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소부르주아 계급의 타락과 힌두 민족주의 정권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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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진 | 양심수, 회원

시작글: 극우 힌두 민족주의 단독 정권의 탄생

올 4월부터 5월 사이에 치러진 제 16대 인도하원(Lok Sabha) 선거 결과의 파장이 크다. 인구 11억의 대국인 인도는 남아시아는 물론 국제정세에 끼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거 결과 세속주의를 거부하고 힌두민족주의 이념정당인 인도국민당(Bharatiya Janata Party; 이하 BJP)이 압도적인 의석수로 단독정부를 세웠다. 이 글은 어떻게 인도국민당이 성장하여 정권을 잡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힌두 마하사바(The Hindu Mahasabha)는 1907년 뻔잡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1915년도에 인도의 전국조직으로 발전했다. 국민자원봉사대(Rashtriya Swaya-msevak Sangh; 이하 RSS)라는 힌두 군사조직은 1925년 만들어졌는데, 1948년 1월, 간디가 이 단체 소속 청년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불법 단체가 되었다. 그래서 국민자원봉사대(RSS)와 연계된 바하라띠야잔상(The Bharatiya J-an Sangh, 또는 Jan Sangh)이 1951년 결성되었다. 인도국민당은 바로 이 잔상(JS)을 뿌리로 하며 국민자원봉사대(RSS)를 외곽조직으로 두고 있다.

이글은 잔상(JS)과 국민자원봉사대(RSS)가 인도 정치에 은밀히 침투하는 과정을 자세하게 기술하여 인도국민당(BJP)의 성격과 특징을 보여줄 것이다.

특히, 이들 종교조직들이 인도 정치에 침투해 들어가 정치적 뜻을 세운 원인을 인도의 사회 경제의 모순 즉, 불평등한 토지 개혁의 실패와 빈곤으로 보고 힌두 이데올로기의 정치화 과정을 중심으로 기술한다. 나는 이 글에서 종교적 이념에 불과한 힌두 이데올로기가 인도의 정치 이데올로기로 기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민족 부르주아들의 배신과 사회 경제 혁명의 실패가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불철저한 토지개혁의 혜택을 받은 신흥 중농과 소부르주아 그리고 중간계급의 자본가들이 지방의 토호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힌두 이데올로기가 이들의 정치 이데올로기로 되면서 종교 이데올로기에서 정치 이데올로기로 발전하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이 글은 이와 같은 시각에서 힌두-무슬림 갈등의 뿌리와 힌두 이데올로기가 성장하게 된 사회 경제적 배경과 정치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글은 힌두 이데올로기는 자본가 계급의 필요와 요구에 부응하는 ‘승자독식’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며 따라서 독점자본가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힌두 이데올로기는 파시즘을 경향성을 갖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글이 힌두 이데올로기의 폭력성과 극우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힌두 민족주의의 뿌리: 힌두-무슬림 갈등

남아시아의 넓은 대륙은 ‘인더스 문명’이라는 고유의 문명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면서 힌두교라는 종교를 발전시켰다.

10세기경부터 이슬람이 남아시아 대륙에 진출하면서 이슬람과 힌두교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16세기경에는 이슬람 세력이 북인도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무굴제국을 건설하였다. 다양한 종교적 색채를 지니고 있는 힌두교의 특성상, 인도인들은 무슬림 지배자들과 크게 적대적이지 않았다. 특히 하층 카스트에 속했던 인도인들은 힌두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는 이슬람교에 대해서 더 우호적이었다. 무굴제국의 지배자들도, 남아시아 대륙이 너무나 방대하고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므로, 남아시아 대륙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오히려 그들이 힌두 문화에 동화되어 융합되었다.

남아시아에서 힌두와 무슬림 사이의 갈등의 씨앗은 영국제국주의자들이 뿌렸다. 영국제국주의자들은 지방의 힌두 왕국들에 자금과 무기를 제공하면서 무굴제국을 흔들었다. 18세기경부터 인도를 직접 식민 지배하게 된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드넓은 남아시아 대륙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철저히 ‘분리지배(divide and rule)’ 정책을 폈다. 이와 같은 분리지배 정책의 산물이 힌두-무슬림 사이의 갈등과 분열 그리고 대결을 이끌었다.

영국지배자들은 1905년 인도정부법을 만들어 힌두와 무슬림 인구 비율에 따라 피선거권의 비율을 나누었고 1919년, 1935년 인도정부법 개정을 통해 그런 선거제도를 확대시켜 나갔다. 이는 독립운동을 벌이던 인도인들의 단결을 깨는 유용한 전략이기도 했다.

영국제국주의자들은 1905년 무슬림이 많이 사는 벵골지역의 분할을 시도하여 힌두인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결국 벵골 분리안은 철회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힌두인과 무슬림 사이의 폭동과 갈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이때부터 인도인들은 독립운동 내내 종교 갈등에 발목이 잡혔고 1947년에는 인도와 동파키스탄, 서파키스탄(방글라데시)으로 분리 독립됐다.

