온건파들의 역할이 다시 중요해졌다. 사실 그것이 수라트(Surat)에서 열린 국민회의의 회의에서 쟁점을 형성한 배경이었고 이어서 분열을 야기했다.

둘째로, 급진파를 포함하여 힌두세계관의 민족주의자들과 무슬림 중에서 등장하고 있던 이슬람주의적 세계관의 새세대 정치활동가들에게 두 공동체 사이의 의혹과 불신이 자라고 있었다. 그 취약점은 나중에 인도 정치 전체에 영향을 끼쳤는데, 커즌 총독과 벵골을 분할했던 그 계승자들이 그 약점을 교활하게 이용하였다. 영국 지배자들은 무슬림 다수 지역을 포함하여 무슬림들이 새 주를 지배할 수 있다면서 무슬림 엘리트들의 감정을 자극하려 노력하였다.3) 그리고 그것은 광범위하게 성공하였다. 다카의 나와브(Nawab)와 분할 반대 시위에 참가했던 초기의 여러 엘리트 지도자들은 결국 분할에 찬성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또한 무슬림 엘리트 지도자들은 영국 지배자들에게 고무받아 인도 정치에서 당연히 누려야만 할 권리와 특권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새로운 요구들과 ‘무슬림 동맹(Muslim League)’이라는 새로운 조직 건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국민회의 내부 두 진영의 갈등과 국민회의와 영국지배자들이 조정했던 동맹 간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정부는 분할을 철회하였다. 1911년 벵골은 재통합되어 하나의 주가 되었다. 다시 말해 영국 지배자들은 반분할 선동에서 보인 대중들의 정서를 억누를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노사과연>


1) Curzon Papers, Curzon to Brodrick, 17 February, 1904, cited in Tara chand, Ibid, Volume Ⅲ, p. 311.

2) 편집자주: 지난 연재(21)을 참조하라.

3) 역주: 힌두인과 무슬림 사이의 분열을 살펴보면, 영국지배자들의 ‘분할 지배전략’이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하게 오직 영국지배자들의 ‘계책’만을 힌두인과 무슬림 사이의 갈등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앞장에서 남부디라파드도 잠시 언급하였지만, 인도 신흥세력들이 힌두부흥주의를 내세우면서 무슬림들을 소외시켰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무슬림들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가 자연스럽게 나타났던 것이다. 영국 지배세력이 그런 약한 고리를 꿰뚫어 보고 교묘하게 인도인들을 서로 이간질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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