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위기와 조절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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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찬|연구위원장

1. 머리말

2008년에 발발한 세계대공황이 2014년 들어서는 신흥국들의 위기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신흥국들의 위기는 현상적으로는 미국의 양적 완화 축소의 영향때문인 것으로 보이고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세계대공황이 극복될 전망을 찾지 못하는 가운데 중국 등 신흥국의 투자와 수출증대로 세계경제를 떠받치는 것이 한계에 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한다면 이러한 위기는 일정정도 감소될 수 있지만 중국경제 자체가 내적인 모순으로 말미암아 한계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 포괄적인 의미에서 신흥국의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대공황은 2008년의 금융위기의 폭발, 2011-12년의 유럽 등의 재정위기, 2013-14년의 신흥국 위기 등으로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부르주아 언론들은 이를 두고 뉴 노멀(새로운 정상상태)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 장기 저성장 국면이라 부르기도 한다. 즉, 세계대공황이 현재 전혀 극복된 바가 아니고 앞으로 상당기간 극복의 전망 또한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임을 부르주아들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본주의의 근본적 위기, 대위기에 대해 올바른 입장을 정립하는 것은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전망에 있어 중요하다. 맑스주의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위기에 대해 공황론을 바탕으로 하여 과학적인 분석을 제출하는 것이 시급하다. 그러나 이것은 한 순간에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고 하나하나 차근차근 현재의 위기에 대한 과학적이고 계급적인 분석을 수행하는 것이 올바르다. 그런 점에서 지난 1970년대, 80년대의 세계공황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나타났던 조절이론을 검토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당시의 위기에 대해 나름대로 이론적 해명을 시도했던 것인데 조절이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문제의식의 긍정성을 포착할 필요가 있고 조절이론을 지양하여 현재의 위기에 대한 맑스주의적 진단과 이론을 수립하는 방향을 세울 필요가 있다. 그러면 차근차근 조절이론에 대한 검토를 시작해보자.

 

2. 1970-80년대 위기와 조절이론의 대두

1970년대, 80년대는 자본주의에 있어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70년대 석유위기를 계기로 폭발한 위기는 주요 자본주의국가에 있어서 스태그플레이션을 가져왔고 10여년에 걸쳐 위기가 전개되었다. 2차 대전후 60년대까지 장기호황을 누리던 자본주의는 60년대 말부터 이윤율이 하락하며 위기의 징후를 보이더니 70년대에 공황국면으로 접어들었던 것이고 경기침체 속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기존의 주류경제학에서는 이에 대한 과학적인 진단과 대안을 내놓지 못하였고 인플레이션 현상은 고금리, 강한 달러 정책을 폈던 80년대의 레이건 시대에 가까스로 진정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 영국에서는 대처가 신보수주의라는 이름으로 최근까지 유행했던 신자유주의 정책의 원형을 펴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대처의 신자유주의는 당시에는 자본주의 세계의 주류의 흐름이라기보다는 일부에 국한된 현상이었다. 이렇게 부르주아 경제학에서는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기존의 케인즈주의가 파산한 가운데 새로운 대안의 모색이 시도되었고 조절이론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하에서 주류경제학에 대한 비판, 맑스주의적 접근에 대한 비판을 기치로 형성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즉, “구조적 위기가 다시 찾아 왔는데 조절이론은 바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구상된 것”1)이었다.

이러한 조절이론은 흔히 말하는 거대담론이라 할 수 있다. 구조적 위기에 대한 접근을 위해 필요한 이론적 고리들을 발견 혹은 설정하는 것인데 그러한 이론적 고리가 과학적인가 여부를 떠나 세계적 위기에 대한 포괄적인 접근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위기를 정상에서 벗어난 일탈로 치부하는 주류경제학에 대한 비판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또한 알튀세르의 구조주의를 비판하며 맑스주의와도 선을 긋는 접근이었다는 점에서 8,90년대 많은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 즉, 8,90년대는 맑스주의적 담론이 약화되고 많은 측면에서 공격받는 양상이었는데 조절이론은 경제위기의 측면에서 그러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맑스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맑스주의에서 벗어난 이론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없고 비과학적이라고 치부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조절이론의 이론적 고리를 검토하고 비판하고 동시에 그 문제의식에서 긍정성을 추출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것을 통해 조절이론을 극복, 지양하는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3. 조절이론의 역사와 이론구성

