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창조경제’? 대중기만과 탐욕ㆍ미신으로 점철된 저승길, 그 재촉

<4월혁명회 2014년 2월 월례토론회 발표문 (2014. 02. 27)>

‘창조경제’?

― 대중기만과 탐욕ㆍ미신으로 점철된 저승길, 그 재촉

 

 

채만수|노동사회과학연구소 소장

 

 

 

대중기만

 

지금 ‘새누리당’ ― 다 아시는 것처럼, 얼마 전까지 ‘한나라당’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신한국당’이었던가요, 민자당이었던가요? 그리고 또 그 이전에는, 그 이전에는, 또 그 이전에는 뭐였지요? 하도 자주 이름을 바꿔치우니까 헷갈리고 기억도 잘 안 나시지요?

‘민주당’도 물론 마찬가지이고요!

그리하여, 정치에 특별히 깊은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이 사회를 살아가는 성인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이런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 ‘한국의 정당들은 왜 저렇게 이름을 자주 바꾸나? 그것도 대개는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총선거 등 커다란 선거를 앞두고 …?’

그렇습니다. 저들은 커다란 선거를 앞두고는 으레이다시피 이합집산하고, 그것이 사설(辭說)이든 사설(邪說)이든, 이런저런 사설(辭說ㆍ邪說)을 늘어놓으면서 그렇게 당명(黨名)을 바꿔왔습니다. 그런데 문제인즉, 그렇게 당명을 바꿨다고 해서 저들 집단의 실체나 성격이 눈곱만큼이라도 바뀌었습니까? 전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저들은 도대체 왜, 무엇을 노리고 그렇게 당명을 바꿔대는 것일까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얘기를 듣자보면, ‘소비가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니 따위의 도무지 알지 못할 형용모순의 얘기들을 태연히 해댑니다만, 저들이 자주 당명을 바꾸는 것이 설마 간판 교체라든가, 로고 교체라든가 하는, 당명 교체에 따른 비용의 지출, 그러니까 ‘소비의 증대를 통해서 국민총생산을 증대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저 심심해서 바꾸거나, 역술(易術) 작명가의 꼬임에 넘어가 바꾸는 것은 더더구나 아닐 것이고요.

그렇다면 도대체 왜, 무엇을 노리고?

저로서는 하나의 답밖에는 추리할 수 없습니다. ― 다름 아니라, 대중을 기만하고, 사기 치기 위해서! ‘우리가 그 동안 많이 잘못했지만, 이제는 단단히 개과천선하여 국민 여러분을 위하여 분골쇄신 일하기로 작심하였고, 그러한 결의를 당명 개정으로 만천하에 공표하는 바이니, 우리를 믿고 표를 찍어 달라!’ ― 정치적 후진 대중을 그렇게 기만하고, 그렇게 사기 치기 위해서! 그래서 저들이 당명을 바꿀 때마다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소리를 사설(邪說)이라고 한 것입니다. (저들의 ‘국민 여러분’이란 게 도대체 누구인지도 중요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서 보기로 합시다.)

아무튼, 그런 이유, 그런 음흉한, 사악한 목적 외에, 저들이 그토록 자주 당명을 바꿔대는 다른 까닭, 다른 목적을 찾을 수 있습니까?

 

박근혜 정권 들어, 아니, 보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지난 대선 때부터 ‘창조경제’, ‘창조경제’ 떠들어대지만 도대체 그 내용ㆍ실체가 무언지 도무지 감도 잡히지 않는데, 그래서 불초 소생을 불러서 얘기 한번 들어보자고 이 자리를 기획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 그렇다면, 많이 오산(誤算)하신 것입니다. ‘창조경제’가 무엇인지를 듣고 싶으셨다면, 박근혜를 부르든지, 하다못해 박근혜 정권의 경제부총리 현오석이나 ‘민관합동 창조경제추진단’의 대표님들이라도 부르셨어야지요.

그러나 아무튼 이렇게 불려나왔으니, 무슨 말씀이든 말씀은 드려야겠지요?!

예, ‘창조경제’란 무엇인가에 대한 저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 그것은, 저들의 잦은 당명변경이 순전히 대중기만을 위한 것이듯이, ‘창조경제’ 역시 바로 그런 대중기만을 위한 레토릭(rhetoric)일 뿐이다! 아니! 대중기만과 미신ㆍ무지로 점철된 저승길이요, 묘혈을 향한 서두름이다!

 

사실, ‘창조경제’란 게 무언지 도무지 감도 안 잡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누군가, ‘창조경제’란 게 그 생경한 이름에 걸맞은 무언가 색다른 내용과 실체가 있는 듯이 떠벌린다면, 그는 사실 저들에 편승하여, 정치적인 것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무언가 사악한 이득을 취하려는 사기꾼이거나, 망둥이가 뛰니까 짱뚱이도 뛴다고, 뭐가 뭔지 모르고 함께 떠들어대는 어릿광대일 뿐입니다. ‘창조경제’란, 지금까지 저들 독점부르주아지의 신자유주의 정권들이 추진해왔던 정책들과 다른 어떤 내용도, 실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실상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을 무언가 크게 다르기라도 한 것처럼 요란하게 떠들어대고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또 실제로도 박근혜 정권은 자신들이 지난 대선에서 떠들어댔던 공약(公約)이란 것들이, 사실은 사실상 그 모두가 오로지 순진한 인민 대중의 표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 즉 대중기만ㆍ대중사기였음을 지난 1년 동안 행동을 통해 공공연히 인정해오지 않았습니까?! (여기에서도 물론 ‘국민 여러분’이 누구인지, 정신 차려 다시 보면, 그 공약들 가운데 일부는 ‘국민 여러분’에게 진지하기 그지없는 그야말로 공약(公約), 즉 공적인 약속이긴 합니다만!)

그런데, 저들이 지난 대선에서 떠들어댔던 공약(公約)이란 것들이, 사실은 사실상 그 모두가 공약(空約)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다른 공약(空約)들과는 달리 ‘창조경제’라는 공약(空約)은 한 가지 특별한 점이 있지요? 다른 공약(空約)들은 ‘나 몰라라’ 하고, 그것들이 거론되는 것 자체를 거북해하며 꺼리는 데에 반해서, 유독 ‘창조경제’만은 그것을 계속 떠벌여대고 있으니 말입니다. 국내에서 어용ㆍ파쇼언론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화사하게 한복 차려 입으시고 해외 나들이를 하시면서도 떠벌여대고 있으니 말입니다. ‘민관합동 창조경제 추진단’이니,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이니 하며, 요란법석을 떨고 있으니 말입니다.

도대체 왜, 무엇을 노리고 그러하시는 걸까요?

다 아시는 얘기지만, 해외에서 떠벌여대는 것은 국내에서 떠벌여대는 것, 즉 국내에서의 기만적 선전의 연장일 뿐입니다. 다 읽으셨겠지만, 달포 전에 박노자 교수께서 이렇게 썼더군요. ― “대한민국은 미국의 군사보호령”1)이라고! 그래서 드릴 수 있게 된 말씀입니다만, 그런 나라의 대통령, 그러니까 ‘미국의 군사보호령’에 불과한 나라의 대통령의 말씀이, 아무리 화사하게 한복을 차려입고 영어로ㆍ불어로 밤새 외워 떠들어대신다 한들, 국제무대에서 어떤 영양가를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무게를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누가 자기편이고, 누가 자기의 적인지를 분간 못하는 국내의 일부 순진한 인민대중에게나 무게를 가지고, 영양가를 발휘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창조경제’ 따위의 텅 빈 떠벌림2)이 이 사회에서 영양가를 발휘하는 것도, 저들이 그러한 떠벌림에 열심인 것도 연유가 없지 않습니다. 다름 아니라, 소위 박정희 신화, 즉 이 나라가 근대화된 건 박정희의 애국ㆍ애족하는 리더쉽 덕분이라는 신화 탓인 거지요.

그러나 전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신화는 어디까지나 신화, 그것도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대대적으로 날조ㆍ유포되고 있는 신화일 뿐입니다. 박정희 집권기에 한국 자본주의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급속한 발전은, 결코 박정희의 이른바 리더쉽 때문이 아니라, 농지개혁, 즉 분할지 농민의 대대적인 창출의 후과, 그것도 초고율의 인플레이션이 진행되는 가운데 분여 받은 토지 대금과 전쟁비용으로서의 토지수득세를 현물로서 부담해야 했고 저곡가 정책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 그렇게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분할지 농민의 대대적인 창출의 후과(後果), 그들 농민의 필연적인, 게다가 급속한 몰락이 그 주요 원인이자 조건이었다는 것, 게다가 저들은 그것조차 ‘자본주의 발전’으로가 아니라 몰계급적인 ‘근대화’라는 개념으로 신화화하여 선전하고 있다는 것은 알 만한 이는 다 알고 있는 대로입니다.

