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루쇼프가 거짓말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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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버 퍼(Grover Furr)

번역: 노사과연 부산지회 연구팀

 

 

 

제9장 스딸린 권력의 말년기

 

54. 스딸린은 꼴호즈(Kolkhozes)에 막대한 세금 인상을 제안했다

 

흐루쇼프

 

설상가상으로, 이 계획[“목축업의 발전을 위해, 꼴호즈, 기계-트랙터 보급소(MTS)와 소포즈(sovkhoz) 노동자들에게 물질적 동기부여를 창조하기 위하여, 그 제품들의 가격을 인상하는 것”]을 검토하면서, 스딸린은 꼴호즈와 꼴호즈 노동자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이 400억 루블(rubles) 정도 인상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스딸린에 의하면 농민들은 삶이 풍요롭고, 꼴호즈 노동자들이 세금을 완전히 지불하기 위해서는 단지 한 마리의 닭을 더 많이 팔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였는지를 생각해보라. 확실히, 400억 루블은 꼴호즈 노동자들이 정부에 팔았던 모든 생산품의 가격으로도 실현할 수 없었던 금액이다. 예를 들어, 1952년 꼴호즈와 꼴호즈 노동자들은 정부에 그들의 생산품을 인도하고 팔았던 대가로 262억 8000만 루블을 받았다.

그렇다면 스딸린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자료에 근거를 두고 그런 의견을 제출했다는 말인가? 물론 아무런 근거도 없다. 그런 경우들에 있어서 사실과 숫자는 그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흐루쇼프에 의하면, 스딸린은 죽기 바로 전인 1953년 2월에 이 내용을 말했다. 이런 기록을 남긴 사람은 그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에 관해서는 오직 흐루쇼프의 기록만을 가지고 있다.

흐루쇼프는, 베리아에 대한 비난에 배타적으로 몰두했던 1953년 7월 중앙위원회 총회가 열리는 동안, 이 의심스러운 세금 인상에 대하여 처음으로 언급했다. 흐루쇼프가 그 내용을 언급한 이후에, 미꼬얀과 말렌꼬프 두 사람은 “400억” 루블이라는 숫자를 말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흐루쇼프가 그 내용을 언급하기 이전에는, 그 내용을 들은 적이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1952년 10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농민들에 대한 세금 인상에 대하여 반대하는 연설을 했던 미꼬얀은, 스딸린이 농민들에 대한 세금에서 “단지 한 마리의 더 많은 닭”을 제안했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미꼬얀은 스딸린이 말했던 그 장소에는 없었기 때문에, 그가 이 말을 직접적으로 듣지는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미꼬얀은 그의 회고록에서 이 사건에 대해 논의를 할 때 “400억 루블”을 언급하지 않는다.1)

 

 

55. 스딸린은 뽀스띠쉐프를 모욕했다

 

흐루쇼프

 

스딸린이 했던 연설 중의 하나에서 그는 뽀스띠쉐프에 대한 그의 불만족을 표현하면서 그에게 물었다. “당신의 정체는 무엇인가?” 뽀스띠쉐프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스딸린 동지, 나는 볼세비끼요. 볼세비끼.”

이러한 분명한 자기 주장은 처음에는 스딸린에 대한 존경의 부족을 보여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나중에 이 주장은 해로운 행동으로 간주되었고 결과적으로 뽀스띠쉐프가 전멸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어떤 근거도 없이 ‘인민의 적’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우리는, 어떤 근거도 없이 엄청나게 많은 당원들을 탄압했다는 죄 때문에, 뽀스띠쉐프가 해임되고 체포되어서 최종적으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는 사실을 이미 보았다. 흐루쇼프는 이 총회(1938년 1월)에 참석하였으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뽀스띠쉐프가 “어떤 근거도 없이” 탄압을 당했다는 그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 관해서도 역시 흐루쇼프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흐루쇼프는 단지 소문으로만 돌던 뽀스띠쉐프와 스딸린 사이의 이 대화를 오로지 자기의 비밀연설에서만 기록하고 있다. 그 어떤 누구도 분명히 스딸린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스딸린의 그 말은 흐루쇼프의 회고록에조차 실려 있지 않다.