조절이론은 1970년대에 공황이 세계적으로 발발하자 그에 대한 설명으로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절이론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학자들은 프랑스학자들이었는데 ‘조절(regulation)’이라는 용어를 개념화한 학자는 아글리에타였는데 그는 《자본주의의 조절과 위기》라는 저서에서 이론화를 시도했다. 여기서 아글리에타는 “기본적 사회관계의 총체를 제도화한 것으로서 ‘구조형태’라는 개념을 제시”2)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의 위기를 조절의 위기로 파악하는 접근이 제시되었던 것이다. 이는 기존의 맑스주의에서 정립된 개념인 자본의 재생산에 대당하는 것이었는데 이들 조절이론가들은 알튀세르를 비판하면서 거기서 더 나아가 맑스의 사적 유물론적 접근에서 일탈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조절이론가 스스로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첫째로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일정단계와 엄밀하게 조응한다는 것은 아마도 잘못된 것이다. 둘째로 경제적 구조와 법적·정치적 상부구조로 양분하는 것은, 경제적인 것 및 물질적 생산력의 상태에 대한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이라는 식으로 파악되지 않는 사회분석을 하려는 경우 도움이 되기는 커녕 이를 저해한다”3)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사적 유물론의 근본정식을 폐기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의 재생산의 위기’라는 개념 대신 ‘조절의 위기’라는 개념이 채택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출발점을 잡은 조절이론은 80년대를 거치면서 몇가지의 이론적 고리를 제출한다. 주요한 것으로는 첫째 축적체제, 둘째 구조형태(제도형태), 셋째 조절양식, 네째 발전양식이라는 개념 등이다. 축적체제라는 개념은 다음과 같이 정의되고 있다. “이 용어는 ‘자본축적의 진행이 광범하고도 상당정도 일관된 형태로 보증되는, 즉, 과정 그 자체로부터 부단히 나타나는 왜곡 혹은 불균형을 흡수하거나 시간적으로 지연시킬 수 있는 규칙성의 총체’를 의미한다”4)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대단히 막연하고 모호한데 이를 차치하고서 본다면 조절이론가들이 이러한 축적체제의 사례로 들고 있는 것은 ‘외연적 축적체제’와 ‘내포적 축적체제’이다. 이에 대한 언급을 들어보면 “외연적 축적체제하에서는 장인적 생산기술의 기초 위에서 노동력 규모의 확장과 더불어 노동일의 연장과 노동강도의 강화를 통해서 성장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생산성의 상승은 제한되고 대량소비 역시 아직은 잠재적이다. 내포적 축적체제하에서는 무엇보다도 기술진보(이것은 생산성과 대량소비의 규칙적 증가의 가능성을 창출한다)의 결과를 담고 있는 고정자본에 대한 투자를 통해서 성장이 이루어진다.”5)고 한다. 즉, 외연적 축적체제는 절대적 잉여가치에 의해서 그리고 내포적 축적체제는 상대적 잉여가치에 의해 축적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19세기 자유경쟁 자본주의에서는 외연적 축적체제와 결합하는 경쟁적 조절양식이 하나의 발전양식을 이루었고 20세기에는 2차 대전 전까지 내포적 축적체제와 경쟁적 조절양식이 결합된 발전양식이 등장했으나 그것의 불완전성으로 말미암아 1930년대의 대공황이 발생했던 것이고 2차 대전 후의 내포적 축적체제, 독점적 조절양식을 결합한 새로운 발전양식의 등장으로 2차 대전 후 호황이 가능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에서 긍정적인 것은 역사적 단계를 나누어 발전양식으로 포착한다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을 구성하는 내용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먼저 19세기 자유경쟁 자본주의가 단지 외연적 축적체제 즉, 절대적 잉여가치의 취득 체제였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19세기에도 대공업이 발전했으며 그것은 끊임없는 기술발전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고 당연히 절대적 잉여가치와 더불어 상대적 잉여가치도 취득 혹은 착취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절이론가들이 외연적 축적과 내포적 축적이라고 하는 접근은 맑스주의에서, 특히 《자본론》에서 절대적 잉여가치, 상대적 잉여가치라는 개념은 빌어왔지만 그것들 상호 간의 내적 연관을 무시하고 도식적으로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조절이론가 내부에서도 비판이 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축적체제라는 개념과 접근은 취약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 구조형태 혹은 제도형태라는 개념에 대해 검토해 보자. 먼저 조절이론의 정의를 들어 보자. “구조형태(내지는 제도형태)라는 개념이 목적으로 하는 바는 실로, 일정의 역사적 시기에 있어서 경제적 재생산을 하나의 회로로 만드는 규칙성의 기원을 해명하는 것이다. … 이러한 점에서 ‘하나 내지는 여러 개의 기본적 사회관계를 규범화하고 있는 것은 모두 제도형태(내지는 구조형태)’라고 정의하자.”6) 이러한 정의는 발상은 참신하지만 내용적으로 매우 모호하다. 실제로 이들이 구조형태(제도형태)의 내용으로 들고 있는 것은 화폐, 임노동관계, 경쟁 등이다. 이러한 접근은 자본주의의 재생산 대신에 조절이라는 개념을 채택하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재생산의 원리, 규칙성의 문제를 맑스주의의 정치경제학을 벗어나서 나름대로 해명하고자 하는 것인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러한 구조형태라는 개념의 전개가 차후에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계급타협을 통한 새로운 발전양식의 구성으로 나아간다고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이러한 접근은 주류경제학에 대해서는 진보성이 있다. 즉, 사회적 계급관계를 떠나서 고찰하는 주류경제학에 대해 반발하면서 사회관계를 경제적 개념에 결합시키고 있는 것인데 그러나 접근은 참신하지만 그러한 접근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근거는 모호하다.

