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대공황의 교훈에 대한 망각 (1)

폴 버켓(Paul Burkett)

번역: 강성윤(교육위원장)

[역자의 말: 이 글은 폴 버켓(Paul Burkett)의 1994년 논문 “Forgett-ing the Lessons of the Great Depression”(Review of Social Eco-nomy, 52:1, pp. 60-91)을 번역한 것이다. 폴 버켓은 미국 인디애나 주립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이며, 최근에는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연구로 알려져 있다. 이 논문은 20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21세기 대공황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에 대한 통찰과, 부르주아 경제학이 그 원인을 직시하지 못하고 땜질식의 처방만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지적하고 있다. 단, 케인즈와 그 계승자들에 대한 우호적 평가에는 유의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케인즈 이론의 본질에 대해서는 ≪현대부르주아경제학 비판≫에 실린(또는 ≪정세와 노동≫ 2009년 2, 3월호에 연재된) 예브게니 바르가(E. Barga)의 <케인즈주의는 왜 인기가 있는가?>를 참조할 것을 권한다. 두 번에 나누어 연재하며, 참고문헌 목록은 다음 연재분에 싣는다.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가 첨가한 내용은 [ ] 안에 들어 있다.]

I. 서론

최근 미국 경제의 침체 및 약한 “회복”과 함께[이 논문은 1994년에 발표되었다―역자. 이하 동일], 주류경제학과 주류정책은 1930년대 초반 이래 가장 심각한 파산과 혼란 상태에 도달했다.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이 지난 십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하락해 왔음에도, 재계 지도자들과 정책담당자들은 장기적 문제들(malaise)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여전히 “희생”과 “경쟁력”을 요구하고 있다. 냉전의 종식은 평화의 과실을 분배하기는커녕, 미국 자본주의가 자원들을 파괴적인 용도에서 생산적인 용도로 재배치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드러남에 따라, 오히려 더욱 악화된 고용 위기를 낳고 있다. 생태위기가 지속되는 와중에, 의료, 교육, 교통체계는 손상되고, 실업과 가동되지 않는 생산능력이 증가하는 반면, 고용된 노동자들은 생태적, 사회적으로 비합리적인 사적 소비양식을 유지하기 위해 더 힘들게 더 오랜 시간 노동하고 있다. 미국 자본주의라는 문화적 황무지에서 수천억 달러가 첨단무기, 금융투기, 광고, 그리고 다른 비생산적 활동들에 쓰이고 있지만, 다른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가능한 사회화된 보건의료, 휴가시간, 대중교통체계를 그 최소수준조차도 유지할 비용이 없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월 스트리트, 미디어 기업, 군산복합체의 장단에 춤추고 있는 민주당 출신 대통령[빌 클린턴]은 “중산층”의 모기지에 대한 재융자[주택담보대출 상환을 위한 추가대출]가 자신의 주된 정책성공이라고 주장한다.

어떻게 케인즈 혁명 이후 50년 이상이나 지난 지금 이런 상황이 도래했는가? 이 글은 주류경제학과 주류정책이 역사적 기억의 결여로 인해 현재 우리가 직면한 사회경제적 문제의 기본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1930년대에 케인즈와 다른 경제학자들이 제기한 문제들은 성숙한 자본주의 경제에서 장기침체의 가능성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세계자본주의 경제의 장기호황기에 케인즈의 분석이 “신고전학파-케인지언 종합”(Neoclassical-Keynesian synthesis)이라는 이름하에 훼손되고 침잠함에 따라, 이 침체논쟁(stagnation debate)은 더 발전되고 현실에 적용되기는커녕 잊혀지거나 의도적으로 버려졌다. 1930년대에 제기된 경제활동의 궁극적 목표에 관한 주제들은 기업자본과 군산복합체를 위해 봉사하는 기술관료적 케인즈주의를 위해 묵살되었다. 신고전학파-케인즈주의 경제학은 앞서의 침체논쟁과 어떤 연관도 갖지 않기 때문에, 이후의 위기와 근본주의적 신고전학파(공급측면 경제학과 새고전학파)의 부활에 제대로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비자발적 실업과 같은 공황기의 현상에 대해 전(前)케인즈적 설명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II절과 III절은 1930년대의 침체논쟁 및 제2차 세계대전 중과 그 후에 주류경제학이 장기침체에 관한 주제들을 유기(遺棄)하는 과정을 개관한다. Ⅳ절은 피터 테민의 최근 저서인 ≪대공황으로부터의 교훈≫(Temin, 1990)[이헌대 옮김, ≪세계 대공황의 교훈≫, 해남, 2001]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현 경제이론의 역사적 진공상태를 설명한다. 다음으로 주류이론과 정책의 역사적 결함을 1930년대에 논쟁되었던 역사적-체제적 문제들에 지속적으로 기반하여 발전해 온 주요한 전통 ― 과잉축적과 침체에 대한 네오맑스주의 이론 ― 과 대비시킨다. V절은 이 대안적 시각을 소개하고 이를 전간기와 현 국면에 적용한다. 이 분석이 제기하는 정치적 문제들은 Ⅵ절에서 언급한다.