게티와 나우모프에 의하면, 1938년 1월 총회까지 스딸린과 뽀스띠쉐프 사이에 특별한 마찰이 있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뽀스띠쉐프는 그 총회에서 정치국 후보회원직에서 해임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되었다. 그러므로 설령 이런 일이 발생했다 하더라도, 스딸린의 이 “연설”은 1938년 1월 총회에서나 이루어졌음에 틀림없다.

보리스 니꼴라예프스끼(Boris Nikolaevsky)와 같은 주석자들은 1937년 2-3월에 있었던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그런 일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뽀스띠쉐프가 이 총회에서 스딸린에 반대했다는,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에서의 이전 주장을 그들이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기간 진행된 그 총회에 대한 방대한 기록사본은 1992년 5월에야 출판되었다. 다시 한 번 더, 우리가 이미 보았던 것처럼 그 사본은 흐루쇼프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뽀스띠쉐프는 그 총회에서 스딸린에 대해 결코 반대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소문으로만 돌던 스딸린과 뽀스띠쉐프 사이의 이 대화 역시 그곳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1938년 중앙위원회 총회의 사본들은 전체가 모두 출판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본들은 발췌되어서 출판되었고 몇몇의 조사자들은 문서고에서 전체 사본들을 읽었다. 그들 중 누구도 그런 대화를 발견했다고 언급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흐루쇼프가 거짓말을 했다는 개연성이 아주 높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는 없다.

언젠가, 스딸린이 그런 말을 실제로 했다는 증거가 세상에 나온다 할지라도, 그 증거는 뽀스띠쉐프의 체포, 재판, 판결과 처형에 대한 근거는 확실히 아닐 것이다. 그것은 수많은 당원들을 탄압하는 데 있어서 뽀스띠쉐프의 유죄에 대한 처벌이었다. 스딸린이 이 말들을 했든지 안했든지 간에 — 그리고 다시 반복하지만, 흐루쇼프의 주장을 제외하고는, 그런 말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 — 그 대화로 인해 뽀스띠쉐프가 비참한 운명을 맞이했다는 흐루쇼프의 말은 거짓이다.

그렇다면 왜 흐루쇼프는 스딸린이 그런 말을 했다고 주장했을까? 아마도, 수년 동안 스딸린의 지근에서 일했던 정치국 회원들을 위한 “알리바이”를 제공하려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많은 공산주의자들과 쏘련의 시민들이 궁금해 할 가능성이 있다: 왜 스딸린의 가장 가까운 동료들은, 흐루쇼프가 스딸린을 고발하고 있는 “범죄들”의 어느 것에 대해서도 결코 스딸린을 비난하지 않았는가? 그들이 이 사실들을 알았다면, 왜 그들은 스딸린이 이 범죄들을 멈추게 할 조치들을 취하지 않았을까? 불충분할지 모르겠지만, 흐루쇼프와 그의 추종자들이 할 수 있을 유일한 대답은 이것이었다: “우리가 저항을 했다면, 우리는 죽었을 것이다. 단지 “나는 볼세비끼다”라고 말했던 것 때문에, 뽀스띠쉐프에게 일어났던 일을 보라.”

 

 

56. 정치국 작업의 “해체”

 

흐루쇼프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중요성은 축소되었고, 그 과업은 정치국 안의 다양한 위원회들, 소위 말해서, “5인조”, “6인조”, “7인조”, “9인조” 등의 창설로 인해서 해체되었다. 예를 들어, 여기에 1946년 10월 3일 정치국의 결정이 있다:

 

스딸린의 제안:

 

1. 외무 업무를 관장하는 정치국 위원회(“6인조”)는 앞으로, 외무 업무뿐만 아니라, 내부 건설의 일들과 국내정책을 맡아 나갈 것이다.

2. 6인조에 쏘련 경제계획 국가위원회 의장인 보즈네센스끼(Voznesensky) 동지의 명단이 첨가될 것이며 7인조로 알려질 것이다.

서명: 중앙위원회 서기장. 스딸린.