셋째, 이들이 핵심개념으로 들고 있는 것은 조절양식이다. 먼저 이들의 말을 들어보자. “무수한 분산적인 생산·교환상의 의사결정에 관한 한정적 합리성의 집합으로부터 시작하여 시스템 전체가 동태적 일관성을 가질 가능성으로 이행하여 가는 것-그것이야말로 조절 개념의 최종목적이다.”7) 이 역시 다른 개념과 마찬가지로 모호하고 막연한 개념정의라 할 수 있다. 시스템 전체의 동태적 일관성이라는 조절이론가들의 목표와 정의는 가능할 것인가? 이들 조절이론가들은 자본주의의 경제적 무정부성을 잊고 있는 것 같다. 조절이론가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최후의 보루인 국가조차도 경제의 무정부성을 제어할 수 없다. 나아가 국가 혹은 조절이론이 자본주의의 재생산을 초점으로 하는 시스템 전체의 동태적 일관성을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들 조절이론가들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적 접근과 거리가 있지만 이들은 자본주의 국가를 맹신하거나 비과학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는 국가독점자본주의하에서는 시스템 전체의 동태적 일관성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 독점의 이윤을 떠받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한다. 이와 같이 조절의 개념이 모호하고 국가에 대해 비과학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데 이들이 내놓은 조절양식의 내용도 도식적이고 빈약하기 짝이 없다. 즉, 경쟁적 조절양식과 독점적 조절양식이 이들 조절이론가들이 조절양식의 내용으로 제출하는 것이다. 경쟁적 조절양식은 19세기의 자유경쟁 자본주의의 (조절) 양식을 말하는 것이고 독점적 조절양식은 독점자본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이들은 사적 유물론적 접근을 거부하고 따라서 자유경쟁 자체에서 자라나오는 대립물인 독점이라는 레닌적 정의, 나아가 제국주의론적 접근을 거부하기에 자유경쟁 자본주의와 독점자본주의를 조절양식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쟁적 조절양식, 독점적 조절양식이라는 접근은 위기에 대한 대응이라는 점에서는 공허하기 짝이 없다.