II. 경제이론과 대공황: 대침체논쟁

대공황이 발발했을 때 미국 주류경제학자들 사이의 지배적인 견해는 투자와 산출의 초기 감소는 다소간 정상적인 순환적 현상이며 회복이 필연적으로 뒤따르리라는 것이었다. 경제학자들은 회복을 촉진하기 위해 적절한 통화, 임금, 가격 정책들이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애당초 주류경제학자들의 머릿속에는 이 회복이 실업률을 파국적으로 높은 수준 이하로 낮추는 데 실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대공황 및 그와 관련한 정책 쟁점들은 초기에는 투자의 완전한 회복에 대한 장기적 장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단기적 순환의 맥락에서 인식되었다(Stoneman, 1979, 2-3장).

경제가 붕괴하고 완전한 회복에 이르지 못한 채 1930년대가 지나가면서, “경제적 해석의 초점이 불가피하게 1921-1933년에 걸친 번영과 파산(boom and b-ust)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새로운 불황의 시대로 인식된 1930년대의 특정한 문제들로 옮겨졌다”(Stoneman, 1979, p. 99). 처음에는 경기하강의 심각성이 1920년대의 번영기 동안 형성된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중대한 금융적 불균형과 부문 간 불균형 때문일 수 있다는 절충적 분석들이 제시되었다. 이러한 분석들 중 몇몇은 가까운 장래에 완전한 회복이 가능하려면 국가가 “경제적 균형을 지지하기 위해 크고 새로운 역할들을 자임해야만” 한다는 것을 함의했다(Ston-eman, 1979, p. 53).1) 그러나 1933년에 시작된 약한 회복이 지속되고, 완전고용성장경로를 중심으로 단기적 변동이 순환적으로 발생한다는 기존 이론의 핵심이 근본적으로 의문시되지 않는 한, 이론과 정책에서 진짜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했다. 1936-38년 사이에 두 개의 사건이 결합되어 주류거시경제학 내의 논쟁 전체를 뒤흔들고 개조했다: 케인즈의 ≪일반이론≫과 1937-38년에 다시 시작된 경제의 붕괴.