 

이 무슨 카드 게임의 전문 용어란 말인가! (청중들의 웃음.) 정치국 안에서, “5인조”, “6인조”, “7인조”, “9인조” 같은 이러한 유형의 위원회를 창설하는 것은 집단 지도의 원칙에 반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의 결과, 정치국의 몇몇 회원들은 이런 방식으로 가장 중요한 국가의 업무들을 다루는 데 참여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스딸린에 대해 격렬하게 적대적인 전기작가, 에드바드 라드진스끼(Edvard R-adzinsky)가 인정하는 것처럼, 흐루쇼프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정치국 안의 분과위원회는 단지 해야 할 업무를 분할하는 방식이었다. 이것은 새로운 일도 아니고 스딸린의 혁신도 아니었다.

 

 

57. 스딸린은 보로쉴로프(Voroshilov)를 “영국 첩보원”으로 의심했다

 

흐루쇼프

 

자신의 극단적 의심 때문에, 스딸린은 보로쉴로프가 영국 첩보원이라는 황당하고 어이없는 의심으로 역시 장난질을 쳤다. (장내에서는 웃음.) 정말이다 — 영국 첩보원이라고 의심했다.

 

그의 회고록에서, 흐루쇼프는 그가 말했던 소문들이 단지 “우리들 몇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경우 그것에 관한 다른 문서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미꼬얀의 회고록에는 그것(보로쉴로프가 영국 첩보원이라는 스딸린의 의심: 역자)이 없다. 그런데 그 회고록은 잘못된 “기억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즉, 베네스(Benes)가, 뚜까체프스끼(Tukhachevsky)가 유죄라는 것을, 스딸린에게 확신시켜 주었고, 스딸린은 이것을 미꼬얀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았다.2) 그러므로 설령 미꼬얀이 그 내용(보로쉴로프에 대한 스딸린의 의심: 역자)을 “기억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에 정당하게 문제제기 할 수 있다. 사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58. 안드레예프; 59. 몰로또프; 60. 미꼬얀

 

이 모든 것은 19차 전당대회 직후 개최되었던 1952년 10월 16일 중앙위원회 총회와 관계가 있다.

 

안드레예프

 

흐루쇼프

 

일방적인 결정으로, 스딸린은 역시 또 다른 한 사람을 정치국의 업무로부터 제외시켜 버렸다 ―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안드레예프(Andrei Andreyevich Andreyev). 이것은 안하무인식의 가장 난폭한 행동 중의 하나였다.

 

엄격히 말해서, 공식적인 문서 사본이 출판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스딸린이 말했던 것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미꼬얀에 의하면 아무 것도 출판된 것이 없다). 19차 전당대회의 문서 사본도 역시 출판되지 않았다.3) 스딸린이 죽은 이후 즉시 당 지도부는 이 두 회의에서 내려진 주요 결정들을 바꾸려고 최선을 다했고, 이 두 대회의 어떠한 기억도 지워버리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안드레예프가 새로이 이름 지어진 최고회의 간부회(이전에는 정치국)에서 자리를 유지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공식적인 문서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흐루쇼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다른 출처들로부터 나온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안드레예프는 스딸린이 죽은 후 10일이 지난 1953년 3월 15일 각료회의에서 그의 지위를 상실했다.4)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최고회의 간부회에 안드레예프를 임명하지 않은 것이 “안하무인식의 난폭한 행동”이었다면, 왜 흐루쇼프, 말렌꼬프와 베리아는 각료회의에서 역시 그를 제거했는가? (그는 훨씬 낮은 지위인 최고쏘비에뜨의 최고회의 간부회에 임명되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1952년 10월 16일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있었던 스딸린의 연설 중의 한 부분에 의하면, 실제로 스딸린은 새로운 최고회의 간부회에 안드레예프를 임명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안드레예프가 귀머거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5) 꼰스딴띤 시모노프(Konstantin Simonov)도 유사한 내용을 말한다.6) 이것들이 안드레예프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 중앙위원회 총회의 유일한 설명들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안드레예프가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스딸린이 명시적으로 그를 배제시켰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그러므로 공식적인 문서 사본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흐루쇼프가 거짓말을 했다는 좋은 증거이다. 안드레예프는 스딸린의 안하무인식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배제되지 않았다.

