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추노

박현욱 | 노동예술단 선언 “몸짓선언”, 자료회원

 

 

“쫓고 쫓기는 게 우리 인생. 개만도 못 한 것이 노비의 생. 사는 것이 전쟁….(이하 생략)”

우연히 티비를 켰는데 이런 노래가 흘러나온다. 몇 년 전에 방송했던 ‘추노’라는 드라마에 삽입되었던 노래의 노랫말인데. 제법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라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그 ‘추노’라는 게 도망간 노비를 쫓는다는 의미이다. 드라마 내용도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지배계급인 양반의 핍박을 피해 도망을 가고 그를 쫓아가 다시 잡아오는 추노꾼들의 이야기가 주된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드라마 속 노비들의 삶은 정말 처참하다. 머 물론… 실제의 반의반이나 그려냈을까마는…. 노랫말대로 사람의 그것이라 볼 수 없는 것이 그들 노비의 삶이었을 터. 그 지옥 같은 인간 이하의 삶을 벗어나려 그들은 목숨을 걸고 그들의 주인(?) 즉, 양반의 손아귀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실제로 얼마나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역사적인 기록에 종종 추노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당시 노비들이 지배계급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노력이 적지 않았을 터인데…

 

암튼 우리 입장에선 때론 노비들의 삶이 안타까워 눈물짓기도 하고 잔인하기 짝이 없는 당시 지배계급의 태도에 분노하기도 하고 더러 그런 양반들을 혼내주는 인물들의 활약에 통쾌해 하기도 하며 그 드라마를 통해 인간의 역사를 보게 된다.

헌데… 그런 눈물, 분노, 통쾌함보다 더욱 크게 드라마를 통해 느끼게 되는 것은 아마도 이제 그런 지독한 신분제와 같은 계급지배 사회가 끝났으며, 다행히도 우린 그런 제도로부터 해방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안도감이지 않을까…

나 역시 그 드라마를 무척이나 재미(?)있게 봤지만 그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은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봐라! 이제 저런 지독한 세상은 끝났잖아. 니가 얼마나 복 받은 세상에 살고 있는지 알겠지?’

 

그래… 굳이 ‘역사는 발전한다’는 명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확실히 그 시대보다 인류는 진보했다. 해서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보다 어쩌면 이 시대를 사는 우린 좀더 ‘복’받은 인류인지도 모른다.

 

허나 어찌된 영문인지 여전히 이 시대에도 스스로를 ‘노비’라고 말하는 이들이 무척이나 많다.

“현대판 노비제도 비정규직 철폐하라!!”

언젠가 어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서 들었던 구호이다. 그 시대의 노비만큼이나 현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이 처참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일 테지만 그런 구호를 외치고 있는 당사자들조차도 ‘아무리 그래도 노비와 같겠는가’라는 생각들은 하고 있지 않았을까?

뭐… 월차 휴가를 신청했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하고 그 폭행 때문에 입원하게 된 병원에까지 찾아온 공장 관리자로부터 발목 식칼테러를 당한 어느 비정규직 노동자의 이야기도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일을 잘 못하거나 사장 눈 밖에 났다하여 공장 마당에서 공개적으로 멍석에 말려 매타작을 당하거나 얼굴에 ‘비정규직’이라는 불도장 낙인이 찍힌 채 살아가는 비정규직 노동자 얘기는 들어 보질 못했으니까 말이다.

 

헌데 ‘비정규직 제도는 현대판 노비제도’라는 그 말을 듣던 어느 노동자가 이런 탄식 섞인 말을 뱉어낸다.

“에이구…노비는 그래도 ‘종신고용’이기라도 하지…”

그리고 옆에 있던 이가 이렇게 맞장구친다.