간디는 이와 같은 종교 갈등을 우려하여 무슬림을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다가 국민자원봉사대(RSS) 소속 청년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 인도의 지배자들은 종교 갈등이 더 심화되면 인도는 파멸할 거라 직감하고 ‘세속주의’를 국가 이정표로 세워 힌두 이데올로기를 억제시켜갔다. 그런 노력의 결과, 1970년대까지 인도에서는 힌두 민족주의자들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토지개혁과 산업화의 실패와 중농(소부르주아)의 대두

인도의 인민들은 악질적인 고리대금업자들과 매판자본가 그리고 반동적인 대지주들로부터 극심한 착취를 당했다. 이들 반동세력들은 영국제국주의자들의 비호를 받으며 자본을 축적했다. 영국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한 인도는 이와 같은 식민지 경제의 유산을 빠르게 해체하고 새로운 경제발전의 기초를 닦는 게 절실했다.

무엇보다도 인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헐벗고 굶주린 소작인과 농업 노동자를 위한 토지개혁이 요구됐다. 그러나 권력을 쥐게 된 민족 부르주아 계급은 사적소유를 부정할 수 없는 그들의 계급적 한계 때문에 과감한 토지개혁에 나서지 않았다.

‘유상몰수 유상분배’라는 원칙에 따라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겠다는 것은 처음부터 토지개혁을 할 의지가 없었음을 증명한다. 대중들의 토지개혁 요구에 떠밀려 민족 부르주아 계급은 하는 수없이 토지개혁을 하겠다면서 1960년대부터 자민다리(Zamindars)제 폐지, 소작제 개혁(tenancy reform), 토지소유상한제(ceilings on size of landholdings), 협동조합촉진, 마을 발전 계획(community development programme)을 시작했지만 실효성 있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예를 들면, 대지주인 자민다르는 그들의 친척들을 내세워 차명으로 ‘개인경작(personal cultivation)’ 증명을 위조해 토지몰수를 피해갔다. 이들 지방 토호 세력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토지개혁에 저항하면서 정치적으로 결집하게 되는데, 이런 움직임이 힌두 민족주의 세력의 토양이 됐다.

소작제 개혁의 목적은 소작농의 경작권과 소유권을 인정하여 소작민의 토지소유를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작농들은 교육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 문맹자들이었고, 구두계약으로 대지주로부터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했다. 도리어 소작제 보호법이 만들어지자 대지주들은 땅을 빼앗길까봐 기존의 소작농들을 쫓아내어 이들의 고통이 더 커졌다. 1975년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구자라트에는 약 130만 소작농 가운데 77만 명이 농지를 갖게 됐고, 마하라스트에서는 260만 소작농 가운데 11만 명이 토지를 갖게 됐다. 이처럼 토지를 갖게 된 소작농들은 전체 소작농의 절반도 안됐다1). 당시 인도 농촌지역은 문맹률이 평균 70% 이상이었으므로 사실 정확한 소작농의 규모도 파악되지 않는다. 따라서 전체 인도 소작농들의 실태는 훨씬 더 심각했을 것이다.

이처럼 소작농 보호법이 만들어졌지만, 절반 이상의 소작농들은 농지에서 쫓겨났으며, 혜택을 본 소수의 소작농들은 새로운 지배적인 카스트로 부상하면서 더 많은 혜택을 얻고자 정치에 적극 참여하게 됐다. 이들 신흥 중농들의 등장도 힌두 민족주의 성장에 주요 요인이다.

토지개혁의 성과가 미미하자 또 다른 대안으로 토지 보유 상한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토지상한제를 위한 입법을 각각 개별 주에 떠넘김으로써, 개별 주마다 토지 보유 상한선이 제 각각이었으며2), 대지주들은 차명으로 토지를 분산시켜 토지 상한제를 피해갔고 나중에는 토지 상한제법 자체가 유명무실해지면서 별 의미도 없는 법이 됐다. 또한 제2차 5개년 계획에 따른 산업화 전략으로 차, 커피, 고무플랜테이션, 사탕수수, 과수원, 양털농장, 가축농장 등의 토지는 토지소유 상한제에서 제외시켰다. 자본가들에게는 투자를 빌미로 무제한적인 토지소유를 허용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1961년 토지상한제 법이 제정되고 1970년까지 비하르, 마이소르, 께랄라, 오리샤, 라자스탄에서는 단 1에이커 땅조차 잉여토지에 대한 토지소유 전환이 일어난 사례는 없었다3).

결국 인도의 토지개혁은 실패했고 부농들과 ‘달구지 자본가들(Bullock capita-lists)’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면서, 힌두 민족주의 정치를 촉진시킨 경제적 토대가 생겼다. 이들 신흥세력의 성장으로 새로운 정치 세력이 나타났다4).

한편, 인도 부르주아들은 자본 축적의 방법을 놓고 분열하는데, 이런 정치적 혼란은 힌두 이데올로기가 부르주아들의 새로운 지도이념으로 성장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영국 제국주의자들로부터 자본축적을 방해받은 인도 부르주아는 자본유출을 막고자 독립 초기 ‘수입대체산업화(The import-substitution industrialization)’ 전략을 따랐다5). 이런 산업보호육성정책은 부르주아들의 독점을 보장하고, 다국적 기업과의 경쟁에서 보호해주었다. 이에 만족한 민족 부르주아들은 네루정권을 강력히 지지했으며 힌두 이데올로기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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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자본가들의 자본축적도 급격히 향상되었는데, [표1]의 산업생산지표를 보면, 1960년을 기준으로 1970년대는 1950년대와 비교하여 산업생산량이 크게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인도의 산업생산량이 늘고 기업들이 발전하는데도 국가재정 적자는 악화되었고 기대됐던 급속한 산업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은 자본을 축적한 자본가들이 더 이상 생산에 투자하지 않으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자본가들은 민족 부르주아 정권의 보호를 받고 있는데,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축적된 자본을 생산에 재투자하기를 꺼려했고, 이는 인도 전체의 산업발전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동했다.