 

 

몰로또프와 미꼬얀

 

흐루쇼프

 

19차 전당대회 후 열린 첫 번째 중앙위원회 총회를 생각해보자. 그때 총회의 연설에서, 스딸린은 뱌체슬라프 미까일로비치 몰로또프(Vyacheslav Mikailovich Molotov)와 아나스따스 이바노비치 미꼬얀(Anastas Ivanovich Mikoian)의 성격을 규정하고, 우리 당의 이 원로 일꾼들이 유죄라고 근거도 없이 제시했다. 스딸린이 몇 달 동안 더 지배를 유지했다면 몰로또프와 미꼬얀 동지가 이번 전당대회에서 아마도 어떤 연설도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은 배제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총회에 참석을 하여, 그들의 기록을 남기고 있는 몇몇의 사람들로부터, 이 총회에 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는, 스딸린이 실제로 몰로또프와 미꼬얀을 비판했던 것은 분명하다.

여기에서 흐루쇼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의 내용을 조사해야 할 필요가 있다.

 

  • 스딸린이 몰로또프와 미꼬얀에게 겨누었던 “죄목들”이 “근거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근거가 있는 것인지를;

  • 스딸린이 살아 있었다면 그들이 20차 전당대회에서 연설을 할 수 없었는지 아니면 연설을 할 수 있었는지를.

  • 이 총회에 참석했던 사람들로부터 나온, 이 총회에서의 스딸린의 말에 대한 네 가지 설명이 있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미꼬얀 자신의 것(Tak abyl-o, Ch. 46); 작가인 꼰스딴띤 시모노프의 것(Glazami  cheloveka moego pokol-enia), 드미뜨리 쉐삘로프의 것(Neprimknuvshii, PP.225-8), 레오니드 니꼴라에비치 에프레모프(Leonid Nikolaevich Efremov)의 것(Sovetskaia Rossiia, January 13, 2000, p. 6). 물론 미꼬얀은 오랫동안 중앙위원회와 정치국의 회원이었다; 나머지 세 사람은 중앙위원회의 새로운 회원들이었다. 1953년 3월에 적었던 시모노프의 짧은 기록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총회가 있은 후 수년이 지난 후에 기록되었다.

 

쉐삘로프는 약간의 문단에서 몰로또프에 대한 스딸린의 비판을 기록한다. 그는 미꼬얀에 대한 스딸린의 언급은 더 짧게 적고 있다. 쉐삘로프는, 미꼬얀은 자기 자신을 방어했고 자신이 “커다란 범죄자”라고 불렀던 처형된 보즈네센스끼(Voznesenskii)와 몰로또프가 가까이 지냈다는 것 때문에 몰로또프를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쉐필로프는 그 혐의들이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혹은 그 속에서 어떠한 위협도 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단지 새로운 정치국에 그들을 포함시키지 않는 데에 대한 스딸린의 이유만을 보았다.

1953년 3월 개최된 총회에 관한 짧은 기록에서, 시모노프는 몰로또프와 미꼬얀에 대한 스딸린의 비판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레닌 만큼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는 스딸린의 주장만을 기록했다. 1979년 시모노프가 기억했던 것은, 스딸린이 몰로또프를 격렬하게 비판했던 것과, “투항주의”에 대하여 그와 미꼬얀이 가지고 있던 애매한 감정이었다. 시모노프는 스딸린이 그 당시에 미꼬얀을 비판했다는 것에 동의를 했지만, 왜 그렇게 비판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두 사람이 스딸린의 비판에 대해 대답을 했다고 말한다 — 대화 그 자체의 내용이나 대화 그 자체가 스딸린이 “절대적인 굴복”을 요구했다는 흐루쇼프의 주장을 반박한다. 시모노프는, 이유야 무엇이든지 간에, 이 비판들이 새로운 최고회의 간부회의 정치국에서 몰로또프와 미꼬얀을 배제시키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역할을 했다고 믿었다.

역시 수년이 지난 후 기록된 미꼬얀의 설명은, 스딸린이 몰로또프를 외무정책에 있어서의 유약함 때문에 비판하였고, 국내정책에 있어서 몰로또프와 미꼬얀 자신을 비판했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미꼬얀의 설명에서, 스딸린이 비판적이었지만 자신들을 존중했다고 기록한다. 미꼬얀은 위협감을 느끼는 것에 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는다. 에프레모프의 설명은 이 두 사람에 대한 스딸린의 비판의 개요를 설명하고 있지만, 그 설명에서 역시 이 비판들이 결코 위협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다.