그런데도, 박근혜와 그 정권은 오늘날 ‘창조경제’, ‘창조경제’ 하고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비판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만, 바로 저 ‘근대화’ㆍ‘경제발전’이라는 음흉한 신화에 편승하고, 그 음흉한 신화를 더욱 강화하면서 모종의 사악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지요. ― 모종의 사악한 목적? 요즘 많은 사람들이 ‘제2의 유신체제’라고도 말하는, 보다 더 가혹하고 강고한 파쇼 지배체제 말입니다. 요즘 권력에 취해 있는 인간들이 하는 소리들마다, “묵과하지 않겠다!”, “응징할 것!”, “엄단할 것!” ― 살벌하기 그지없는 말씀들로 온통 그런 야욕을 노골화하고 있지 않습니까? 박정희가 10여 년에 걸쳐서 쌓았던 죽음의 성채를 3ㆍ4년 내에 서둘러 쌓겠다는 것이지요. 엊그제 발표한 소위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의 ‘3개년’도 그냥 ‘3’ 개년인 게 아닙니다. 바로 성채 구축의 일정표에 따른 것이지요! (덧붙여 얘기하자면, 지난 1월 6일에 박근혜 대통령께서 “통일은 대박” 어쩌구 몇 마디 해대신 후에 ≪조선일보≫ 등등 파쇼언론에서 부쩍 ‘통일’, ‘통일’ 하고 떠들어대지요? 그런데, 기억에 생생하지 않습니까? 1972년에 박정희가 계엄령을 선포하며 ‘유신체제’를 구축했을 때에도 ‘통일’, ‘통일’ 하고 떠들어댔지 않습니까? 느닷없이 사람들을 놀래키며 통일이 임박한 게 아닌가 하는, 혹은 적어도 남북이 서로 화해ㆍ협력하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환상을 품게 했던 이른바 ‘7ㆍ4 남북 공동성명’도 그렇거니와, 나중에 ‘유신헌법’이라는 말로 굳어진 그 ‘헌법’도 애초에는 ‘통일헌법’이라고 강변했었지요. ‘통일주체국민회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그들에 의한 체육관 선거! 모두 기억에 생생하시지요?!)

 

 

 

‘창조경제’라는 것 자체

 

다시 본론으로 되돌아 와서, ― 저는 앞에서, ‘창조경제’란 지금까지 저들 독점부르주아지의 신자유주의 정권들이 추진해왔던 정책들과 다른 어떤 내용도, 실체도 없는 것이며, 그런 대중기만을 위한 레토릭일 뿐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그렇다면 박근혜 정권은 ‘창조경제’라는 이름하에 구체적으로는 누구를 위한 어떤 경제정책들을 추진하려 하는 것일까요?

그저께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를 구체화하는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발표했습니다만, 귀 기울여 들을 만한 얘기는 사실상 한 마디도 없었지요? “IMF사태 때 대한민국이 뿌리 채 흔들리고, 국민들이 큰 고통을 겪는 것을 보면서 정치를 시작했”다느니, “제 2의 한강의 기적을 이뤄내서 우리 경제를 튼튼한 반석위에 올리고, 국민행복시대를 여는 것이 저의 사명이자 정치 신념”이라느니, “‘기초가 튼튼한 경제’, ‘역동적인 혁신경제’, ‘내수·수출 균형경제’ 등 3대 핵심전략을 제가 임기 내내 직접 챙기면서 강력하게 추진해서 성공적으로 이끌어갈 것”이라느니, “그래서 우리 경제의 지속가능한 성장 토대를 마련하고, 꺼져가는 성장엔진을 다시 한 번 힘차게 점화해서 모든 국민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겠”다느니 하는 따위의 정치적 허풍이 주조를 이루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일부 신문에 ‘만기친람’하신다는 말이 나돌더니, 그 말이 정말은 정말인 모양입니다. 온갖 세세한 문제들에 대해서까지 시시콜콜 주절거리신 걸 보면 말입니다. 뉴스 싸이트(http://www.viewsnnews.com/)에 달린 네티즌들의 촌철살인의 댓글 세 개를 소개하는 것으로 우선 처리해버리고 싶습니다.

 

하나. “공공기관 낙하산만 안 날려 보내도 공공기관 개혁은 절반이상 되는 거나 다름없어… 낙하산 날리는 주제에 무슨 개혁을 논하는가.”(ID: 적반하장)

둘. [필시, “이번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통해, 2017년에 3%대 초반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잠재성장률을 4%대로 끌어 올리고, 고용률 70%를 달성하고, 1인당 국민소득 3만불을 넘어 4만불 시대로 가는 초석을 다져 놓겠습니다” 운운하신 것에 대해서] “국민은 [이명박의: 인용자] 747점보도 타 보았기 때문에 447은 그까이꺼 우습다.”(ID: ing)

셋. “어처구니가 없구나”(ID: 어처구니)

 

아참, “내수활성화를 위한 핵심과제는 일자리 창출입니다. 특히, 선진국과 비교해 크게 취약한 청년과 여성의 고용률을 확실히 끌어 올려야 합니다. 먼저 청년의 취업 단계별 애로요인을 해소하여 청년 일자리 50만개를 창출할 것입니다.” 운운하고 계신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헛말씀인지는 저 뒤에서 저절로 보시게 될 것입니다.

사실, ‘창조경제’라는 화려한 간판을 건 경제정책의 속살이 무엇인가를 들여다보는 데에는 지난달에 이른바 ‘민관합동 창조경제추진단’의 출범을 계기로 쏟아진 이런저런 보도들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컨대, 1월 13일 “민관합동 창조경제추진단 출범식 갖고 본격 활동”이라는 제목의 기사3)를 보면, 이렇게 시작됩니다.

 

“정부와 기업이 손잡고 창조경제 관련 프로젝트를 발굴해 추진하는 민관합동 창조경제추진단이 13일 오전 광화문 KT빌딩에서 출범식을 갖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정부와 기업이 손잡고 …”! 그렇습니다. “민관합동”! 여기에서 ‘민’이란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기업! 바로 자본입니다! ‘창조경제’란 우선, 다름 아니라 바로 이렇게 국가재정으로 기업을, 자본을 지원하겠다는 것이고, 그것도 사실은 대자본을 지원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추진단 출범식에도 다음과 같은 쟁쟁한 인물들(물론 A°급 내지 A급의 인물들이고, 심지어는 B+급 정도의 인물들도 섞여 있긴 하지만)이 참석하고 있습니다.

 

“경제계에서는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한덕수 한국무역협회 회장,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 이희범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박병원 전국은행연합회 회장, 강호갑 한국중견기업연합회 회장, 남민우 벤처기업협회장, 이동근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등 경제단체장”4)

 

같은 기사에 의하면, ‘창조경제추진단’ 자체는 “중소ㆍ벤처기업과 중견기업, 대기업이 정부와 함께 창조경제 관련 프로젝트와 프로그램을 발굴ㆍ추진하는 민관 협력 실행조직으로, 민간부문에서 30여명, 정부에서 10명 등 40여명으로 구성됐다”4)고 합니다. 물론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노동자ㆍ근로인민의 대표는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주요 업무는 ▲ 신산업ㆍ성장동력 창출을 위한 민관 협력 프로젝트 발굴ㆍ기획 및 추진 ▲ 창업 활성화와 벤처ㆍ중소기업의 육성을 위한 추진과제 발굴ㆍ개선 ▲ 창조경제 문화의 확산과 관련된 프로그램 등의 기획ㆍ추진 ▲ 아이디어 사업화 관련 민간 프로그램의 연계 등 창조경제타운의 운영 활성화 지원 등”

 

이라고 보도되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기존의 정부정책과 대차가 없으면서도 눈에 띄는 것은 “창업 활성화와 벤처ㆍ중소기업의 육성을 위한 추진과제 발굴ㆍ개선”이라는 항목인데, 이 역시 ‘데자뷰’ 아닙니까? 바로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 김대중 정권하에서의 이른바 ‘벤처붐’ 말입니다. 그런데, ‘붐(boom)’, 즉 ‘급격한 증가ㆍ유행’이라고까지 불리며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른바 ‘벤처기업’ 창업에 나섰지만, 그 중에 오늘날 과연 몇 개의 기업이나 살아남아 있고, 몇 개의 기업이나 성공적으로 성장했습니까? 극심한 취업난을 반영하여 아직도 끊임없이 창업되고 있긴 하지만, 사실은 그 거의 대부분이 창업 수년 만에 망했고 망해가고 있지 않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그 중에서 ‘성공한’ 기업은 사실상 열 손가락으로 세기에도 부족한 실정 아닙니까?