이와 같은 산업발전의 정체는, 토지개혁 정책으로 농지에서 쫓겨난 농민들을 충분히 흡수할 수 없게 하여, 가난과 불평등이 점점 더 심화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65년과 1966년에 연속적으로 대홍수가 나서 농업 생산물의 생산이 줄어들어 식량가격이 상승했다. 더군다나 인도는 1962년 중국과의 전쟁, 그리고 1965년 파키스탄과 전쟁을 치르면서 엄청나게 돈을 찍어냈는데, 대홍수에 따른 농산물 가격 폭등까지 겹쳐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6).

식량가격의 폭등은 소달구지 자본가들과 중농들 그리고 소부르주아들에게는 천금 같은 기회였다. 대자본가들에 비해서 자본축적이 미미했던 이들은 이때 높은 가격으로 식량을 팔아 한 몫 챙겼고, 이런 경제적 기반으로 주 정부를 넘볼 수 있는 지방 토호세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들 지방 토호세력은 비슷한 카스트 집단을 부추겨 선거에 이용했는데, 이런 카스트 정치의 대두는 힌두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렇듯 1960년대 말에 인도의 경제적 불평등은 심각해졌고 농민들의 무장봉기가 일어났다7). 지배계급은 곧바로 국가 계엄령을 선포하여 겨우 진압했지만, 민족 부르주아 지배계급은 경제발전 노선을 두고 내분이 일어났다. 민족독립운동을 이끌던 민족주의 부르주아 진영은 더 이상 자본가 계급의 자본축적에 유리한 정책만 고집할 수 없는 인도의 현실을 깨닫고 정책 전환을 시도한다.

그러면서 ‘빈곤퇴치’ 구호를 내세우면 성남 민심을 달래려 했다. 인디라 간디 수상의 급진적인 정책 방향 수정에는 그런 현실적 요구가 반영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1969년 상업은행들을 국유화시켰고, 우리나라의 공정거래법과 비슷한 ‘독점과 제한적 무역 관례법(Monopolies and Restrictive Trade Practices Act)’을 만들어 자본가들의 독점권을 일부 제한했다. 1971년에는 제24차와 제25차 헌법개정을 통해 의회입법으로 자본가들의 사유재산권을 제한할 수 있게 하고, 국가가 사유재산의 보상과 지불방식을 결정할 수 있게 했다. 그러면서 1972년에는 민영보험회사와 석탄사업을 국유화했다8).

그러자 독점자본가 계급은 민족 부르주아들을 비판하면서 부농, 소달구지 자본가들, 타락한 소부르주아들과 연합하여 순혈 자본주의 정권을 세우는 데 앞장선다. 이들은 서로의 계급적 기반이 다르기 때문에 연합할 수 없었는데도 힌두 이데올로기가 이들을 연결하는 끈이 됐다. 비로소 무덤에 잠들어 있던 힌두 이데올로기가 현실정치에서 살아나는 결정적 순간이 찾아왔다.

극우 힌두 정치세력의 성장

국민자원봉사대(RSS)의 간디 암살 사건 이후 힌두 종교조직들은 현실정치와 거리를 두었고 그 영향력도 미미했다. 대부분 힌두 종교단체들은 단지 순수 종교봉사활동에 머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잔상(JS)은 매우 의식적인 정치활동을 했다. 왜냐하면 이들의 기본이념은 ‘힌두타바(Hindutva)’, 즉 힌두의 재부흥인데, 그럴려면 힌두‘국가(rashtra)’를 건설하기 위해 조직적인 활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잔상(JS)은 국민자원봉사대(RSS)와 세계힌두협회(Vinhwa Hindu Parishad; VHP)의 상부조직이기도 하다.

잔상이 정치적 존재감을 갖게 된 시기는 1975년경부터다. 이때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인도의 사회경제적 모순의 심화로 지배계급이 분열했고 권력쟁취를 위해 기존세력과 신흥지방토호세력 간의 경쟁이 치열했다. 잔상은 그런 정치적 상황을 이용해 그들의 종교적 영향력과 조직력을 정치자원으로 삼아 존재감을 키웠다.

1974년부터 1975년 사이에 비하르 주 지역에서 하층 카스트 운동을 이끌던 쟈야뿌라카샤 나라안(Jayaprakash Narayan)은 공개적으로 국민자원봉사대(RSS)와 잔상(JS) 그리고 반이슬람 단체인 잠마아타이 이슬라미(Jamaat-i-Islami)를 끌어들여 반 회의당, 반 인디라 간디 운동을 벌였다. 이것은 JP운동이라고 한다9).