≪일반이론≫에서 케인즈는 이자율이 저축과 투자가 완전고용수준에서 자동적으로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경향이 있다는 당시까지 지배적이었던 관념을 거부했다. 저축과 투자는 서로 다른 경제적 힘들에 의해 결정된다: 저축은 주로 소득과 그 분배에 의해, 투자는 주로 자본의 한계효율에 구현되는 기대에 의해. 이자율은 계획된 투자에 대한 저축의 상대적 크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유동자산시장에서 결정된다. 여기서 주된 독립변수는 계획된 투자이다: 만약 이 크기가 완전고용수준에서의 저축보다 작다면, 저축은 산출의 감소를 통해 완전고용에 못 미치는 수준에서 투자와 균형을 이룰 것이다. 설령 노동자들이 화폐임금삭감에 전혀 저항하지 않고 가격이 실질임금이 불변인 상태를 유지하도록 움직이더라도, 비자발적 실업은 화폐임금의 전반적인 하락을 통해 제거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반화된 디플레이션은 완전고용수준은 변화시키지 않은 채로 수입과 소비 사이의 격차(gap)[이른바 ‘디플레이션 갭’]를 낳기 때문이다(Keynes, 1964, p. 261). 더욱이 불황기 동안 유동성에 대한 높은 수요와 낮은(lax) 기대이윤은 확장적 통화정책이 완전고용수준의 회복을 달성하기에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Keynes, 1964, pp. 143, 158, 173). 따라서 “다소간 포괄적인 투자의 사회화가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태에 도달하는 유일한 수단임이 증명될” 수 있다(Keynes, 1964, p. 378).

케인즈는 자신의 분석을 경쟁적 자본주의 경제의 단기균형모형으로 표현했는데, 이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지배적인 정통 경제학 하에서, “케인즈가 자신의 체계를 전통적인 단기균형 형식으로 만들기 전까지는, 경제학자들이 … 그것이 종합하고 있는 어떤 중요한 가능성도 추적하지 못했기”(S-toneman, 1979, p. 116) 때문이다. 실제로 ≪일반이론≫에는 “불황 다음에 완전한 회복이 뒤따르고 순환적 과정이 반복된다는 가정이 전혀 없다”(Stonema-n, 1979, p. 100). 이것은 투자가 완전고용수준에서의 저축에 비해 장기에 걸쳐 부족할 가능성, 즉 대공황이 수익성 있는 투자처에 비해 저축이 과잉축적되는 장기추세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적절한 계기를 창출했다(Stoneman, 1979, p. 100). 앨빈 한센(Alvin Hansen)은 이 계기를 이용하여 “모든 생산요소들이 고용되어 있을 때 달성되는 소득수준과 소비지출 사이의 격차를 메우기에 충분한 크기의 투자지출”(1939, p. 371)을 방해하는 장기에 걸친 역사적 요소들을 강조하는 장기적 침체이론[흔히 ‘장기정체설’로 불림]을 발전시켰다. 이 요소들 중에는 인구증가의 둔화, 미합중국 대륙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기회의 감소, 자본절약적 혁신 등이 있었다(Hansen, 1939, p. 377). 이 현상들은 철도나 자동차와 같이 “투자행위의 강력한 급증”을 일으킬 수 있는 “신산업들”이 없는 상황에서 “투자처의 부족 문제”를 낳았다. 심지어 그와 같은 “거대 신산업”이 등장하더라도 문제를 영구히 해결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일단 그러한 신산업이 “모든 산업들이 결국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처럼, 성숙단계에 도달하여 성장이 멈추면, 진정으로 새로운 발전이 일어나지 않는 한 경제 전체가 심대한 침체를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Hansen, 1939, p. 379).2)

초기에 이 이론은 많은 미국 경제학자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졌는데, 그것은 다만 이 이론이 ≪일반이론≫으로부터 정당성을 부여받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센의 분석은 가속기 메커니즘(accelerator mechanism)[가속도원리(acceleration principle)란 소비재의 수요가 증가하면 생산재에 대한 투자수요 등 다른 수요증가를 파급적으로 유발하여 경기가 가속도적으로 상승한다는 주장이다. 역으로 소비재 수요의 감퇴는 생산재 수요의 감소를 유발하여 가속도적으로 경기가 하강하게 된다]에 대한 J. M. 클락(J. M. Clark)의 이전 연구를 포함하여 제도학파의 역사적이고 기술적인 관심사들을 통합한 것이었다(Stoneman, 1979, pp. 130-35). 특히 한센은 1930년대에는 가속기(the accele-rator)가 투자를 지배했는데, 이것은 바로 자발적 투자[또는 독립투자]가 장기적으로 정체함으로써 투자가 “즉각적인 소비수요에만 … 엄밀하고 협소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1938, p. 278). 따라서 소비의 상승이 멈추자 1933년 이후의 회복도 1937-38년에 단명한 것이다. 1937-38년 미국 경제의 하강은 한센의 “케인즈와 대공황에 대한 출중한 미국 해설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하게 했다(Stoneman, 1979, p. 122). 그렇지만 한센(1938, p. 282)은 1933-37년의 약한 회복이 중단된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긴축적인 정부정책들 때문이며, 이끌어내야 할 주된 교훈은 다음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당시의 조건에서는 투자가 불충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고전적인 가격-임금체계가 제도적인 강제에 의해 왜곡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투자의 중요한 본질에 영향을 미치는 더 깊고 더 자발적인 요인들 때문이었다. 케인즈와 그 뒤를 이은 한센은 마침내, 투자처란 보장되어 있는 것이라는 정통파의 교리, 신-정통파도 벗어나지 못했던 순환-지향적(cycle-oriented) 교리[경기순환의 자동조절에 대한 믿음]로부터 벗어났던 것이다(Stoneman, 1979, p. 117).