마지막으로 발전양식의 개념에 대해 검토해보자. 이들은 자본주의의 발전양식을 1970년대까지 3단계로 나누고 있다. 여기서 발전양식은 축적체제와 조절양식의 결합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보면 첫째 19세기의 발전양식 1(경쟁적 조절과 외연적 축적), 2차 대전 전까지의 발전양식 2(내포적 축적과 경쟁적 조절양식), 2차 대전후 70년대까지의 발전양식 3(내포적 축적과 독점적 조절)으로 나누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면 19세기는 노동강도의 강화와 노동일의 연장을 통한 절대적 잉여가치의 취득을 주로 하는 외연적 축적체제와 자유경쟁의 조절양식이었고 2차 대전전까지는 테일러주의, 포드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기술발전을 통한 상대적 잉여가치의 취득, 내포적 축적 체제와 결합된 경쟁적 조절양식이었고 2차 대전 후에 독점적 조절양식이 완성되어서 3단계의 발전양식을 구성했고 70년대에 들어서는 이러한 3단계의 발전양식이 한계에 도달하여 위기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한 한계를 가리켜서 이들은 ‘포드주의의 고갈’이라 부르고 있다. 여기서 긍정적인 것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역사적으로 나누어 고찰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문제의식은 긍정적이지만 문제는 그 내용이 너무 도식적이다. 또한 발전양식이라는 개념구성 자체가 계급타협을 전제로 한다는 것도 지적될 수 있다. 즉, 이들은 2차 대전 후의 3단계의 발전양식이 계급타협을 통한 노동자계급의 대량소비를 바탕으로 성립한 체제였고 그것이 70년대에 한계에 도달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들의 이러한 접근은 너무나 현상적이다. 즉, 계급타협을 기초로 하는 새로운 발전양식이 성립하여 2차 대전 후의 장기호황을 가져왔다는 것은 나무의 잎만 보는 것이고 뿌리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2차 대전 후의 장기호황의 원인은 여러 가지로 볼 수 있지만 노동자계급의 대량소비를 가능하게 한 것은 계급타협 자체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2차 대전 후 자본가계급에 대하여 역관계에서 상당히 우세했다는 점이다. 즉, 타협이 본질이 아니라 힘관계가 본질인 것이다. 노동자계급이 2차 대전 후 강력했던 것은 세계사회주의 체제의 성립, 서유럽 각국에서 공산당 등 혁명세력의 성장, 식민지 체제의 붕괴 등 제국주의 질서의 위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유럽에서는 이른바 복지체제가 성립했던 것이고 이것이 소위 말하는 대량소비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조절이론가들이 자본주의의 발전을 역사적 단계로 나누어 고찰하고 각 단계의 특성을 분석하려는 접근은 긍정적이지만 내용은 맑스주의의 지반을 떠난 상태에서 매우 도식적으로 구성되었고 몰계급적으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들은 1970년대, 80년대의 위기의 원인을 ‘포드주의의 고갈’이라고 매우 공허하게 파악하고 있고 나아가 70년대의 위기를 극복할 새로운 발전양식의 수립을 새로운 계급타협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결국 현재의 곤경으로부터 탈출, 아마도 새로운 네 번째의 포스트 포드주의적인 발전양식을 가능케 하는 것은 테일러-포드주의를 넘어서서 새로운 계급타협에 기초한 새로운 노동과정을 구성하는 것”8)이 이들의 결론이다.

 