JP운동이 중농들과 소달구지 자본가, 중소기업인들 그리고 학생,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으며, 반정부 투쟁이 격화되자, 인디라 간디 수상은 JP운동의 주요 지도자들을 투옥시켰고 1975년 6월 26일 새벽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인디라 간디는 계엄통치 아래서 상업은행을 국유화시키고 자본가들의 사유재산권의 일부를 제한하려 했는데, 자본가들은 이런 권위적인 통치에 절차적 정당성 문제를 제기하며 인디라 간디를 공격했다. 인디라 간디는 1977년 1월 계엄령을 해제했고 곧바로 3월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했다.

1977년 1월 계엄령이 해제되자, 보수 야당들인 Congress(O), 잔상(JS), Bhar-atiyaLokDal(BLK), 사회당이 뭉쳐 자나따(Janata)당을 만들었다(각주4를 참고하라). 자나따당은 인디라 간디의 계엄통치를 비판하며 투쟁했다. 인디라 간디의 국유화 조치에 반대하던 중농, 자본가 계급의 지지를 받은 자나따당은 542석 가운데 330석을 얻어 자나따 정부를 세웠다. 비록 힌두조직인 잔상의 이름으로 정권을 잡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때 중앙정부에서 권력 지분을 갖게 됨으로써 인도 정치에서 분명한 입지점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극우 힌두세력은 그들의 본색을 감추고 있었다. 왜냐하면 인도 대중들은 자신을 도탄에 빠뜨린 집권지배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 극우 힌두세력을 지지했던 것이지, 온전히 힌두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나따 정권에 참여한 극우 힌두세력이 그들의 색깔을 드러내자 하층 카스트를 지지기반으로 하던 주류 세력 사이의 갈등으로 2년 만에 연정이 붕괴됐다.

[표2]는 하원총선거에서 인도국민당의 전체 지지율 변화표다. 전국적인 지지율 변화를 보면 1989년 이전까지는 인도 정치에서 의미 있는 정당 지지율 변화는 없었다. 실제 하원 의석수를 살펴보면, 1962년 총선에서 잔상(JS)은 14석에서, 1967년에는 35석으로 늘어났다가 1971년 선거에서는 22석으로 줄어들었다. 1977년 총선거는 잔상(JS)이 자나따당에 통합됨으로써 구체적인 의석수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자나따당에서 독립한 인도국민당(BJP)은 1984년 처음 치른 총선에서 2석으로 크게 줄었다. 힌두정당임을 공개적으로 표명한 최초 총선거에서 2석을 얻었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굉장한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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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84년에 인디라 간디가 시크교와의 갈등으로 암살당한 사건은 세속주의에 대한 대중들의 요구를 강화했다10). 힌두 이데올로기를 공개적으로 내걸고 참가한 1984년 선거에서 인도국민당(BJP)이 신통치 못한 결과를 얻자, 선명한 힌두 이데올로기를 접고 세속주의 야당들과 연대를 시작했다. 그 결과 1989년 총선거에서 인도국민당(BJP)은 86석이라는 의미심장한 의석을 차지했다.

1989년 총선은 라지브 간디 수상의 무기구입 비리 스캔들 사건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치러졌다. 야당은 반 라지브 간디 전선을 구축해 ‘국민전선(The Nat-ional Front)’을 결성했다. 총선 결과 국민회의당 197석, 국민전선 146석, 인도국민당(BJP) 86석, 공산당 52석이었다. 총선거 결과 어느 정당도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그런데 라지브 간디가 사실상 선거 패배를 인정하고 정부구성을 포기하자, 얕은꾀를 부린 인도국민당(BJP)이 내각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국민전선 정부를 지지하여 정치적 몸값을 키웠다.

그러나 국민전선 정부는 만달커미션(Mandal Commission)을 놓고 내홍에 빠졌다. 원래 만달커미션은 자나따 정부(1977~79년) 때 제출된 보고서였다. 인도는 헌법으로 지정 카스트와 지정 부족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공무원 임용할당제를 실행하고 있다. 이와 같은 차별적 보상 정책을 확대 시행하겠다는 것이 만달 보고서의 핵심내용이다. 이 안에 따르면, 지정 카스트와 지정 부족민들에게 이미 22.5%의 직업을 할당하고 있는데, ‘여타후진계급(other backward castes)’들에게 추가로 27%의 직업을 할당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체 공무원 임용의 49.5%가 할당제로 채워지는 것이다. 이것은 명부상 상층 카스트에 있으면서 경제적으로 소외된 대학생들을 차별하는 것이라며 상층 카스트들의 엄청난 반발을 일으켰다11).

이런 상층 카스트들의 반발을 의식한 인도국민당(BJP)이 1990년 9월 25일부터 힌두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우고 독자적인 행보를 했다. 인도국민당의 지도자였던 아드바니(L.K.Advani)는 구라자트 주의 솜나트(Somnath) 사원에서 출발해 아요디아(Ayodhaya) 사원까지 10,000km에 이르는 마차행진(Ratha Yatra)을 조직했다. 그는 자동차를 고대신화에 나오는 마차처럼 꾸며 ‘람을 숭배(Ram Bhakti)’하고 ‘대중의 힘(Lok Shakti)’을 보여주자고 선동했다. 인도국민당 역시 ‘우리는 오직 그곳에 사원을 지을 것이다(mandir wohin banayenge)라는 슬로건을 공식채택했다12).