 

한편, 예의 기사는 현오석 부총리의 말이라며, “올해 창조경제 관련 예산으로 6조5천500억 원을 편성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본 일반이 아니라 주로 ‘대기업 편중’을 문제 삼고 있는 기사들이지만, 보도에 의하면, 한 해에 “나랏돈 ‘연 125조원’ 대기업에 쏠”리고 있고, “중소기업을 포함한 전체 기업의 [세금: 인용자] 공제감면액”은 “9조4918억 원”(그 75%인 대기업은 “7조1063억 원”)이었으며,5) 2012년 한 해에만도 ‘삼성 1,684억4,200만 원, 현대차 883억 원, 한진 567억 원, 한화 465억 원 순’으로 정부가 “대기업에 7,308억 예산 지원”을 했다고 합니다.6) 그런데 “… ‘최근 5년간(2008-2012) 국가연구개발사업 기업 규모별 참여현황’을 분석한 자료를 보면, 대기업은 기업 지원금 가운데 43.4%를 차지했다”7)고 하니, 그리고 바로 그 43.4%가 7,308억 원이라고 하니, 이로 미루어 2012년 한 해에 정부가 기업에, 즉 자본에, 조세 감면 외에 직접 지원한 금액의 총액은 대략 1조6,800억 이상이 되는 셈입니다. 2012년에 노동자의 법정 최저임금이 1시간 당 무려(!) 4,580원이었으니, 몇 백억이니, 몇 천억이니, 몇 조니 하는 위 금액들이 얼마나 거대한 금액인지 상상해보십시오. 아마 상상도, 비교도 쉽지 않고, 도무지 현실감을 느낄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의 ‘창조경제’는 거기에 다시 6조5천500억 원을 더 보태주겠다는 것입니다. 6조5천500억 원을 더 보태주겠다 ― 참으로 갸륵하지 않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노동자들의 조그마한 임금인상에 대해서는 ‘노동귀족’이니, “신이 내린 직장”이니 하며 극단의 적의를 퍼부어대는 파쇼ㆍ극우 언론들이, 이러한 ‘창조경제’에 대해서는 상찬을 아끼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더 지원할 것을, 더욱더 많은 세금을 쏟아 부을 것을 사실상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국민과 비(非)국민

 

그런데 이 ‘창조경제추진단’의 업무와 관련해서는, 그 날 출범식장에서 했다는 저 쟁쟁한 인물들의 발언들, 그 중에서도 최문기 미래부 장관의 발언이 흥미롭고 ‘교훈적’입니다. 이렇게 보도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최문기 미래부 장관은 ‘올해는 창조경제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해가 돼야할 것’이라며 ‘추진단을 통해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발굴, 실행해 성공사례를 만들겠다’고 말했다.”3)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발굴, 실행해 성공사례를 만들겠다”? 앞에서 본 것처럼, “정부와 기업이 손잡고” 자본을 위해서 일하려는 것이 ‘창조경제추진단’의 업무인데, 그리고 그 ‘추진단’의 구성을 보면 눈을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는 게 노동자ㆍ근로인민인데, “국민이 체감” 운운하니, 어떤 국민이 체감한다는 말씀이겠습니까? 혹은, 보다 정확히 말하면, 누가 저들의 ‘국민’입니까?

우리 연구소에서 매달 발간하는 ≪정세와 노동≫ 금년 1월호에도 제가 썼던 얘기입니다만,8) ‘국민’이란 말은 사실은 이의적(二義的)입니다. 법률적 의미, 법률적 의제(擬制)로서는 그것은 어떤 나라, 국가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 하나하나 혹은 그 모두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정치적, 사회ㆍ경제적으로는 그것은 지배계급과 그 성원, 그리고 부차적으로는 그들에 종사(從仕)하는 군상들을 의미합니다. 이 정치적, 사회ㆍ경제적 의미의 국민, 그 중에서도 특히 지배계급과 그 성원이야말로 현실적인 국민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리고 ‘창조경제’는 바로 그들 국민의 경제입니다.

노동자들을 위시한 피착취ㆍ피지배 근로인민은 물론 비(非)국민입니다. 실제로 지배계급, 그 성원으로서의 저들 국민은 누군가에게서 자신들의 이해에 대립적인 주장, 자신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소리를 들으면, 으레 그 사람(들)을 향해서 “도대체 어느 나라 국민이냐”고 묻지 않습니까? 그렇게 결코 자신들의 국민이 아니라고, 비국민이라고 확인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들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ㆍ정치적 대표자들은 심심찮게 ‘국민대통합’ 운운한다든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9) 등등을 운운합니다. 이때 그들은 ‘국민’이란 말의 이의적 의미를 교활하게 활용하여 정치적, 사회ㆍ경제적 의미의 비국민을 농락하고, 그럼으로써 자신들 국민의 이익을 꾀하는 것입니다. 지난 총선과 대선에서 ‘국민대통합’ 선풍을 선도했던 박근혜 대통령 각하님의, 1월 6일의 ‘기자회견’ 극(劇)에서의 발언은 이와 관련하여 아주 시사적입니다. 그의 발언을 악의적으로 왜곡 보도할 이유도 동기도 전혀 없을 게 분명한 극우 ≪조선일보≫의 보도를 인용해보자면, 대통령 각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2014년 갑오년(甲午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 한해 여러분의 가정에 건강과 축복이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 새 정부가 출범한 후에 국민 여러분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기 위해 밤낮으로 고민하고, 최선을 다했던 한 해였습니다.

하지만 부족한 점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신뢰를 보내주신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10)

 

신뢰를 보내주신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국민 여러분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기 위해 밤낮으로 고민하고, 최선을 다했”으며, 그리하여 “국민 여러분”은 자신과 자신의 정권에 “신뢰를 보내주”었다는 뜻입니다. 착취ㆍ억압당하고 있는 수많은 노동자ㆍ근로인민과 ‘시민들’은 지난 1년 동안 그와 그 정권에 신뢰를 보내는 대신에 그와 그 정권을 불신ㆍ부정(否定)하며 투쟁해왔는데, 대통령 각하님께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저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과연 대통령 각하님과 그 정권은 누구를 위해서 일했으며, 누가 그들에게 신뢰를 보내주었습니까? ― 바로 국내외 독점자본과 그들의 수족, 즉 그들의 국민입니다! 저들 정치하는 분들께서 “국민을 위하여”, “국민을 위하여” 하고 떠들 때, 그것은 바로 이렇게 ‘자본을 위하여’, 그것도 특히 ‘국내외 독점자본과 그 수족을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저들의 이데올로기 지배, 대중조작 때문에 적지 않은 수의 순진한 노동자ㆍ인민 대중이 그것을 ‘노동자ㆍ인민 대중을 위하여’라는 식으로 듣고 있습니다.

그 날 ‘창조경제추진단’ 출범식에서 최문기 미래부 장관께서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구체적인 프로젝트” 운운하셨을 때, 그 국민도 물론 바로 그러한 국민입니다. 우리네 같은 비국민을 염두에 둔 게 결코 아닌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저는 최문기 장관의 발언이 흥미롭고 ‘교훈적’이라고 말씀드렸던 것이고, 저 앞에서 저들 정치하시는 양반들이 “국민 여러분” 운운하고 “국민대통합” 운운할 때, ‘국민 여러분’이란 게 도대체 누구를 의미하는지를 아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나는 길에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지난 대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박근혜나 그의 새누리당뿐 아니라 그에 대항한다는 야당, 야권의 후보들조차, 특히 명색이 노동자 (대통령) 후보라는 사람들조차 자신들이 더 ‘국민대통합’을 잘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떠들고 나선 데에 대해서,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행태를 비판한답시고 ‘소통’이 어떻고 ‘불통’이 어떻고 하는 데에 대해서, 저는 혹독하다 싶을 만큼 강하게 비판한 바 있습니다. 그러한 행태, ‘소통’이니 ‘불통’이니 하는 그러한 비판 아닌 ‘비판’은 어릿광대춤을 추는 것이자 노동자ㆍ근로인민 대중을, 그 정치의식ㆍ사회의식을 오도하고 마비시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11) 저들이 ‘국민대통합’ 운운하고 ‘국민과 소통’이니 ‘불통’이니 얘기할 때, ‘국민’은 분명 법률적으로 의제(擬制)된 그것을 의미할 터인데, 도대체 착취하는 자들과 착취당하는 자들 사이에, 억압하는 자들과 억압당하는 자들 사이에 어떻게 ‘대통합’이 가능하고, ‘소통’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그런데도 언필칭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사람들, 선진노동자라는 사람들, ‘노동자 대통령 후보’라는 사람들조차 ‘국민대통합’을 떠들고 ‘소통’ㆍ‘불통’을 떠들고 있으니,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으로 심각해도 너무나도 심각한 상황 아닙니까?12)

 

 

미신, 즉 무지

 

다시 우리의 주제로 돌아갑시다.