“흐흐흐 글치. 적어도 짤릴 걱정, 굶어 죽을 걱정은 안 하잖어”

 

…참…나…

이건 뭐… 그 드라마를 보며 내가 가졌던 ‘그 시대보단 낫다’는 안도감… 이들이 보기엔 참으로 한가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던 거겠군…

지독한 고용불안, 그로 인해 위태로운 앞날에 대한 공포로 채워진 삶…. 그 건 어쩌면 당사자들에겐 노비의 삶조차 부러워하게 만들 만큼 처절한 현실이 되고 있다는 거지… 이쯤 되면 ‘역사는 발전한다’는 그 명제조차 얼마나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리겠냔 말이다.

 

그래서 좀 따져봐야겠다는 오기가 생기는데… 정말 이 시대 비정규직, 아니 모든 노동자들이 그 당시의 노비보다 못 한 건지 아니면 더 나은 건지, 그것도 아니면 똑같은 건지.

그 딴 한가한 생각할 시간 있으면 비정규직 철폐하라는 구호 한번이라도 더 외치라고 말씀하실 분이 계실지는 모르겠으나, 이게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란 말이지. 우리가 이토록 뼈빠지게 투쟁하는 이유가 바로 그 이전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이잖은가. 당연히 과거와 현재를 분석하지 않고선 그보다 더 나은 미래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우선 노비나 노동자나 누군가에게 빼앗기고 짓밟히고 억압 받는 존재이며, 당대 사회의 권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측면에서 동일하다. 헌데도 많은 이들이 그 드라마를 보며 적어도 그 시대보단 복받았다고 안도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그들 노비들은 지배계급으로부터 지배당하는 피지배계급임을 확실히 말할 수 있으나 지금의 노동자들은 ‘자유’를 가진 자들이니 그리 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일 게다. 이 시대 역시 계급지배 사회이고 노동자는 피지배계급이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한다면 십중팔구 “반상의 차별, 신분제가 없어진 게 몇 년 전이며, 링컨 아저씨가 노예를 해방한 지가 언제인데 뭔 헛소리를 지껄이냐”는 말을 들을 게다.

 

이쯤 되면 아까 비정규직을 현대판 노비제도라 했던 이들도, 그 노비의 삶마저 부러워했던 이들도 적잖이 억울할 일이다. 분명히… 이전 역사의 피지배계급과 다름없는 게 우리 삶일진데, 이 사회의 법, 제도 어디에도 그런 규정 따윈 없으며 심지어 그 권위가 추상과도 같다는 법 중의 법, 헌법에는 말머리부터 우리들이 권력의 주체라고 명시되어 있으니 말이다. 뭔 놈의 권력의 주체가 그 이전 시대 피지배계급의 삶마저 부러워하고 있냔 말이지…

 

사실 그 궁금증의 해답은 바로 그 드라마의 내용과 아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대화 속에 담겨 있다.

확실히 그 시대 노비들은 노비문서라는 족쇄에 묶여 있어 행여 지배계급의 손아귀로부터 도망칠라치면 추노꾼의 추격에 벌벌 떨어야 하고 국법에 의해 엄히 다스려졌을 텐데, 적어도 이 시대의 노동자들에게 ‘노동자 문서’따윈 존재하지도 않고 그들의 지배자인 사장으로부터 벗어난다고 추노꾼의 추격을 피해 도망다닐 필요도 없다. 아니 오히려 반대로 요즘같이 구조조정이 일상적인 상황에선 사장을 떠나겠다는 노동자에게 아마도 그들 사장들은 감사패라도 주고 싶을지 모른다. 안 떠나겠다고 버티는 게 골치 아픈 일이지 스스로 떠나겠다는 건 특별한 경우를 빼고선 환영할 일일 테니 말이다.