인도국민당과 세계힌두협회(VHP)는 그들의 세력을 과시하려고 1990년 10월 말에 수천 명의 국민자원봉사자들(RSS)을 아요디야에 군집시켜 이슬람사원을 훼손하려 했고 이를 막으려는 경찰과 충돌했다. 그때 수백 명이 다치고 일부 사망하는 사고까지 일어났다.

이 일로 인도국민당이 ‘국민전선’ 연합정부 지지를 철회했고 연합정부는 붕괴됐다. 이로 인해 다시 총선거가 치러졌다.

이슬람 사원을 때려 부수고 정권을 잡다

총선거는 1991년 5월 19일부터 시작됐다. 그런데 선거유세 도중에 라지브 간디가 ‘타밀호랑이(LTTE)’라는 스리랑카 반군의 폭탄테러로 숨졌다. 라지브 간디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애도 분위기 덕분에 회의당은 232석을 얻어 가까스로 정권을 잡았지만, 인도국민당(BJP) 역시 [표2]에서 보듯이 지지율이 크게 상승하여 20%에 가까운 지지를 얻었다. 의석수도 86석에서 119석으로 늘어났다. 더군다나 웃따르 프라데시주, 바다야 뿌라데시 주, 라자스탄 주, 히마찰 푸라데시 주에서 정권을 잡아 인도국민당은 강력한 야당으로 급성장했다. 특히 아요디아 사원이 있는 웃따르 푸라데시 주를 인도국민당(BJP)이 접수함으로써 힌두 민족주의자들은 고무됐다.

비록 중앙정부까지 인수하지는 못했지만, 자신감을 얻게 된 인도국민당(BJP)은 아주 대담한 사건을 벌인다. 1992년 12월 6일, 인도국민당(BJP)과 세계힌두협회(VHP) 지도부들이 200,000명 힌두자원봉사대를 모아놓고 아요디아에 있던 바브리 마사지드(Babri Masjid) 이슬람 사원을 망치로 때려 부쉈다13).

이 일은 독립 이후 인도 최대 종교 폭력사건이었으며 인도 세속주의가 깡그리 짓밟힌 날이었다. 뭄바이, 꼴까타, 보팔 등 대도시에서는 폭동이 한 달 가까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3,000명이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국민당(BJP)은 1996년 하원 총선거에서 무려 161석을 차지했다. 반면에 국민회의당은 140석을 얻었다14).

이렇게 인도국민당은 1996년 선거에서 제1당이 되지만, 또다시 연립정부구성에 실패해 국민회의당과 인도 공산당의 연립정부인 통합전선(United Front)에 정권을 뺏겼다. 그러나 통합국민전선정부도 노선갈등으로 해산되어 1998년 2월에 다시 하원 총선거를 치르게 된다. 총선 결과 인도국민당은 182석으로 의석수는 늘었지만 과반을 넘지 못해서 안정적인 정부구성에는 실패했다. 1999년 10월에 다시 하원 총선거가 실시된다. 선거 결과 아주 작은 차이로 인도국민당(BJP)을 중심으로 한 연합세력이 296석을 차지해 가까스로 정권을 잡았다.15)

이처럼 인도국민당(BJP)은 단독정부를 구성할 만큼의 힘은 없었지만, 지방의 여러 토호세력들을 끌어들여 끊임없이 세력을 확장하여, 드디어 1999년에 인도국민당(BJP)이 주도하는 ‘민족민주동맹(National Democratice Alliacnel,  NDA)’정권을 만들었다. 민족민주동맹 정권을 세우기 위해 인도국민당(BJP)은 다음과 같이 위장전술로 대중을 속였다. 제일 먼저 1992년 아요디야 사원 폭동 이후, 상층 카스트 중심의 힌두 우월주의에 대한 경계심이 커지면서, 하층 카스트들인 여타 후진 계급(OBC)이 반 인도국민당(BJP)으로 돌아섰다. 인도국민당(BJP)은 그런 반발감을 무마하려고 힌두 이데올로기를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로 화장한다. 1996년 총선거 유세에서는 아요디아 사건을 사과했다. 한편으로는 라오(Rao) 정권의 경제자유화 정책을 반대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국내 중상공인들을 보호하고 수입규제를 강화하겠다고 하여, 중상층과 소부르주아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자 했다. 그런데도 1996년 하원 총선에서 만족할 만큼의 의석수 확보에 실패하자, 인도국민당(BJP)은 더욱 자세를 낮추고 그들의 본색을 감추고 전향적인 중도노선을 표방한다. 인도국민당(BJP)은 1998년 제12대 총선거를 앞두고 ‘상식에 맞는 정책’을 펼치겠다며 14개 지방군소 정당과 협약을 맺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정당이 타밀나두의 AIADMK였다. 정책노선도 바꾸어 인도국민당(BJP)이 끊임없이 추구했던 핵심정책을 철회하겠다고 대중을 꼬드겼다. 즉, 그동안 시도했던 ‘단일시민법(uniform civil c-ode) 도입’, ‘카시미르법 370조 철폐’, ‘아요디아 람 사원 건설’, ‘소수위원회(mi-norities commission)철폐’ 등의 정책들을 모두 취소하겠다고 선거유세장에서 떠들었다. 그러면서 지방세력과 화합을 위한다는 구실로 1996년 제11대 총선거에서는 471명 하원의원 후보자를 내보냈는데, 388명으로 줄였다. 이와 같은 이들의 위장 선거 전술은 성공해 1998년 총선에서 인도국민당(BJP)은 182석의 의석과 25.6% 지지율을 얻었다. 그러나 연합정부의 파트너인 AIADMK의 지지철회로 인도국민당(BJP)의 민족민주정권은 1년 만에 무너졌다. 하지만 1998년 핵실험과 핵무기 보유국 선언, 그리고 1999년 ‘카길(Kargil)’ 국지전에서 파키스탄에 강경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1999년 제13대 총선거에서 인도국민당(BJP) 중심의 연합정권을 만들었다. 그러나 인도국민당(BJP)은 권력을 잡자마자 30,000개 지부로 조직된 국민자원봉사대(RSS) 조직을 활용해, 힌두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세력을 제거·진압했다. 표면적으로는 ‘Sangh Parivar’라는 140여 개 조직이 모여 만든 전선 형태의 조직이 그 일을 주도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국가자원봉사대(RSS)가 ‘힌두따비(Hindutva)’ 운동을 주도했다. 국가자원봉사대(RSS)는 준 군사조직처럼 활동했기 때문에 경찰들조차 이들의 눈치를 봐야했다. 또한 인도국민당(BJP)은 국민자원봉사대(RSS)와 세계힌두협회(VHP), 힌두원숭이신당(Bajrang Dal) 같은 극우 힌두 민족주의 전위단체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역사교과서 개정과 교육에 직접 개입하여 극우 힌두 이데올로기를 확대재생산하고자 했다.