어떻게 다른 것일 수 있겠는가? 회복은 완전고용에 다다르지 못했고, 1937-38년 동안 실업률은 14.3%에서 19.0%로 상승한 반면 설비 가동률은 1/4 이상 하락했다(U.S. Bureau of the Census, 1975, p. 135; Foster, 1984, p. 205). 제조업 생산은 (1923-25년=100으로 할 때) 1936년 12월의 121에서 1938년 5월에는 73으로 감소했고, 1939년 6월까지도 97에 머물렀다(Board of Governors, 1936-39). 많은 경제학자들과 정책담당자들에게 문제는 더 이상 이미 진행 중인 막대한 정부 자극이 과연 필요한가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러한 자극이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제도들 및 대의제 민주주의와 모순되는 것은 아닌가였고, 만약 그렇다면 그와 관련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였다. 독일과 쏘련에서 진행되고 있던 견조한 확장이 투자에 대한 장기적 장벽이라는 문제를 더 기본적인, 체제적 문제들과 연결시키는 것을 고무했다:

충분한 기술적 진보와 신산업의 발전이 없는 상황에서 완전고용을 유지하려는 다양한 방책들이 제시되었다 … 공공투자는 인적․물적 자원들과 소비자들이 가진 자본재들이 공동체 전체의 신체적, 오락적, 문화적 필요에 봉사하는 집단적 성격을 갖도록 유용하게 설계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식의 해결책이 경제적 실행가능성과 정치적 통치에 심각한 문제들을 제기한다는 명백한 사실에 눈감을 수는 없다 … 이런 프로그램이, 그 재원을 세금을 통해 조달하든 채무를 통해 조달하든 간에, 자유기업체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고 얼마나 오래 수행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예측하기로는, 이것이 경제학자들이 미래에 과거보다 훨씬 더 집중적으로 씨름해야만 하는 문제이다 … 따라서 정치적 독재라는 멍에에 아직 굴복하지 않은 모든 나라들에게 하나의 도전이 제기되어 있다(Hansen, 1939, pp. 381-382).