그것이 ‘창조경제’라고 불리든, 아니면 ‘경제혁신’, 또는 기타 다른 어떤 화려한 이름, 어떤 기만적ㆍ사기적 이름으로 불리든,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오늘날 독점부르주아 국가권력이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의 변주곡일 뿐인데, 그 밑바닥에는 아주 흥미로운 미신, 즉 무지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무신, 이 무지는 역사적으로 그야말로 아주 근본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미신, 즉 무지란, 다름 아니라, 경쟁력에 대한 신앙입니다. 경쟁력을 배양ㆍ강화함으로써 경제위기 곧 공황을 예방할 수 있고, 공황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그 경쟁력 강화, 즉 기술의 개발ㆍ혁신을 통해서 독점자본의 지배를 영구화할 수 있다는 사고, 그러한 이데올로기입니다.

이러한 미신ㆍ무지는 물론 부르주아지에게 있어서는 숙명적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개별자본이 경쟁력에서 뒤쳐진다는 것은 곧 파산ㆍ도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들 부르주아지는 바로 이 경쟁력 강화를 숙명적으로 추구함으로써 자신들의 묘혈을 파고, 새로운 세상을 위한, 보다 고도의 사회를 위한 물질적 조건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저들의 미신ㆍ무지는 역사적으로 아주 근본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거듭 말씀드리는 바이지만, 앞에서, ‘창조경제’ 역시 지금까지 저들 독점부르주아지의 신자유주의 정권들이 추진해왔던 정책들과 사실상 다를 바가 없다고, 그들 정책의 변주곡일 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들 경제정책을 이끌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경쟁력에 대한 신앙입니다. 비근하게 이른바 ‘창조경제추진단’이 그 주요 업무로 설정한 것들을 다시 한번 보면,

 

“주요 업무는 ▲ 신산업ㆍ성장동력 창출을 위한 민관 협력 프로젝트 발굴ㆍ기획 및 추진 ▲ 창업 활성화와 벤처ㆍ중소기업의 육성을 위한 추진과제 발굴ㆍ개선 ▲ 창조경제 문화의 확산과 관련된 프로그램 등의 기획ㆍ추진 ▲ 아이디어 사업화 관련 민간 프로그램의 연계 등 창조경제타운의 운영 활성화 지원 등”.

 

사실상 그 핵심은 노동생산력을 획기적으로 증대시켜서 경쟁력을 크게 강화하는 기술의 개발ㆍ혁신을 촉진하고 지원하겠다는 내용 아닙니까?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정부의 경제정책을 총괄ㆍ지휘하는 입장에 있는 현오석 경제부총리의, 그 ‘추진단’ 출범식에서의 발언도 이렇게 보도되고 있습니다.

 

“현오석 부총리는 출범식에서 ‘올해부터 창조경제가 실질적인 성과로 나타날 수 있도록 정책역량을 모으겠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창조경제 관련 예산으로 6조5천500억 원을 편성했다며 중소ㆍ벤처기업의 성장단계별 지원 내역과 규제를 점검해 창업 준비와 판로 개척을 돕겠다고 밝혔다. 연구개발(R&D), 창업, 연구성과의 사업화 지원 등을 확대하고, 일자리 창출 효과가 큰 기술혁신형 중소ㆍ중견기업의 R&D 투자도 늘리기로 했다.

현 부총리는 이러한 계획을 소개하면서 ‘잔잔하던 물이 100℃가 되면 끓듯이 질적인 변화가 시작되는 지점을 ‘티핑포인트’라고 한다. 정부가 멍석을 깔고 마중물을 부어줄 수는 있지만 창조경제로의 티핑포인트는 민관이 함께 만나야 가능하다’며 ‘민관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창의와 혁신의 교집합을 찾고 합집합을 넓히자’고 제안했다.”13)

 

‘티핑포인트(tipping point)’에 대한 현 부총리의 규정은 다소 자의적이지만, 아무튼 “민관이”, 즉 정부와 자본이 “머리를 맞대고” “잔잔하던 물이 100℃가 되면 끓듯” 하는 “창의와 혁신의 교집합을 찾고 합집합을 넓히자”, 기술의 개발ㆍ혁신과 그에 의한 경쟁력의 “질적인 변화”, 그러한 “티핑포인트”를 만들어내자는 게 그의 발언의 요지입니다. 이 모두 경쟁력에 대한 광신(狂信)의 발로 아닙니까?

그런데, 기술의 개발과 혁신, 그를 통한 노동생산력의 획기적ㆍ혁명적 증대, 따라서 그를 통한 경쟁력의 획기적ㆍ혁명적 강화는 과연, 저들이 광신하는 것처럼, 경제위기를 모면할 수 있게 하고, 경제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게 하며, 독점자본의 지배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우선, 자본과 그 이데올로그들, 즉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필시 “그렇다”고 굳게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지하는 바이지만, 모든 개별자본, 모든 자본주의적 기업은 경쟁이라는 강제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은 “경쟁은 각 자본가에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내재적 법칙들을 외적인 강제로서 강요”14)하기 때문입니다. 혹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경쟁력에서 뒤쳐지면, 파산ㆍ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필시 누구보다도 참으로 내로라하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작성했음이 분명한 미국의 한 ≪대통령 경제 보고서≫는 경쟁의 강제법칙에 지배되어 새로운 기술이 개발ㆍ혁신ㆍ확산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습니다. 즉,

 

“최근의 밀물과도 같은 기술 혁신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 기업들은, 그들로 하여금 비용을 줄이게 하고, 고객들에 의해 높이 평가되는 새로운 생산물들과 서비스들을 공급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기술을 요구하고 있다.”15)

 

“… 격렬한 경쟁과 반향효과(feedback)가 새로운 기술들을 발전시키고 채용하게끔 하고 있다. 하나의 기술이 개발되면 그것이 그것을 보완하는 기술들에 대한 수요를 자극하는데, 이 보완적 기술들이 이번에는 생산비용을 낮추어 애초의 기술에 대한 수요를 더욱 장려한다. …

새로운 기술에 대한 역동적 수요의 중심에 있는 것은 긍정적인 반향효과(positive feedback)이다. 기술의 개선들이 기술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키고, 이 수요의 증대가 개선을 더욱 촉진하는 것이다.”16)

 

자본의 “경쟁전은 상품의 저렴화를 통해서 수행”되고, “상품의 저렴은, 다른 사정이 불변이라면, 노동의 생산성에 의존”합니다.17) 그런데 기술은 당연히 저렇게 “생산비용”을, 즉 보다 높은 노동생산성을 좌우하는 핵심적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사정이 그러하니, 자본과 그 이데올로그로서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경쟁력에 대한, 노동생산력이 높은 신기술에 대한 신앙과 갈망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비정상이겠지요.

그런데 후진적인 노동자ㆍ인민 대중은 물론이요, 내로라하는 ‘진보적 (소부르주아) 지식인들’조차 대개는 그러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자본주의 사회, 자본주의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자본의 이데올로기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조ㆍ중ㆍ동ㆍ문ㆍ매 등등등으로 이어지는 극우적ㆍ파쇼적 언론이 지배하는 이 사회에서 ≪한겨레≫ 신문이야말로 진보적 일간지 중 가장 진보적 일간지임은 이 사회의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대표적으로 진보적인 일간지로서의 ≪한겨레≫조차 경쟁력에 대한 부르주아적 신앙은 사실상 전혀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부르주아적ㆍ소부르주아적 경제 이데올로기 일반을 사실상 전혀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1997년도 말에 외환위기가 폭발하자 당시 ≪한겨레≫ 경제부장이던 이봉수 씨(지금은 런던대학교 박사이자 세명대학교 저널리즘스쿨대학원 대학원장, ≪한겨레≫ 및 ≪경향신문≫ 시민편집인)가 경제부장의 자격으로 칼럼을 쓰는데, 그 제목이 “한국 꼴 난다”18)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는, 따라서 ≪한겨레≫는 경제위기의 원인이, 자본주의적 과잉생산에가 아니라, 마치 “국민들”의, 여기에서의 의미는 ‘노동자ㆍ인민 대중’의 “분수를 모르는 짓거리”로서의 소위 “과소비”에, 즉 ‘과잉소비’에 있다는 듯이 몰아칩니다. 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비판적인 분석입니까?!

경제 문제와 관련한 ‘진보’ ≪한겨레≫의 부르주아적ㆍ소부르주아적 ‘비판’의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볼까요?

엊그제에도 한 고정 칼럼리스트는 자못 성깔 있게 이렇게 빈정거리며 ‘비판’하고 나섭니다.

 

“내일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발표한다고 한다. 취임 1주년에 맞추어 대통령이 ‘직접’ 핵심 내용을 발표하고, 또 국민에게 전달하는 메시지의 호소력이 약해질까 봐 연단에 ‘서서’ 발표하고 그것을 방송으로 ‘생중계’한다니 박 대통령이 정말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중요하게 생각하기는 하는 모양이다. 정권의 명운을 건 것처럼. 연출 효과는 틀림없이 만점일 게다.