인도는 국가교육연구훈련위원회(The National Council fo Education, Researc-h and Trainingl NCERT)에서 초·중·고 교과서 내용을 심의·결정하는데, 뮤디 모노하르 죠시(Murli Manohar Joshi) 교육부장관의 압력으로 2000년도에 초·중·고 교과 과정 내용이 개편되면서 힌두 민족주의 이념이 강화됐다.

교과서 논쟁은 2001년도에 인도 전체 역사 논쟁으로 커졌다. 그런데 극우 힌두세력이 교과서 개정에 반대하는 세력을 좌파로 몰아가면서 이념논쟁으로까지 치달았다. 힌두 극우세력은 좌파들의 학문적 테러를 끝장내야 한다면서 교과서 개정을 옹호했다. 간디를 살해한 국민자원봉사대(RSS)를 미화하고 정당화시키려는 극우 힌두 민족주의의 공작은 집요했다.

역사교과서 논쟁으로 촉발된 극우 힌두민족주의 세력의 공격성은 2002년 구자라트 대학살로 현실화됐다. 2002년 2월에 일어난 힌두 극우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잔인한 학살로 무고한 무슬림 2,000명이 살해됐다16). 구자라트 대학살은 1992년 아요리야 사원 파괴와 학살 사건 이후 인도국민당(BJP)의 폭력성과 잔인함이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학살 사건으로 2004년 하원 총선거에서 인도국민당(BJP)은 패배했다.

결론: 10년 만에 극우 힌두 정권 등장과 파시즘

앞에서 살펴봤듯이 극우 힌두세력은 힌두 우월주의를 공공연하게 내세우면서 끊임없는 폭력과 공포정치로 정치권력을 확장시켜나갔다. 인도국민당(BJP)은 그들의 하부폭력조직인 국민자원봉사대(RSS)를 활용해 살인과 폭력을 일삼고 있는 점에서 독일의 파시즘과 비슷하다.

올해 치러진 하원 총선거에서 인도국민당(BJP)은 전체 545석 가운데 280석이라는 인도국민당(BJP) 역대 최다 의석수를 확보하여, 인도국민당(BJP) 단독정권을 만들었다.

인도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세속주의를 포기하고, 힌두 이데올로기 단독정권이 들어섬으로써 앞으로 인도 정치, 경제, 사회는 많은 파란과 변화가 예산된다. 표면적으로는 힌두-무슬림 갈등이 증가하겠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고, 그 이면에서는 사회-경제 영역에서 자본주의 모순이 심화되고 증폭될 것이다.

극우 힌두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승자독식’이다. 극우 힌두 이데올로기 신봉자들은 소수는 다수의 지배에 따라야 하며 인도는 힌두가 다수며 주인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종교도 힌두로 통일해야 하며 언어도 ‘힌디’ 단일어만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층 카스트들에게도 힌두의 가치체계에 순응하도록 강요한다. 이와 같은 힌두 이데올로기는 자본가 계급의 경제이념과 완벽하게 조응하면서 힘 있게 되살아나고 있다. 경쟁에서 도태되면 배제되고, 자본가들이 독식하는 시장경제이론과 완벽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번 총선거에서 정권을 손에 쥔 모디는 인도 경제를 외국 자본에 개방하고, 친자본가 정권을 지향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자본가들과 그들의 선전매체인 언론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압도적인 의석수로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한편 극우 힌두정권의 대약진을 막지 못한 무기력한 좌파세력의 책임도 크다. 이번 총선에서 인도공산당(CPI)은 1석, 인도공산당-M(CPI-M)은 9석을 얻었다. 정당 지지율도 2009년 총선에서는 두 정당 모두 각각 0.8%와 3.2%로 떨어졌다. 좌파 진영의 몰락이라고 볼 수 있다17).