요컨대, 장기적인 투자의 불충분함이라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완전고용을 유지하기 위해 요구되는 정책 하에서 자본주의의 작동가능성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는 다시 흔히 말하는 투자와 경제행위의 목적에 관한 문제들을 제기했다. 1937-38년에 나타난 약한 회복의 중단, 그리고 그것이 제기한 매우 자극적인 주제들은 또한 한센의 이론에 동의하지 않았던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분석을 역사적-체제적 문제들로 방향전환하게 만들었다. 예컨대, 슘페터는 일찍이 대공황의 심각성이 창조적 파괴와 회복에 대한 “비경제적” 장벽들 때문이라고 비난했었는데, 그것들은 “금본위제의 작동에 대한 방해들, 불균형을 가중시키는 경제적 애국주의, 산업과 무역의 원활한 작동과 양립할 수 없는 재정정책, 잘못된 임금정책, 이자율에 대한 정치적 압력, 필요한 조정에 대한 조직적 저항과 같은 것들”이었다(1934, p. 15). 이제 슘페터(1939, 15장)는 대공황의 원인을 세 가지 경기순환의 저점들(troughs)이 겹쳤기 때문으로 돌렸다: 단기경기순환(쥐글러), 더 짧은 재고순환(키친), 그리고 아주 긴 주기를 갖는(epoch-spanning) 콘드라티에프 장기파동순환. 회복의 실패를 설명하기 위해 슘페터는 뉴딜과 1930년대의 반(反)대기업 정서가 자본가들의 장기적 확신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강조했다(1939, pp. 1038-50). 결국, 슘페터가 케인즈-한센 접근법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대응은 심오한 역사적 문제들을 제기했으며,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가 나중에 자본주의의 장기적 유지가능성을 명시적으로 부정하게 되는 기저를 이룬다(Schumpt-er, 1950). 확실히 대공황과 같은 파국적 경기하강을 “근본적으로 정상적인 것이며 자본주의적 혁신과 진보가 극에 달한 것에 대한 이전부터 있어왔던 반작용(들)”로 보는 슘페터의 인식은 꽤나 충격적인 것이었다(Stoneman, 1979, p. 157). 1930년대의 침체위기가 “자본주의가 단지 그 자신의 작동을 통해서 만들어낸 적대적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다는 가설(Schumpter, 1939, p. 1038)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결국, 대체로 1930년대 주류경제학 사상의 발전에 영향을 미친 지배적인 요소는 사적 투자가 완전고용수준에 가깝게 움직이지 못한 것이었다. 1937-38년의 경기하강이 시작되자 루즈벨트는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고위급 임시국가경제위원회(Temporary National Economic Committee, TNEC)를 지명했다”(Sweezy, 1987, p. 32). 주류경제학과 주류정책이 바야흐로 “선진자본주의 재생산의 장기적 역사적 딜레마”(Foster, 1983, p. 178)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책을 고심할 것처럼 보였다.

III. 침체논쟁의 종결과 두 개의 신고전학파 반혁명

1930년대의 침체논쟁이 종결된 원인을 평가하면서 주된 요인과 부차적인 요인들을 구분할 수 있다. 후자에 대해 말하자면, 한센은 케인즈의 이론적 혁명을 완전하게 수용한 것이 아니었는데, 그는 높고 경직적인 임금이 투자와 기술진보를 방해하고 있다는 주장을 계속했던 것이다(Hansen, 1939, p. 380). 이것은 케인즈의 이론적 혁명에 정면으로 반대하면서 높은 실업률을 여전히 노동자들의 임금에 대한 요구 탓으로 돌리고 있던 경제학자들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Stoneman, 1979, pp. 138-50). 이 진부한 접근법은 1930년대 중반에 뉴딜과 전투적 노동운동의 고양에 대한 보수적 반동이 시작되면서 추가적인 자양분을 얻었다. 이런 상황에서 1937-38년의 경기후퇴는 루즈벨트 행정부의 정치적 생명을 위협했고, 이에 따라 이들은 빠른 경기회복을 보장하는 데 필요한 단기적 수단들에 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Stoneman, 1979, pp. 168-69). 메이(May, 1981, p. 128)가 지적했듯이 이것은 뉴딜이 구조개혁으로부터 “어떤 지출이 어떤 사회적 필요들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려보다는 총량에만 집착하는 지출자극(aggregate spending stimulus)으로 후퇴하는 것을 수반했다. 행정부는 또한 순수하고 단순한 반독점 사상이라는 형태로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를 재수용하기 시작했고, TNEC는 한센(1940)의 설득력 있는 증언에도 불구하고 대공황이 성숙한 자본주의 경제에 제기한 기본적인 문제들보다는 경제권력의 독점적 집적[즉 집중]을 문서화하는 것에만 집중했다(Lynch, 1946; Mitchell, 1975, pp. 361-65; Lekachman, 1969).