박 대통령은 발표 준비에도 열심이시란다. 주말 내내 ‘열공’을 하신다니 정말 애를 많이 쓰신다. 그런데 혹시 ‘경제혁신’의 내용보다 발표에 더 애를 쓰시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내용도 ‘애먼 데’ 애를 쓰시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된다. 박 대통령이 ‘경제혁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3개년 계획’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거기에 집착한다면 그건 큰 문제다. 일을 망칠 게 분명하다.”19)

 

얼마나 신랄합니까?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들이 가히 그 신랄함에 못잖은 걸작입니다. 들어본즉,

 

“필자가 점쟁이가 아니니 내일 발표될 3개년 계획에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지는 맞힐 수가 없고 단지 대통령의 그 동안의 언행이나 이 정부의 행태로 미루어 조금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무엇이 빠졌는지는 확실히 몇 개 맞힐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 그리고 관료개혁이다.”

 

신선하지요? ― “관료개혁”! 그리고 많이 들어보셨지요? ― “재벌개혁경제민주화”!

여기에서는 소위 ‘재벌개혁’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하겠습니다. ‘재벌개혁’! ― 정말 인기 최상의 메뉴 중의 하나 아닙니까? 그래서 어떤 분들은 점잖게 ‘재벌개혁’이라고 외치고, 어떤 분들은 더없이 선명하게 전투적ㆍ혁명적으로 외칩니다 ― ‘재벌해체!’라고. 좋습니다. 그런데, 묻건대, 점잖게 ‘재벌개혁’이라고 외치든, 전투적ㆍ혁명적으로 ‘재벌해체’라고 외치든, 저들은 무엇을 위해서 재벌을 ‘개혁’ 혹은 ‘해체’하자고 하는 것입니까? 재벌을 ‘개혁’ㆍ‘해체’하여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저의 과문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아는 한은 ‘효율적이고 경쟁력 있는 (대)기업 체제’를 만들자는 게 저들 ‘재벌개혁론자들’ㆍ‘재벌해체론자들’의 주장입니다. “효율적이고 경쟁력 있는 …”! ― 이야말로 경쟁력 신앙 아닙니까? 효율적이고 경쟁력 있는 (대)기업 체제! ― 이것은 결국 독점자본의 효율화론, 소위 ‘합리화’론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이 어찌 노동자ㆍ근로인민의 소망, 프로젝트가 되어야 합니까?

같은 필자의 점입가경의 주장을 더 들어봅시다.

 

“우리 경제가 혁신경제로 탈바꿈하려면 혁신을 가로막는 우리 경제의 고질병인 재벌체제와 관료조직을 먼저 개혁해야 한다. 그런데 박 대통령의 3개년 계획은 분명 경제혁신을 군사작전 하듯 계획경제 식으로 할 테고, 그러면 박근혜 정부는 필히 혁신작전 명령을 수행할 야전부대로 재벌대기업과 관료조직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박 대통령은 말만 했지 애초부터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에 관심이 없었다는 게 드러났고, 그리고 취임 초부터 보여준 관료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미루어 보건대 관료개혁은 꿈에서도 꾼 적이 없었겠지만, 만에 하나 설혹 그랬다 하더라도 이제는 박근혜식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때문에 절대 재벌개혁과 관료개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계획경제 식으로 혁신을 한다는 발상 자체가 시대에 안 맞는 반혁신적ㆍ몰창조적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혁신경제, 창조경제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단언컨대 재벌개혁과 관료개혁이 빠진 박근혜식 경제혁신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앞으로 몇 년이 우리 경제를 혁신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이 소중한 기회를 황당한 3개년 계획으로 허비하다니.”

 

그래서 이 신사께서는 헌신을 제안합니다. 이렇게

 

“앞으로 몇 번에 나누어 쓸 필자의 글이 관료개혁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모으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 독자 여러분과 함께 중지를 모아 좋은 ‘관료혁신 3개년 계획’을 만들어보자. 그리고 아낌없이 박 대통령에게 주어버리자. 허황된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대신 하도록.”

 

이렇게 신사는 라만차에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산초 판사(Sancho Panza)는 아무데나 있는 게 아니지만!

신사 알론소 키하노(Alonso Quijano)께서 공주 둘시네아(Dulcinea del Toboso)를 구출하기 위하여 어떤 무용(武勇), 어떤 초식을 펼치든 그 자체야 저로서는 알 바 아닙니다만, 다만 한 가지만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군요.

“박 대통령의 3개년 계획은 분명 경제혁신을 군사작전 하듯 계획경제 식으로 할 테고”라니?! 박근혜 대통령 각하님께서 “계획경제 식으로 혁신을 한다는 발상”이라니?! ― ‘계획경제’ 개념을 이렇게 악의적으로 난폭하게, 지멋대로, 그야말로 지멋대로 왜곡하고 매도해도 되는 것입니까? (하기야 라만차의 신사께서 못하실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만!)

 

군더더기 사설이 길어졌습니다만, 오늘 우리의 주제와 관련된 간단한 예 하나만 더 들겠습니다. 지난 2월 3일에도 ≪한겨레≫는, 최근 다시 악화 움직임을 보인 세계경제의 상황과 관련하여, “세계경제 생산성 둔화 심각…‘순환경제’가 필요하다”는 장문의 기사를 싣고 있는데, 거기에서도 역시 부르주아 ‘경제학’의, 사실은 그 경제비(非)과학의 생산성에 대한 신앙을 그대로 반영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신흥시장 불안이 끊이질 않고 있다. 지난해 여름 이미 연준의 출구전략 움직임으로 홍역을 치른 바 있는데, 최근에는 다시 내부의 정치 불안이나 취약한 경제 체질이 문제가 되면서 광범위한 투기 공략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 고도성장과 대규모 외자 유입 등을 기반으로 세계 경제의 새로운 성장 견인차로 군림하던 처지에서 이제는 일종의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한 셈이다. 그 근저에는 이른바 ‘따라잡기’에 의존해온 성장 모델의 한계가 자리잡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문제는 이러한 취약성이 신흥시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제학에서 장기 경제성장을 좌우하는 것은 생산성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세계적으로 생산성의 현저한 둔화가 확인된다. 미국의 대표적인 비영리 민간 경제조사기관인 ‘콘퍼런스보드’는 매년 세계 123개국을 대상으로 생산성 통계를 집계하는데, 2013년 세계 경제의 노동생산성(노동자 1인당 국내총생산) 증가율이 1.7%에 그치며 3년 연속 둔화한 것으로 추정했다. 추세적으로도 1997-2006년 2.1%, 2007-2012년 2.0%에 이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생산성 혁신을 선도하던 미국은 1997-2006년 2.1%에서 2013년에는 0.9%로 내려섰다. 이런 양상은 신흥 경제에서 더 심각한데, 중국만 해도 2007-2012년 9.6%의 경이로운 수준에서 2013년 7.1%로 떨어졌다. 선진 경제로 분류되는 한국 역시 1997-2006년 3.6%에서 2013년 1.7%로 둔화됐다.”20)

 

결국, “장기 경제성장을 좌우하는 것은 생산성”인데, 바로 그 노동생산성, 즉 “경제적 효율성”21)이 둔화되었고, 또 둔화되고 있는 데에 ‘신흥시장’은 물론 세계경제 일반의 “불안”, 그 “취약성”의 원인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과연 이 주장대로일까요?

아닙니다. 결단코 아닙니다. 부르주아적 관념의 표현인 이러한 주장은, 생산성과 경쟁력에 대한 미신이자, 자본주의적 경제위기 곧 공황과 노동생산성의 관계에 대한 철저한 무지의 고백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노동생산력과의 관계에서만 말하자면, 경제위기 곧 공황은, 낮은 생산성이나 그 둔화 때문이 아니라, 저들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고도의 생산성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황은, 다름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 체제 내에서 발전한 고도의 생산성과, 이제 뒤떨어져 시대착오적인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의 폭발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적 경제위기는 그 생산체제의 모순 때문에 필연적인 과잉생산 공황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의의

 

아무튼, 박근혜 대통령 각하님 등의 창조경제 혹은 경제혁신이든, ‘진보적’ 논객님들의 ‘관료혁신’22)이나 생산성 타령이든, 모두가 그 문제의식은 사실은 ‘국민경제의 경쟁력’, 즉 자본의 경쟁력의 고양이고, 그리하여 결국은 기술혁신, 기술개발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그리하여, 이미 한번 인용했지만, ≪연합뉴스≫의 예의 기사도 이렇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현오석 부총리는 [민관합동 창조경제추진단: 인용자] 출범식에서 ‘올해부터 창조경제가 실질적인 성과로 나타날 수 있도록 정책역량을 모으겠다’고 말했다.