자신의 방대한 회고록에서, 흐루쇼프는 1952년 10월 총회에 관해서는 단지 약간의 문장만을 적고 있으며, 몰로또프나 미꼬얀을 겨냥한 “위험”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미꼬얀, 몰로또프와 보로쉴로프는 역시 최고회의 간부회에 다시 이름이 올랐고, 미꼬얀과 몰로또프는 제외하고 보로쉴로프는 “최고회의 간부회의 정치국”에 이름이 올랐다.

하지만 흐루쇼프 주장의 진실성은 어떠한가? 스딸린이 혐의를 둔 것이 — 좋은 말로 하면 “비판”이 될 것이다 — “근거가 없는” 것 같지는 않다. 비판은 정확할 수도 있고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본질적으로, 비판은 스딸린과 이 두 정치국 회원 사이의 정치적인 차이를 반영했다.

엄격히 말해서, 스딸린이 살아 있었다면 몰로또프와 미꼬얀이 20차 전당대회에서 연설을 할 수 없었을 “가능성“도 있었다는 흐루쇼프의 진술은 참으로 증명될 수도, 거짓으로 증명될 수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19차 전당대회에서의 스딸린의 행동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미꼬얀과 몰로또프가 비록 최고위직(최고회의 간부회 정치국)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25명인 최고회의 간부회의 회원이었고, 그러한 지위는 다음 전당대회에서 확실히 연설을 할 수 있는 지위가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회고록에서 흐루쇼프는 몰로또프와 미꼬얀이 어떤 위협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반복하지는 않는다.

 

 

61. 최고회의 간부회의 확대

 

흐루쇼프

 

스딸린은 분명히 정치국의 원로 회원들을 처리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정치국 회원들이 새로운 회원들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종종 주장했다.

19차 전당대회 이후, 중앙위원회 최고회의 간부회의에 25명의 사람들을 선출하는 것과 관련된 스딸린의 제안은, 노련한 정치국 회원들을 제거하고, 경험이 거의 없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스딸린을 찬양할 것이었다.

우리는 이것이 역시 노련한 정치국 회원들을 미래에 괴멸시키기 위한 설계였으며, 이러한 방식으로 스딸린의 모든 부끄러운 행위들, 즉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행위들을 덮어버리려는 방편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흐루쇼프는 여기에서 거짓말을 했다. 왜냐하면 그의 고발이 사실에 근거한 최소한의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존해 있는 총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설명에 의해 전혀 지지를 받지 못한다. 1952년 10월 중앙위원회 총회에 관한 에프레모프의 기록에 의하면, 스딸린은 노쇠한 정치국의 한계를 넘어서 최고회의 간부회를 확장하려는 그의 제안을 설명하는 데 굉장히 명쾌했다. 처음 참석한 총회에서 젊은 에프로모프는 당의 지도부에 새로운 인물 영입의 필요성에 대한 스딸린의 강조에 특히 감동을 받았다. 왜냐하면 스딸린의 설명은 그의 기록에서 상당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 9장 끝) <노사과연>


1) A. I. Mikoian, Tak Bylo. Moscow: Vagrius, 1999, Ch. 46, pp. 559-568.

2) Ibid, p. 553.

3) 적어도 분리된 출판으로는 아니었다. 공식적인 연설은 1952년 10월 전당대회 시기에 쁘라브다(Pravda)에서 모두 출판되었다.

4) Cf. the biographical entry on Andreev at Hrono.ru/hrono.info – http://

www.hrono.ru./biograf/andreev _ aa. html

5) 2000년 1월 13일 Sovetskaia Rossia에서 출판된 총회에 관한 L. N. 에프레모프의 기록에 의하면. At http://chss.montclair.edu/english/furr/research/stalinoct1652.pdf

and also at http://grachev62.narod.ru/stalin/t18/t18_262.htm

6) Konstantin M. Simonov, Glazami cheloveka moego pokoleniia. Moscow: Novosti, 1988, p. 246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Mar 11th, 2014 | By | Category: 번역, 정세와노동 | 조회수: 4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