그러나 침체논쟁을 끝장내버리는 데 성공한 주된 요인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미국경제의 회생을 위해 요구된 막대한 정부구매에 대한 보수파들의 반대는 1939년 총력전경제(full-scale war economy)로의 전환과 함께 빠르게 증발해버렸고, TNEC의 반독점 선언과 군대-기업 간 계약을 통한 경제권력의 집적 증대 사이의 모순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Mitchell, 1975, pp. 47-54, 363-65). 전쟁은 장기침체 및 그와 관련한 구조적 주제들에 대한 어떤 논의도 점점 더 불가능하게 했으며, 1941년에 주류 언론과 TNEC의 마지막 용두사미격 보고서는 “한센 박사의 생각에 …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박할 어떤 것도 (TNEC의) 기록에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센의 침체가설을 “비미국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단호히 거부하고 있었다(Lynch, 1946, p. 348).

전쟁 말기와 실업률이 7.2%까지 상승했던 1948-50년의 경기후퇴 동안에는 침체에 대한 논쟁이 약간 재개되었다(Stoneman, 1979, pp. 175-81; Du Boff, 1989, pp. 95-96). 그러나 전례 없는 평화시의 [냉전을 빌미로 한] 군비지출, 유럽과 일본의 재건, 확고부동한 미국의 전지구적 헤게모니가 결합되어 일시적으로 불충분한 투자처라는 문제를 극복하고 장기팽창을 지지함에 따라 이 논쟁은 재빨리 가라앉았다. 비록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장기침체의 조짐이 감지되기도 했었지만 ― 특히 국방비와 다른 정부지출의 확장적 효과들이 보고되었을 때(Hansen, 1964, 2장; Vatter and Walker, 1990, 6장) ― 주택, 자동차와 다른 내구재들에 대한 소비의 성장이 “중산층” 교외 거주자들의 급속한 확대와 연계되어 주류경제학자들, 정책담당자들, 그리고 실제로 많은 노동계급들 사이에서도 장기번영을 낙관하는 분위기를 낳았다.3)

이런 환경에서, 케인즈의 혁명은 단기경기순환에 대응하기 위한 일련의 기술관료적 정책처방들로 축소되었다. 이론적 수준에서 보면, 케인즈가 자신의 분석을 단기균형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 그 분석이 “신고전학파-케인지언 종합” 아래 침잠하는 것을 용이하게 했다. 이 체계는 케인즈의 유효수요와 화폐시장 분석에 대한 힉스(Hicks, 1937)의 정태적 IS/LM 해석과 노동시장과 총재화공급에 대한 전(前)케인즈적 논의(Modigliani, 1944)를 결합시켰다. 종합 모형은 임금과 가격의 유연성이 완전고용을 유지할 수 있다는 원리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Weeks, 1989를 보라). 만약 완전고용상태에서 재화의 과잉공급이 존재한다면, 경직성이 없는 상태에서 가격수준과 화폐임금은 하락할 것이다. 공급측면에서 화폐임금의 하락이 완전고용을 유지하는 한편, 가격수준의 하락은 실질화폐공급을 증가시킴으로써 이자율을 낮추고 투자지출이 완전고용수준으로 되돌아가도록 자극할 것이다. 케인즈와 한센에 비해, 이 종합은 투자의 결정요인으로서 이자율에 더 많은 중요성을 부여했고, 투자가 더 낮아진 이자율에도 반응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예외적인 경우”로 취급했다. 이 모형은 임금과 가격 경직성이 외생적으로 주어져 있는 상황에서 단기적 투자변동을 상쇄시키는 재정 및 통화정책의 “미세조정(fine tuning)”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렇지만, 또다시 실제적-물질적 조건들이 새롭게 떠오른 주류적 합의에 주된 기초를 제공했다. 경기조정적(counter-cyclical) 지출의 사용가능성이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자발적 사적 투자를 단지 정부지출 펌프로 대체하[기만 하면 된다]는 전적으로 기술관료적인 형태의 케인즈주의를 낳은 것이다. 몇몇 존경할 만한 예외들을 제외하고는, 엘리트 주류경제학자들과 정책조언자들 사이에서 정부지출과 연계된 사회발전패턴이 갖는 집단적 합리성에 대한 비판적 관심은 거의 없었다(Du Boff and Herman, 1972; Stoneman, 1979, p. 204 이하).4) 1930년대의 침체논쟁에서 제기된 경제행위의 내용 및 개인적, 집단적 목적들과 관련된 주제들은 잊혀졌다. 이런 이유에서, 두 보프(Du Boff, 1989, p. 118)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미국정부가 군사케인즈주의를 선택한 것은 그것이 “미국 자본주의에 필요한 매우 기능적인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비지출은 전후 미국 자본주의의 딜레마가 극심했던 바로 그 때 정부확장에 대한 장벽들을 깨뜨려주었다. 1948-49년의 경기후퇴는 다시 한 번 1930년대의 근본적 문제, 즉 사적 투자가 완전고용상태의 안정적 경제성장을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믿을 만한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다. 뉴딜에 대한 정치적 반동이 극에 달하고 사실상 모든 비군사적 형태의 국가개입에 대한 저항이 되살아나고 있을 때, 경제에 대한 정부지원의 필요성이 다시 대두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와 기업지도자들이 군비지출에 불나방들처럼 이끌렸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Du Boff, 1989, p. 98).