… 연구개발(R&D), 창업, 연구성과의 사업화 지원 등을 확대하고, 일자리 창출 효과가 큰 기술혁신형 중소ㆍ중견기업의 R&D 투자도 늘리기로 했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 각하님께서는 그저께 ‘담화’에서 예컨대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 경제를 국민 개개인에 잠재된 상상력과 창의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창조경제로 전환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미래가 없고 경제도 살릴 수 없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창조경제를 통해 신기술, 신산업, 신시장을 개발하여 세계시장을 선도하고 개척하는데 역량을 집중해야 합니다.”

 

“기술은행을 설립하여 대기업 등이 보유한 非활용 기술을 창업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우수 창업자에 대한 연대보증도 폐지할 것입니다.

청년창업과 엔젤투자펀드를 7,600억 원까지 추가 확충하고, 글로벌 벤처투자회사와 공동으로 국내창업기업에 투자하는 2천억 원 규모의 한국형 요즈마 펀드도 조성할 것입니다.

이를 포함하여 창업 벤처생태계 조성을 위해, 향후 3년간 4조원 규모의 재정을 투입하겠습니다.

창조경제의 비타민이라고 할 수 있는 과학기술과 ICT, 문화 컨텐츠 등은 우리가 강점을 지닌 분야입니다.

이를 제조업 등 타 산업과 잘 접목한다면 제조업의 혁신은 물론 사물인터넷(IoE), 클라우드 컴퓨팅, 빅데이터 등 새로운 융합산업이 창출될 수 있습니다.”

 

결국, 기술 연구ㆍ개발 투자를 늘리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과연 R&D 투자는 부총리의 말대로 ‘일자리 창출효과’가 큰 것일까요? 그리하여 대통령 각하님의 말씀대로 “청년 일자리 50만개를 창출”하게 될 것이며, 한국 사회의 지배자들에게 ‘미래가 있고 경제도 살릴 수 있을 것’인가요?

비근하게, 최근 미국의 한 혁명적 노동자 연구가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억만장자들의 목소리 ≪브룸버그 비지니스 위크≫(Bloomberg’s Business Week)는 1월 27일자 판에 “공장 일자리들은 사라져 버렸다. 그것을 극복하라”라는 조잡한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는 1953년 이래 미국 제조업 생산고는 세배 이상으로 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53년: 역자) 당시에 일천 육백만 명의 제조업 노동자가 있었다. 2012년에는 일천 이백만 명뿐이다. 그래서 고용이 25% 감소하는 동안에 생산고는 300% 늘었다. 1980년과 2012년 사이만 보더라도, 제조업의 생산성, 즉 노동자 1인당 1시간 동안 산출고는 189% 증가했다.

자본가들에 의한 과학ㆍ기술 경쟁은 — 이것은 더 적은 노동자를 더욱 생산적으로 만들고, 생산을 증가시키도록 몰아가서 한 기업이 자신의 경쟁자보다 더욱 넓은 시장을 장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 영구적인 대규모 실업과 반실업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든 단계에 도달해 있다.”23)

 

사실 필자인 프레드 골드쉬타인(Fred Goldstein)은, “자본가들에 의한 과학ㆍ기술 경쟁”이 “영구적인 대규모 실업과 반실업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든 단계에 도달해 있다”는 점만을, 즉 1953년 당시에는 1,600만 명이었던 미국의 제조업 노동자가 “자본가들에 의한 과학ㆍ기술 경쟁”으로 2012년에는 1,200만 명으로 감소했다는 것만 강조하면서, “억만장자들의 목소리 ≪브룸버그 비지니스 위크≫(Bloomberg’s Business Week)”가 제시하고 있는 통계 그 자체의 과학성 여부는 비판하고 있지 않지만, 사실은 그 통계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그 사이에 미국의 제조업 노동자의 수가 그만큼, 그러니까 25% 감소했다는 통계야, 비록 엄밀하진 않을지 모르지만, 통계 작성의 원리상 대략 그러하리라고 믿을 수 있지만, 그 동안에 “생산고는 300% 늘었다”거나, “1980년과 2012년 사이만 보더라도, 제조업의 생산성, 즉 노동자 1인당 1시간 동안 산출고는 189% 증가했다”는 따위의 부르주아 통계는 전혀 과학적인 것이 아니고, 또 원리상 전혀 과학적일 수 없으며, 따라서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단지 표상할 수 있는 것일 뿐이지만, 그 동안의 실제의 생산고의 증대, 생산성의 증대는 저들의 통계수치보다 훨씬 더 훨씬 더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24)

그건 그렇고, 한국의 “억만장자들의 목소리” 역시 때마침 흥미 있는 소리를 내고 있군요. 그것도 1면 머리기사로. “1991년 우리나라 제조업의 일자리가 500만 개였는데 2012년에는 410만 개로 90만 개가 사라졌다”25)고 말입니다. 물론 대중조작의 명수들답게 그 일자리 수 감소가 은근히 마치 내수 부진 때문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내수 부진인 것도, 즉 노동자ㆍ근로인민 대중의 빈곤의 심화가 사실이긴 하지만, 구차하게 그 알량한 ‘통계’란 걸 들이댈 필요도 없이 그 일자리의 감소가 내수부진에 의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은 결국 구태여 ‘창조경제’니 ‘경제혁신’이니 하고 주마가편하고 나서지 않았어도 충분히 ‘창조’ㆍ‘혁신’되어온 ‘경제’, 즉 기술의 개발ㆍ혁신 덕분 아닙니까? ‘내수가 부진하다’ 하지만, 그간에, 그러니까 저들이 말하고 있는 1991년 이후 2012년 사이에 한국의 제조업 생산이 엄청나게, 엄청나게 증대했다는 것은 제정신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생산이, 생산성이 엄청나게, 엄청나게 증대했는데도 일자리는 그렇게 역시 엄청나게, 엄청나게 줄어들었으니 말입니다.

자, 그런데도 박근혜 정권은 ‘창조경제’니, 그것을 구체화하는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이니 하면서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하고 나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가편(加鞭)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이겠습니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내재적 법칙들”이 “각 자본가에게 외적인 강제로서 강요”되는 이 자본주의 체제에게 있어 과연 가히 가속도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과학ㆍ기술혁명으로 인해 누적되어 가고 있는 실업문제를 해결할 길이 있습니까? 결국, 탐욕에 눈이 멀고, 미신과 무지로 점철되어 제 죽는 길인지 모르고 제 저승길을 재촉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맑스의 얘기를 들어봅시다.

 

“경제학의 분별 있는 대표자들 모두는, 기계의 새로운 도입은, 그것이 맨 먼저 경쟁하는 재래(在來)의 수공업 및 매뉴팩춰의 노동자들에게 페스트처럼 작용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들 거의 모두가 공장노동자들의 노예상태를 탄식하고 있다. 그러면 그들이 내는 회심의 으뜸패(der große Trumpf)는 무엇인가? 기계장치는, 그 도입기(導入期) 및 발전기(發展期)의 참상 후에는, 노동노예를 결국 감소시키는 대신에, 마침내는 그것을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

하지만 이미 몇몇 실례에서, … 어떤 일정한 발전 정도에 이르면, 공장부문들의 비상한 증대와 함께 채용 노동자수가 상대적으로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도 감소할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26)

 

“어쨌든, 임금노동자들의 총수(總數)27)가 그 상대적 감소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증대한다고 하는 것은 단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필요일 뿐이다. 이 생산양식에 있어서는, 노동력을 더 이상 하루에 12 – 15시간 일 시킬 필요가 없어지자마자, 이미 노동력은 과잉이 된다. 만일 생산력의 발전이 노동자들의 절대적 총수를 감소시키게 되면, 즉, 전체 국민이 보다 적은 시간에 그 총생산을 수행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해지면, 그러한 생산력의 발전은 혁명을 야기할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인구의 다수를 용도폐기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weil sie die Mehrzahl der Bevölkerung außer Kurs setzen würde). 여기에서 다시 자본주의적 생산의 독특한 한계가 나타나고,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이, 결코 생산력의 발전 및 부의 생산을 위한 절대적인 형태가 아니라, 오히려 일정한 시점에서 이 발전과 충돌하게 된다는 것이 나타난다. 부분적으로는 이 충돌은, 때로는 이 부분의, 때로는 저 부분의 노동자 인구가 과잉으로 되는 데에서 기인하는 주기적 공황 속에 나타난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제한은 노동자들의 과잉시간이다.”28)

 

최근 수십 년간의 과학ㆍ기술혁명의 비약적 전개와 그 사회적 효과를 눈여겨보십시오. 그 혁명, 특히 신소재 개발 혁명과 소위 디지털화(digitalization) 혁명, 정보통신기술의 혁명에 기초한 생산의 자동화는 직접적 생산과정 그것의 자동화를 넘어 가히 재생산과정 전반의 자동화, 사실상의 무인생산화(無人生産化)로 치달으면서 취업노동자들의 총수를 절대적으로, 그것도 급속히 감소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그 혁명의 성과가 (독점)자본의 잉여가치의 생산, 이윤추구에 이용되면서 인구의 다수를 그렇게 용도폐기하고(außer Kurs setzen)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기에 ‘창조경제’니 뭐니 하면서 기름을 부으니, “탐욕ㆍ미신으로 점철된 저승길의 재촉”이라고 할 수밖에요!