이번 인도 총선이 대중의 무지와 여론몰이에 따른 일시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인도 정치 지형의 구조적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지는 후속 연구를 통해서 좀 더 세밀히 분석해 봐야겠지만, 지배적인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 발전시킨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앞으로 발생할 힌두-이슬람 간의 대결은 단순히 종교적 갈등 차원이 아닐 것이다. 경제적 차별과 보상에서 소외된 세력과 그것을 독점하려는 사회-경제적 투쟁 양상으로 촉발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인도에는 영국 식민지 시절의 사회 불평등 구조를 청산하지 못해(토지개혁 실패, 빈곤문제 등) 심각한 사회모순이 내재되어 있는데, 극우 힌두 정권의 등장으로 ‘승자독식’으로 사회 전체가 재편된다면 이에 따른 심각한 충돌과 갈등이 더욱 격화되고 심각해질 것이다. 인도의 미래가 우울해 보인다. <노사과연>

2014년 6월 29일


1) P.S.Appu, “Tenacy Reform in India”, Economy and Political Weekilym Spec-tila Number, August, 1975. Bipan Chandra ≪India Since Independence≫ Penguin Books, 2008. p. 535.

2) 개인의 토지 보유 상한선이 지역마다 제각각이었다. 예를 들면 안드라프라데시 주는 27~312 에이커, 아쌈 주는 50 에이커, 께랄라 주는 15~37 에이커, 뻔잡 주는 30~60 에이커, 서벵갈 주는 25 에이커, 마하라스트라 주는 18~126 에이커였다. 이렇게 제각각인 토지소유 상한 기준 때문에 형평성 논란이 컸다.

3) 안드라프라데시는 1,400 에이커가 잉여농지라고 발표했으나 실제로 소작농에게 소유이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1970년대 말 인도 전체 토지 소유 상한제에 따른 잉여토지 면적은 240만 에이커로 파악되었는데 이는 인도 전체 경작 면적의 0.3%에 불과했다. 잉여 토지에 대한 조사가 부실했음을 알 수 있다. Bipan Chandra, ≪India Since Independecne≫, Penguin Books, 2008. p. 541.

4) 북인도 자트(Jat) 카스트인 차란 싱(Charan Singh)은 1964년 회의당을 탈당해 BKD(Bharatiya Kranti Dal)을 창당했다. 이 당은 중농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지역 정당이었는데, 1969년 웃따르프라데시 주 정부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켜 주에서 연정을 세웠다. BKD는 1974년에 보수 힌두정당인 Swatantra와 통합해 BLD(Bharatiya Lok Dal)을 만든다. 이들은 1977년 총선을 앞두고 극우 힌두 정치조직인 잔상(JS)과 인디라 간디의 회의당에서 이탈한 이들을 규합해 자나따(Janata)당을 만들어 정권을 잡는 데 성공했다. 독립 이후 회의당을 쓰러뜨린 최초 정권이었으나 내부 분열로 2년 만에 몰락했다.

5) 수입 대체 산업화 전략은 한 국가의 경제를 자급자족하며 발전시키는 것으로, 선진국으로부터 자국 산업의 보호와 발전을 위해, 수입을 규제하고 수입품을 국내산으로 대체하는 정책이다. 이와는 달리 자유무역을 선호하며 시장에 상품을 내다파는 것을 수출지향(export-led) 전략이라고 하는데, 박정희 정권의 ‘수출’ 정책이 대표적인 수출 지향 산업화 전략이다.

6) 1965년과 1966년 몬순기간의 홍수로 전체 농업생산물의 17%가 감소했고 식량작물은 20%나 생산량이 줄었다. 독립 이후 1962년까지 인도 물가 상승률은 2% 이내로 안정적이었으나, 1965년과 1968년 사이에는 12%로 껑충 올랐다. 1965년 이후로 식량 가격은 매년 20% 이상 폭등하여 인민의 삶은 매우 궁핍했다.

7) 이때 일어난 대표적인 농민 봉기가 ‘낙살바리(Naxalbari) 봉기’다. 서벵골 북쪽 다르질링(Darjeeling) 군의 낙살바리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봉기를 낙살바리 봉기라고 한다. 이곳은 대규모 차 생산지로 영국제국주의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도 소작농과 농업노동자의 착취가 심했다. 1967년 3월에 서벵골 최초로 좌파 연합전선(United Front) 정부가 들어서서 토지개혁을 추진했는데 지주들의 저항이 심했다. 마오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마줌다르(Charu Mazumdar)는 이런 인도의 현실을 보고 농민들이 직접 무장투쟁을 벌일 것을 주장하며 혁명에 나섰다. 낙살바리 무장봉기는 인근 인도 농촌지역에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안드라푸라데시 주 북쪽과 오리샤 주 경계 지역인 스리카쿨람(Srikakulam) 부족민들도 낙살라이트 투쟁의 영향을 받아 직접적인 무장혁명 운동을 전개했다. (이병진, “인도의 급진적인 농민운동에 관한 연구: 낙살라이트 운동을 중심으로”, 경희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98.)