군비지출은 “집적이 심화된 경제부문들에서 가장 큰 몇몇 기업들”에게 높은 이윤을 보장하였으며, “사적 수요를 방해하거나 포화시키지 않았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이 수립한 전지구적 정치-군사 제국에 장비와 인력들[물적․인적 자원]을 제공하였으며, 또한 의존국들(client states)에게 무기를 수출할 수 있는 수익성이 좋은 기회를 창출하였다(Du Boff, 1989, pp. 118-19).5) 1950년대 중반까지 “미국의 세기”와 냉전이라는 이데올로기들이 확고하게 정립되었다. 급진파들은 노동조합과 학계에서 제거되었으며, 1960년대 중반까지도 군비지출의(또는 생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비합리적인 미국식 삶의 자동차화를 지원하기 위한 고속도로를 비롯한 다른 프로그램들의) “고차원적 목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배척당하거나 더 험한 꼴을 당했다. 요컨대, 케인즈에 대한 반혁명은 맥카시 시대의 마녀사냥, 태프트-하틀리 법 하의 조직노동에 대한 탄압, 그리고 군사케인즈주의의 발흥에 의해 인도되었다(Magdoff and Sweezy, 1981, p. 187).

다음 반혁명은 실로 “반혁명 내부의 반혁명”으로 1970년대 중반에 침체가 (이번에는 인플레이션과 함께) 재발함으로써[즉 스태그플레이션] 신고전학파-케인즈주의 이론과 정책에 대한 근본주의적 신고전학파의 도전을 부추긴 것인데, 이는 새고전학파의 합리적 기대와 연속적 시장청산모형에서 절정에 달했다(Lucas and Sargent[이들은 각각 1995년과 2011년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1981; Sargent, 1986). 새고전학파는 임금과 가격 경직성을 시장청산균형을 향해 나아가는 경제주체들의 최적화라는 신고전학파적 환상으로부터의 부당한 이탈로서 거부하고, 노동자들과 기업들이 모형의 구조 ― 경제주체들이 관련된 경기조정정책체제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알고 있다는 가정을 포함한다 ― 로부터 예견되는 총수요변화의 어떤 실질적 효과도 완벽하게 예상하고 상쇄시키는 모형들을 구축했다. 이 모형들의 함의는 실업이란 단기일반균형에서 나타나는 순수히 자발적인 현상이라는 것이었다. 새고전학파적 접근의 발흥은, 다시 다른 반동적 이론경향들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는데, 예컨대 공급측면 경제학은 유효수요 문제를 완전히 무시하고 정부규제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모든 사적 부문의 행위를 사회적으로 합리적인 것으로 간주한다(Gilder, 1981). 신고전학파적 케인즈주의자들은 이 도전들에 대해 1930년대에 케인즈와 한센이 개시했던 근본적인 장기적 주제들로 돌아감으로써 대응하지 못했다. 대신에 “새케인즈주의”의 주된 대응은 합리적 기대에 기초한 합리적 행동의 결과로 임금과 가격 경직성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었다[이른바 ‘메뉴비용’이나 ‘효율성임금가설’]. 이러한 내생적 경직성들과 다른 조정 실패들이 어떻게 신고전학파-케인지언 모형의 단기적 경기조정정책 유효성 명제를 구출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투자의 장기적 부족 가능성은 무시되었다(Mankiw and Romer, 1991). (다음호에 계속) <노사과연>