물론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그 역사적 사명을 다하기 위한 것이지만 말입니다.29)

 

 

곁가지, 혹은 사족

 

기왕 기술개발ㆍ기술혁신, 과학ㆍ기술혁명의 얘기가 나왔으니, 조금 엉뚱하게 들릴 얘기로 제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최근 이 나라를 꽤나 떠들썩하게 했던 ‘금융기관에서의 개인정보 유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정보 유출 때문에 수백만의 사람들이 신용카드를 폐기 혹은 교체했고, 또 지금도 그러하고 있지요? 또 정부당국은 정부당국대로, 은행ㆍ카드회사 등 금융기관들은 금융기관들대로 이런저런 법석을 떨고 있지요?

그런다고 ‘개인정보들’이 유출되지 않고, 금융거래 등이 안전할까요? 박근혜 대통령 각하님께서 그저께 ‘대국민 담화’에서 말씀하셨던 것과 같은, “개인정보 유출로 국민들이 불안해하는 일이 없도록 ICT 발전 속도에 부합하는 근본적인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금융소비자 보호기능을 전담하는 금융소비자보호원 설립”이든, 그 이상의 무엇이든, 과연 가능할까요?

‘듣보잡’이란 말 들어보셨지요? ‘듣도 보도 못한 잡놈’의 줄임말(?)로 한때 오지랖 넓은, 그리하여, 본인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제가 보기엔, 극좌에서 극우까지를 시계추 오가듯 오가는 어떤 젊은 유명 논객이 어떤 젊은 유명 극우논객을 그렇게 규정했대서 시끄럽게 소송까지 벌어졌으니까요. 그런데 이번엔 ‘듣도 보도 못한 잡것’이라고나 해야 할까요? 아무튼 최근 언론에 회자되는 ‘듣보잡’에, 다들 아시겠지만, ‘비트코인’이란 게 있습니다. 그런데, “화폐란 모름지기 교환수단의 기능과 함께 가치저장의 기능을 갖추어야 하는데” 운운이라든가, “현대의 신용화폐제도에서는 통화증발을 억제하고 물가안정을 달성하겠다는 통화당국의 정책의지에 의해서 화폐의 가치가 보전된다” 운운, 혹은 “경기부양을 목표로 통화를 증발하여 인플레를 유발하고 화폐가치를 훼손하는 것”, “역사적으로 금본위제는 금의 수급이라는, 거시경제 상황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변수에 의해 통화 공급을 결정함으로써 인플레와 디플레가 주기적으로 반복”, “금본위제에 집착하느라고 대규모 은행 연쇄파산을 방치하여 대공황에 이르렀던 것”, “금본위제 철폐와 신용화폐제도의 수립”,30) 등등등, 화폐의 본질과 화폐제도ㆍ화폐유통에서의 국가의 역할 등을,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의 운동법칙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기는 애초부터 글렀다는 증거를 아주 짤막한 글 속에서도 참으로 많이도 보여주고 있는 한 선한 (소)부르주아 ‘경제학자’께서 바로 그 글의 서두에서 ‘비트코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흥미롭게 쓰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비트코인(bitcoin)의 거래가격이 120달러 수준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한창 각광받던 지난해 11월의 고점 대비 거의 십분의 일 토막이 나고 말았다. 투자자들에게는 낭패지만, 언젠가는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온라인 가상화폐인 비트코인은 중앙은행과 같은 발행기관을 두지 않고 누구나 복잡한 수학 암호를 푸는 소위 ‘채굴’ 과정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익명성과 거래의 편리성 때문에 상당한 인기를 모았다. 특히 전체 통화량이 한정되어 있고 채굴량이 늘어날수록 채굴의 난이도는 더욱 높아지도록 되어 있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상승하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 커다란 매력으로 작용하였다. 그런데 최근 각국 정부의 규제와 해킹으로 인한 도난 등 비트코인 결제 시스템의 기술적 결함 노출로 가치가 폭락한 것이다.”31)

 

‘비트코인’이란 것을 정말 ‘듣보잡’으로 느끼시는 분들도 이제 이 인용문을 통해서 그것이 대략 무엇인지를 알아채셨을 것이고, 그 소위 ‘거래가격’의 등락이 인구에 회자될 만큼 그것이 국제적인 투기의 대상으로 되어 있다는 것도, 즉 자본주의의 그야말로 말기증상을 보여주는 한 현상이라는 것도 물론 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해킹으로 인한 도난 등”이라는 부분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해킹으로 인한 도난 등 비트코인 결제 시스템의 기술적 결함 노출로 가치[가치?: 인용자]32)가 폭락한 것”이래요! 위 인용문으로만 미루어 봐도 필시 최상의 하드웨어적ㆍ쏘프트웨어적 기술로 보안ㆍ무장되어 있을 것임에 분명한 비트코인이 “해킹으로 인한 도난 등 비트코인 결제 시스템의 기술적 결함 노출로 가치[가치?: 인용자]가 폭락한 것”이래요!

디지털 기술, 정보통신기술이란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말기 자본주의를 가히 지배하고 있는 것이 금융자본이고, 그 금융기관들이 ICT로, 즉 정보통신기술로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탐욕으로 조직되어 있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한편에선 해킹을 통해서든, 관계자들 간의 은밀한 거래를 통해서든 금융거래 관련 개인정보가 끊임없이 유출되어 경제범죄에 이용되고, 다른 한편에선 “개인정보 유출로 국민들이 불안해하는 일이 없도록 ICT 발전 속도에 부합하는 근본적인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하겠다고 야단입니다.

고대 중국 어느 저자거리의 한 장사꾼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 “창 사세요, 창을 사! 이 창은 못 뚫는 방배가 없는 창입니다! 방패 사세요, 방패 사! 이 방패는 못 막는 창이 없는 방팹니다!”

예, 그렇습니다. 자본주의와 그 속에서 발전한 정보통신기술(ICT)은 바로 그 창과 방패입니다. 절대 양립할 수 없는 창과 방패 말입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 각하님께서는 그 창과 방패를 팔겠다고 저자거리에 외치고 있습니다.

 

마치 말의 분량으로 사람을 질리게 만들기라도 하려는 듯 그저께 ‘대국민 담화’에서 하두 여러 가지를 주절거리셨기 때문에 그 의의를 일일이 지적하자면 아직 멀고 멀었습니다만, 소위 ‘창조경제’의 주의(主義)는 대략 말씀드렸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만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노사과연>


1) 박노자, “아류 제국주의 국가, 대한민국”, ≪한겨레≫, 2014. 1. 23.; 이와 관련해서는, 같은 글 속의 다음과 같은 대목도 대충 보아 넘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 “1980년대 운동권 일각에서는 한국이 미국의 신식민지라고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신식민지’란 단지 강력한 종속관계를 의미한다면 이는 꼭 틀린 말도 아니지만, 여기에다 한 가지의 단서를 달아야 한다. 미국 중심의 세계에서 산업국가로 크고, ‘친미성’은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 돼버린 대한민국에서는, 미국은 굳이 일일이 ‘식민지적’ 통치를 할 필요조차 없다. 한국인들이 다 알아서 잘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국으로서는 새누리당과 민주당 사이의 경쟁에서 어느 한쪽에 베팅할 필요라도 있는가? 어느 쪽이 이기든 간에 미군과 미국 투자자를 자국민보다 먼저 배려할 것이 어차피 보장돼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2) 박근혜와 그 정권의 열렬한 지지자인 극우 ≪조선일보≫의 송희영 주필조차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 “지난 1년 창조경제가 뭐하자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많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경제 혁신 3년 계획’을 내놓겠다고 예고했고, 드디어 다음 주 그림을 공개할 모양이다. 그것이 단지 정치적 분위기 전환용이라면 아무도 호응하지 않을 것이다.” (송희영, “김영삼의 세계화. 박근혜의 경제 혁신”, ≪조선일보≫, 2014. 2. 22.)

3) ≪연합뉴스≫, 2014. 1. 13.

4) 같은 기사.

5) 류이근ㆍ이완ㆍ송경화 기자, “나랏돈 ‘연 125조원’ 대기업에 쏠린다”, ≪한겨레≫, 2014. 2. 3.

6) 이완ㆍ류이근 기자, “삼성, 정부에서 직접 받은 돈 1684억 1위”, ≪한겨레≫, 2014. 2. 4.

7) 이완 기자, “연구개발 1곳당 보조금, 대기업 43억ㆍ중소기업 3억”, ≪한겨레≫, 2014. 2. 4.

8) 채만수, “비국민의 ‘비정상의 정상화’ ― ‘소통·불통’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적 억압의 강화의 문제다!”, ≪정세와 노동≫ 제97호, 2014년 1월, pp. 11-16 참조.