8) 인디라 간디의 급진적인 경제정책은 미국과 세계은행 그리고 국제통화기금(IMF)와 충돌했다. 미국과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은 무역과 산업규제를 자유화시키고 인도의 통화가치를 내리라고 했다. 또한 농업의 자본주의화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미국은 인도의 최대 식량 원조국이었는데, 인도가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아닌 베트남을 지지하고 미국의 밀차관 협정(PL-480) 재개정 요구를 거부하자,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인도를 ‘짧은 개줄(on a short leash)’로 길들여야 한다며 모든 원조를 중단했다. 그런 압박에 인디라 간디는 1971년 8월 9일에 인도-쏘련 평화우호 친선조약을 체결하며 미국의 압박에 맞섰다.

9) 쟈야뿌라카샤 나라안은 ‘총체적 혁명(Toral Revolution)’ 운동을 이끌었다.

이 JP운동의 계급적 성격과 내용은 이병진의 “비하르(Bihar) 주(state), 소달구지 자본가의 몰락” ≪노동자정치신문≫, 100호 증보판(통합112호), 2013.11.를 참고하라.

10) 1984년 10월에 뻔잡의 시크교도들의 급진적인 분리독립운동을 무력진압한 인디라 간디 수상에 불만을 품은 시크교 출신 경호원에 의해 인디라 간디가 저격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11) 나는 1991년 인도 델리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했는데, 만달 커미션 문제로 학생들이 분신하고 동맹휴업하느라 휴강이 잦았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만달 커미션의 취지는 좋지만, 명목상 세습되는 상층 카스트 계급과 실제 그들의 경제 상황과는 달랐기 때문에 역차별 문제가 나타났다. 특히 후진 카스트 범주에 들어가기 위해서 카스트 집단 간 과열경쟁이 벌어지고 정치적 혼란을 부추기는 요인이었다.

12) 16세기 무굴제국은 아요디아에 이슬람 사원(Babri Masjid)을 세웠다. 19세기에 이르러 몇몇 힌두교들은 아요디아 사원은 힌두신인 람(Ram)이 태어난 성지며, 그곳에 람사원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1949년 아요디아 지방 군수가 아요디아 이슬람사원에 씨다(Sita)와 람(Ram) 조각상 건립을 허용하면서 힌두-무슬림 갈등의 씨앗이 됐다. 그렇게 아요디아 이슬람 사원 안에는 힌두와 무슬림이 공존했는데 1983년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세계힌두협회(Vishwa Hindu Parishad; 이하 VHP)가 공개적으로 이슬람사원을 때려 부수고 람사원을 세워야 한다고 선동했다. 1986년 아요디아 군 지방 판사가 아요디아 사원을 힌두교들에게도 개방해야 하며 힌두교들에게 그 소유권과 기도를 할 수 있다고 판결을 하자 힌두-무슬림 사이에 폭동이 일어나 65명이 사망했다. 무슬림들은 400년 이상 존재하던 이슬람사원을 때려 부수고 그곳에 힌두교 사원을 짓겠다는 힌두교들의 시도에 반발했지만 세계힌두협회(VHP)는 1989년 하원 총선거에서 ‘람 사원건립’을 내걸고 인도국민당(BJP)과 함께 선거운동을 했다. 그런데 선거 결과 [표2]에서 보듯이 선거참여자 가운데 11.4% 지지를 얻었고 86석을 차지하게 되면서 아요디아 사원 문제와 힌두 이데올로기가 중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13) 나는 인도에서 그 소식을 접하고 충격과 혼란에 빠졌다. 인도의 이중성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나는 제3세계 대국이라는 인도가 무너지는 모습에 크게 실망했다. 그 무렵 나는 국제 책 박람회장에서 북 측 인사들을 만났다. 북의 사회주의 정권은 인도와 다르다는 말에 호기심과 탐구심이 생겼고, 1993년 방북해 이듬해인 1994년 다시 평양에 가서 북·미 제네바합의를 목격했다.

14) 1996년 선거에서 인도국민당이 국민회의당을 앞섰던 이유는 1991년부터 시작된 경제자유화 정책에 대한 대중의 반발과 저항도 작용하였다. 국내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데, 앞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 가운데 하나다.

15) 인도국민당(BJP)은 1998년과 1999년 선거에서 똑같이 182석을 얻었지만 국민회의당이 140석에서 134석으로 아주 근소한 차이로 의석수가 줄어 인도국민당(BJP)이 연정구성에 성공할 수 있었다.

16) 이병진, “인도 독점자본주의 발전과 극우 힌두민족주의(Hindutva)-2002년 구자라트(Gujarat)대학살의 진실”, ≪노동자정치신문≫, 2012.5.

17) Editorials, “Fall of the Left; What explains the fall of the parliamentary l-eft and what sort of politics can revive it?”, Economy and Political Weekily, Ju-ne 7, 2014.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Jul 30th, 2014 | By | Category: 정세, 정세와노동 | 조회수: 1,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