1) 대통령 직속 연구 위원회에 제출된 웨슬리 C. 미첼(Wesley C. Mitchell)의 “리뷰”를 보라: “균형이라는 핵심적인 문제, 또는 이와 관련된 어떤 부차적인 문제라도 다루기 위해서는 경제계획이 요구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 문구[경제계획]는 사회의 능력이 아닌 사회의 필요를 표현하고 있다”(1934, p. xxxi).

2) 케인즈(1937) 또한 성숙한 자본주의 경제들에서의 장기침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이론≫은 이 주제를 다소 모호하게 다루고 있고, 장기침체는 단지 미래의 문제, 즉 단기적 경기변동이 확장적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을 통해서 다스려지고 난 뒤의 문제임을 시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있다. “금리생활자의 안락사”(Keynes, 1964, p. 376)라는 케인즈의 제안은 이러한 미래 예측적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더욱이 케인즈가 침체경향을 논하고 있는 곳에서조차 그의 분석이 영국의 경우에만 한정된 것인지가 항상 명확하지는 않다. 따라서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 동안 ≪일반이론≫이 장기침체에 대한 관점을 포함하고 있는지를 둘러싼 많은 논쟁이 있었다(Guthrie and Tarascio, 1992). 그러나 ≪일반이론≫이 장기적 침체(secular stagnation)라는 주제에 대한 연구에 과학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정당성을 최초로 부여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3) 군사케인즈주의의 비호 아래 직업적 경제학자들이 침체라는 주제를 유기한 역설적 상황은 일찍이 한센에 의해 지적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세계에서 예상해 볼 때, 침체라는 문제는 무척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 실제로 1949년에조차 ― 연방예산이 약 400억 달러에 달하고 그 중의 반이 국가안보를 위해 사용되었다 ― 상황은 명백히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30년대를 지배했던 평화시의 조건들과 전혀 달랐다. 얼마나 많은 경제학자들이 자신들의 눈을 감고 1940년 이후의 사건들이 침체테제가 틀렸음을 증명하였다고 담담하게 선언할 수 있었는지 놀라울 뿐이다!”(1954, p. 409)

4) 이렇듯 “고용이란 무엇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토론하는” 데 실패한 것을 조안 로빈슨(Joan Robinson)은 “경제이론의 두 번째 위기”로 언급한다―첫 번째 위기는 “유효수요라는 문제에 직면하여 자유방임이 붕괴한 것”이다(1972, pp. 6, 8).

5) “1948년 하반기에 첫 번째 전후 산업순환이 끝난 이래, 오직 군비지출의 증가만이 공식실업률을 ‘완전고용’의 지표인 4% 이하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Du Boff, 1989, p. 101)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16년 동안 대공황과 전시의 결핍에 의해 억눌렸던 거대한 수요”가 추동했던 1945-48년의 순환적 확장 뒤에는 곧바로 6․25 전쟁에 의해서만 끝날 수 있었던 경기하강이 뒤따랐다(Du Boff, 1989, pp. 95-96). 1953-61년 동안 과잉생산능력 문제가 다시 대두했는데, 기업의 고정자본투자는 기본적으로 저조했고 군비지출이 경제가 진짜 심각한 침체에 다시 빠지는 것을 막은 주요 요인이었다(Du Boff, 1989, pp. 100-101; Hansen, 1964, pp.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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