 

추노… 맞다. 그들 노비들과 이 시대 노동자가 가장 다른 것은, 드라마 내용처럼 노비들은 지배자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아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얘기처럼 노동자들은 지배자들의 손아귀로 들어가기 위해(고용되기 위해) 발버둥친다는 점이다. 당연하게도 그 이유는 노비는 지배자의 손을 벗어나야 오히려 인간다운 삶을 찾게 되고 노동자들은 지배자의 손아귀로 들어가야 최소한의 인간다움이라도 유지하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서 추노란 과거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존재한다. 과거의 추노가 말 그대로 도망간 ‘노비’를 ‘추격’한다는 의미의 추노라면 현재의 추노는 그 반대로 안 나가려는 ‘노동자’를 ‘추방’한다는 의미의 추노일 테다. 물론 전문적으로 노동자들을 추방하는 추노꾼들도 존재한다. 용역깡패라는 이름으로… 요즘 명성을 떨치고 있는 ‘창조 컨설팅’ 같은 전문 노동자추방 컨설팅 회사의 이름으로…

 

당최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는지를 얘기하자면 적잖이 길어져야 하니 차차 하도록 하고, 암튼 슬슬 억울함의 실마리가 풀어지긴 한다. 현재 우리 사회가 분명히 계급지배 사회임에도 왜 굳이 법, 제도로써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강제(이것을 어려운 말로 ‘경제외적 강제’라고 한다.)하지 않고 있는지 말이다. 그것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현 자본주의 사회는 법이나 제도로 그것을 강제할 필요가 없을 만큼 진화한, 말하자면 그 발전이 최종 단계에 이른 ‘계급지배’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선 ‘역사는 발전한다’는 명제는 당연히 유효한 것일 게다.

 

주변을 돌아보자. 공장으로 돌아가자고 수 천일을 길거리에서, 잠들고 국가권력에 의해 법적 처벌을 받아가며, 더러는 그렇게 공장으로부터 쫓겨난 동료들을 죽음으로 떠나보내며, 투쟁하는 해고 노동자들의 투쟁은 숱하지만, 공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그토록 싸우는 노동자를 본 적은 없을 테다. 노비문서를 말소하여 그 신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꿈이었던 노비들과는 정반대로 내가 노동자임을 즉, 내가 피지배자임을 문서로, 제도로 인정받고자 싸우는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의 투쟁. ‘당신이 나의 진짜 지배자요’라고 외치며 그것을 인정받고자 수백 일을 철탑에 올라 싸우는 간접고용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10대 20대를 통으로 바쳐 자신의 지배계급으로부터 간택(고용)받기 위해 치열한 입시 전쟁과 입사 전쟁을 치러 내고 있는 수많은 피지배 인민들.

 

그들 모두는 적어도 법, 제도로서는 분명히 ‘자유민’이다. 허나 시장질서가 모든 것인 이 자본주의 현실에선 오히려 목구멍이란 포도청에 갇혀 철저히 자유를 박탈당한 이들이다. 생존을 위한 생산수단이 철저히 그들의 지배계급인 자본가들의 수중에 있기에 그들 수중으로 꾸역꾸역 들어가야만 하는 이들이다. 해서 그 ‘자유민’의 ‘자유’란 생산수단을 가진 지배계급, 즉 자본가에게 선택되지 않고 굶어 죽을 ‘자유’도 가진 이들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미 자본-임노동관계라는 경제적, 물질적 질서 자체가 지배와 피지배를 강제하기에 따로 법, 제도로 지배와 피지배를 규정하고 강제할 필요가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자본주의 계급지배 시스템이기에 우린 아까처럼 혼란스러움을 겪을 수밖에 없고, 그런 이유로 저들 지배계급인 자본가들은 그들의 정체를 숨겨가며 지배계급으로 군림할 수 있는 것일 테다.

 

드라마 얘기로 시작했으니 드라마 대사 하나를 인용하며 일단 이 글을 맺을란다.

드라마 속에서 한 여성노비가 어찌하다 주인 양반의 손을 벗어나 양반행세를 하며 살게 되었는데, 그를 사랑한 한 남성은 양반이었다가 누명을 쓰고 노비로 전락한 이였다.

다시 누명을 벗고 양반 신분을 회복하려는 그가 그 여인에게 “세상의 질서는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한다. 양반행세는 하나 노비이며 여전히 추노꾼에게 쫓기는 그 여인은 그에게 이렇게 답한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세상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둘의 계급적 관점 차이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드라마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여인에게 중얼거린다. “다행이오. 그 무서운 말은 진실이 아니니까요.”<노사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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