9) 주지하는 바이지만, 애초 링컨(A. Lincoln)의 저 유명한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운운 자체가 위선적이고 기만적인 언사이지만, 한국에 와서는 그것이 더욱 위선적ㆍ기만적으로 왜곡되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of the nation, by the nation, for the nation)”으로 되었습니다. 물론 ‘인민’이란 어휘가 가진 일말의 계급ㆍ계층적 의미를 허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덧붙여 얘기하자면, 이 ‘인민’이란 단어는 한국에서 ‘계급’이라는 단어와 더불어 오랫동안 사실상의 정치적 금지어였고, 오늘날에도 부분적으로는 정치적 기피어입니다. 물론 그것이 현실적이든 가상적ㆍ상상적인 것이든, 정치적ㆍ‘이념적’ 억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나 가장 반북적이고, 가장 반(反)‘좌빨적’인 노래, ‘6.25의 노래’ 속에 “자~유~의 인민들 피를 흘린다. …”라고 쓰여 있는 것까지를 지울 재주, 그것을 “자~유~의 국민들 피를 흘린다. …”로 바꿀 재주까지는 저들에게 없습니다!

10) 박국희 기자, “朴대통령, 불통 논란에 ‘적당한 수용ㆍ타협은 소통 아니다’ 작심 반박”,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1/06/2014010601298.html.≫

11) 채만수, 앞의 글 및 “대통령 선거 후의 한국의 상황”, ≪정세와 노동≫ 제87호, 2013년 2월, pp. 112-122 참조.

12) ‘진보’ ≪한겨레≫는 그저께 25일에도 ‘박근혜 대통령 취임 1주년’을 맞아 여전히 “소통”이니 “불통”이니 하면서 “박 대통령, 집권 2년차엔 국민통합 이뤄주길” 하는 타령을 ‘사설(社說)’이랍시고 싣고 있군요. 그것도, 인간다운 인간들의 말이어야지 말이지, “박근혜 정부 출범에 기여한 이른바 ‘개국공신’ 30명”, “집권세력 내부의 평가” 운운하면서 말입니다. 더구나 한쪽에선 ‘퇴진’을 요구하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판에 말입니다!

13) ≪연합뉴스≫, 같은 기사.

14) ≪자본론≫ 제1권, MEW, Bd. 23, S. 618.

15) Economic Report of the President, January 2001, Washington, USA, p. 103.: 이 보고서가 작성ㆍ발표되던 시기는 “신경제(New Economy)” 운운하며 미국 경제가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듯이 한껏 볏과 꼬리를 곧추들고 의기양양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미국의 경제, 그 경기(景氣)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저들의 의기양양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 직후 바로 공황이 엄습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바로 발달한 자본주의입니다.

16) 같은 보고서, p. 104.

17) “경쟁전은 상품의 저렴화를 통해서 수행된다. 상품의 저렴은, 다른 사정이 불변이라면, 노동의 생산성에 의존하고, 또 노동의 생산성은 생산의 규모에 의존한다. 따라서 보다 큰 자본은 보다 적은 자본을 이긴다.” (≪자본론≫ 제1권, MEW, Bd. 23, S. 654.)

18) 이봉수, “한국 꼴 난다”, ≪한겨레≫, 1997. 11. 26.; 이에 대한 비판은, 채만수 저, ≪노동자 교양경제학≫(제6판, 2013년), pp. 407-09 참조.

19) 이동걸 동국대 경영대 초빙교수, “[이동걸 칼럼] ‘관료혁신 3개년 계획’부터 하라”, ≪한겨레≫ 2014. 2. 24.

20) 장보형(하나금융경영연구소 경제연구실장), “세계경제 생산성 둔화 심각…‘순환경제’가 필요하다”, ≪한겨레≫, 2014. 2. 3.

21) 같은 기사.

22) “우리 관료조직 … 그것이 어떤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지, 관료조직이 왜 우리 경제혁신과 사회발전의 장애요인이 되었는지 …” (이동걸 동국대 경영대 초빙교수, 같은 글).

23) 프레드 골드쉬타인(Fred Goldstein) 작, 권정기 역, “왜 GM은 일백 삼십만 달러의 투자당 오직 하나의 일자리만을 만들었나”, ≪정세와 노동≫ 제98호, 2014년 2월, p. 131. (원문은, http://www.workers.org/articles/ 2014/ 02/ 03/ 1-3-million-gm-invests-creates-just-one-job/에 있음.)

24) 시간ㆍ지면 관계상 이 문제를 여기에서 자세히 설명드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간단히만 말씀드리자면, 맑스가 ≪자본론≫ 제1권의 제1편(상품과 화폐)에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무엇이든 그것들을 양적으로 비교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동질(同質)의 것으로, 같은 얘기지만, 동일한 단위로 환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문제의 대상으로 되어 있는 ‘미국의 제조업’의 일정 기간에서의 생산성ㆍ생산고의 증대ㆍ감소의 문제는 극히 다양한 사용가치 생산의 증대ㆍ감소의 문제여서, 그것들을 표상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들을 경제적ㆍ경제학적으로 의미 있게 통계화 할 수는, 즉 양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구태여 통계화하자면, 일정 기간에 제조업 생산물의 총체적(總體積)이 얼마나 증감했고, 총중량이 얼마나 증감했는가를 통계화 하는 것이야 원리적으로, 그리고 기술적으로 가능하겠지만, 창고업자들이나 운송업자들에게 외에는 그것이 어떤 경제적 중요성을 지니겠습니까? 그 때문에 부르주아 국가 당국이나 자본가 단체들도 그런 사실상 무의미한 통계는 작성하지 않고 있고, 따라서 본문에 제시된 통계는 전적으로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대신, 이 역시 엄밀히 말하면 결코 동일한 상품, 동일한 사용가치가 아니긴 하지만, 예컨대, 2014년 2월 현재 울산 현대자동차 노동자 한 사람당 일정 기간, 예컨대 1년간 자동차 생산량이, 예컨대 1970년 2월 현재의 그것에 비해서 얼마나 엄청난 량일 것인가는, 그것이 예컨대 300%보다 훨씬 훨씬 많은 양일 것이라는 것은 쉽게 표상할 수 있지 않을까요?

25) 호경업ㆍ김지섭 기자, “10년 내수불황, 일자리 600만 개 날렸다”, ≪조선일보≫, 2014. 2. 25.

26) ≪자본론≫ 제1권, MEW, Bd. 23, SS. 470-71.

27) 물론 ‘취업 임금노동자들의 총수’를 의미합니다.

28) ≪자본론≫ 제3권, MEW, Bd. 25, S. 274. (강조는 인용자).

29) “사회적 노동생산력의 발전은 자본의 역사적 임무이자 존재이유(Berichtigung)이다. 실로 그에 의해서 자본은 보다 고도의 생산형태의 물질적 조건들을 무의식 중에 창출한다.”(≪자본론≫ 제3권, MEW, Bd. 25, S. 269.)

30) 이상, 유종일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ㆍ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 원장, “비트코인의 부침과 경제민주화”, ≪한겨레≫, 2014. 2. 25. (강조는 모두 인용자).; 시간ㆍ지면 관계상 간단히만 말씀드리자면, “화폐란 모름지기 교환수단의 기능과 함께 가치저장의 기능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척도이기 때문에, 즉 가치저장수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유통수단이기 때문에 화폐인 것이고, 현대 불환은행권은 결코 “신용화폐”가 아니라 ‘국가지폐화한 은행권’일뿐이며,, 따라서 현대의 화폐제도는 결코 ‘신용화폐제도’가 아닙니다. 또한, 국가는 “경기부양을 목표로 통화를 증발하여 인플레를 유발하”지만, 국가지폐, 불환은행권의 량, 통화량이 “화폐가치를” “보전”하거나 “훼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증발은 다만 불환의 통화가치를 훼손할 뿐입니다. 화폐가치 그 자체는 화폐상품 금의 생산성에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금본위제’ 하에서든, 금태환 정지 하에서든, 국가가 통화의 공급량을 결정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 금의 수급이라는변수에 의”한 것이 아니며, 주기적 디플레이션 또한 통화량과의 관련에서 발생하는 게 아닙니다. 게다가, “금본위제에 집착하느라고 대규모 은행 연쇄파산을 방치하여 대공황에 이르렀던 것”이라? 그렇다면, 금태환 정지 후에도, 저들의 표현을 빌면, ‘금본위제 철폐’ 후에도 사실상 주기적으로 발생한, 특히 2008년 이래 발생한 대규모 은행 연쇄파산은 무슨 제도에 집착한 결과일까요?

31) 유종일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ㆍ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 원장, 같은 글. (강조는 인용자).

32) 여기에서도 교수님께서는 가치와 가격을 혼동, 동일시하는 비과학을 과시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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