4. 계급타협의 파산과 2000년대의 위기

조절이론가들의 희망과는 정반대로 70,80년대의 위기는 새로운 계급타협에 기초하여 극복된 것이 아니라 계급타협의 철저한 파기, 자본가계급의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세에 기초하여 ‘극복’의 과정을 겪었다. 즉, 영국의 대처주의, 미국의 레이건주의 등 이른바 신보수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의 본질은 2차 대전 후 자본가계급의 정책이었던 계급타협을 파기하고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2008년의 세계대공황의 발발 전까지 이러한 계급타협의 파기와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세가 신자유주의의 본질이었고 그 속에서 자본주의는 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을 극복하고 새로운 호황을 구가하는 듯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모순과 그것의 세계적 표현이었던 자본의 세계화 자체가 바로 2008년 폭발한 세계대공황을 불러왔던 것이다. 지금 자본주의 주요 국가는 디플레이션 양상을 보이고 있다. 미국과 일본의 양적 완화, 유럽의 국채 무제한 매입 등으로 돈이 풀릴 대로 풀렸어도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디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신자유주의 공세로 인해 그리고 노동자계급과 인민에 대한 위기 전가로 인해 노동자계급과 인민의 소비능력이 매우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즉, 지금의 세계대공황은 계급타협의 파기과정의 종점에서 발생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조절이론은 이론의 취약성을 떠나 역사적으로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절이론의 문제의식에서는 일정하게 긍정적인 면이 있다. 위기를 총체적으로 해명하려 한다는 접근, 자본주의의 발전을 역사적으로 단계를 나누어 각 단계의 특성을 해명하려 한다는 것, 경제적 관계와 사회적 관계를 통일시켜서 접근한다는 것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조절이론은 맑스주의의 지반을 의식적으로 떠난 상태에서 이러한 접근을 한 것이었고 의욕은 좋았지만 과학적 이론을 만들어내는 데 실패하고 계급적으로 볼 때는 새로운 계급타협을 시도했으나 이후의 역사는 계급타협의 철저한 파기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의 세계대공황에 대해 조절이론의 긍정적 문제의식은 흡수하되 맑스주의의 지반 위에서 과학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5. 조절이론의 극복을 위하여

최근에 공황이 심화되면서 부르주아들은 뉴 노멀(new normal: 새로운 정상상태)를 말한다. 뉴 노멀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상황의 전개에 따라 달라지지만 부르주아들 스스로 좋은 시절은 갔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조절이론은 역사적으로 실패한 이론이라 할 수 있지만 부르주아들은 또 다시 새로운 발전양식을 꿈꿀 수밖에 없다. 그리고 현재까지는 반동의 흐름이 강하지만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운동이 고양되면 새로운 계급타협에 기초한 발전양식, 새로운 조절이론이 등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의 조절이론은 필요하지 않다. 자본주의의 위기를 조절한다는 접근은 지배계급의 접근이다. 그러한 지배계급의 의도에 봉사하는 계급타협에 기초한 새로운 조절이론의 가능성을 봉쇄하고 노동자계급의 입장에 선 위기에 대한 이론이 나와야 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맑스주의의 공황론의 심화 발전을 의미한다. 지금의 세계대공황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에 고유한 경제공황의 세계적 판본이다. 따라서 맑스가 발전시킨 과학적 공황론을 지금의 시대에 맞게 심화 발전시켜야 한다. 또한 지금의 공황은 일국 혹은 어느 한 지역의 공황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 공황이다. 이것은 현 단계의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요구하는 것이다. 또한 지금의 세계대공황을 초래한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을 개괄하고 역사적 접근과 논리적 접근을 통일시키는 것을 통해 향후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전망이 나올 수 있고 계급투쟁의 전망이 나올 수 있다.

조절이론은 위기에 대한 거대담론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관점에 선 접근이 아니었고 계급타협의 입장에 선 ‘위기의 조절’ 이론이다. 따라서 지금은 새로운 조절이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조절이론이 지양될 것, 조절이론이 극복되어야 하고 위기의 조절이 아닌 변혁의 이론이 나와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아도 세계대공황의 발발 이후 세계적 차원에서 반동의 흐름이 강화되고 있다. 따라서 조절이 아닌 변혁의 전망을 세우는 길을 올곧게 가는 것, 그것만이 노동자계급의 유일한 길이다. <노사과연>


1) R. 브와예, ≪조절이론≫, 학민사, 1991, p. 9

2) 앞의 책, p. 34-35

3) 앞의 책, p. 54-55

4) 앞의 책, p. 59

5) 로버트 브레너, 마크 글릭, <조절접근:이론과 역사>, ≪사회경제평론≫ 5호, p.180

6) R. 브와예, ≪조절이론≫, 학민사 p. 61

7) 앞의 책, p. 69

8) 로버트 브레너, 마크 글릭, <조절접근: 이론과 역사>, ≪사회경제평론≫ 5호, p.239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Feb 28th, 2014 | By | Category: 이론, 정세와노동 | 조회수: 2,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