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녹두의 피와 넋을 되살려라!

김남주|시인

  오늘도 새벽을 알리는 첫닭이 캄캄한 암흑의 밤을 깨우친다.

그때 갑오년 정월, 동진강변의 찬바람 속에 말없이 모여든 흰옷의 당신들이 보인다.

논밭의 푸르른 때는 날카로운 징벌의 죽창이 되어 탐관오리의 심장을 겨누었고 당신들의 부릅뜬 눈과 움켜진 주먹은 훨훨타는 횃불과 철퇴가 되었다.

봉건왕조는 안으로 더러운 관리들의 협잡과 착취와 압제로서 스스로 썩어가고 있었으며 밖으로는 호시탐탐 무력과 강압으로 침략을 노리는 강도,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하여 무너져가고 있었다.

무능한 왕조는 간악한 외세를 물리치기는커녕 오히려 개항이라는 미명하에 허약하게 강탈 당했으며, 그와 합세하여 당신들을 짓밟고 속이고 빼앗았다.

벼슬아치와 부자들은 온갖 기름진 땅을 차지한 반면 당신들은 송곳하나 꽂을 땅도 없었다. 수령 방백들은 터무니 없는 명목과 가증스런 협박으로 태산같은 세금을 거두었으나, 당신들은 그것을 거부할 한 줌의 힘도 없었다.

악랄한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보았으나, 당신들은 그것을 말 할 한치의 혀도 없었다. 그리고 강도 일본의 상품이 당신들의 시장을 유린하고 곡식을 훔쳐가도, 당신들은 그것을 막아낼 무기가 없었다.

하늘 아래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 당신들은 흙 속의 굼벵이처럼 꿈틀거리고 기어다니고 허우적 거리면서, 드디어는 피와 땀의 결정인 당신 자신의 쌀이 간악하고 게으른 자들의 매끄러운 손으로 실려가는 것을 몇 천번의 가을마다 보았던가?

그 수많은 가을의 밤마다 당신들은 짓밟혀 터진 흙벌레였다.

그러나 돌연 새벽을 알리는 먼동이 터올 때에, 들끓던 분노는 당신들을 하늘로 향하여 굳건히 일어선 인간이 되게 하였다.

무기를 들고 부황뜬 이웃들과 함께 모이자마자 당신들은 그제서야 벌레로부터 인간으로 탈환되었다.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르나 그 본의가 단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고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의 앞에 고통받는 민중들과 방백 수령 밑에 굴욕을 받는 작은 관리들도 우리와 같은 원한이 깊은 자라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를 해도 미치지 못하리라.”

어느 한 사람의 원한으로서가 아니라 팔도에 차고 넘쳤던 불의와 폐악을 모든 백성들과 더불어 제거하고, 이 땅에서 양놈과 왜놈을 한꺼번에 몰아내자는 민의 결단으로서 분기했던 녹두장군과 당신들의 함성이 오늘 우리의 가슴에 사무쳐 온다.

백산과 황토재의 빛나는 승리는 이 땅에서 살다가 피맺힌 한을 머금고 숨진 농민 혼의 승리였다. 예부터 지금까지 연면히 흘러 내려오는 농민항쟁 전통은 사람으로서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생존권의 밑바닥으로부터 분화구와 같이 폭발해 오던 것이 아니던가?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 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어디 남아 있겠나.”

농민 생존권의 위협은 곧바로 민족 생존의 위협이며, 이러한 투쟁이야말로 잃은 것을 찾으려는 정정당당한 인간적 권리요 의마가 아니던가?

그것은 무슨 거창하고 알량한 주의나 사상도 아니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자각이었다. 그러므로 어느 배운 자나 가진 자의 뇌수와 책에서 나온 어떠한 정책보다도 과학적으로 탁월한 정치의식이 아니었던가?

당신들의 집강소 설치는, 바로 민중 속에서 민중을 위한 정책이 실현된다는 근대적 이념의 훌륭한 근거가 되었다. 민족 근대화는 수백년 동안 세계사의 요구였고 오늘날까지도 그치지 않는 과제이다.

바로 그것은 저 생존의 밑바닥에서 치솟아 오르는 동력에 의하여 추진되어야 할 과제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밖으로부터, 그리고 위로부터 내리누르는 불가항력적이고 낯선 힘에 의하여 근대화를 강요당했다.

곧 그것은 남의 종살이나 반쯤 종살이로 머무는 근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아 당신들의 집강소는 아직도 우리 민족의 염원으로 저 미지의 앞날에 그려져 있다. 비굴한 봉건주구와 음흉한 일제는 드디어 당신들을 압살하기 위하여 손을 잡았고, 우금치의 피는 캄캄한 식민지 시대를 지나 오늘의 참담한 반쪽 국토에 곳곳에 스며 있다.

나라와 백성을 지키고 왜놈을 몰아내겠다는 녹두장군과 당신들은, 배반한 동족과 간교한 오랑캐에 의하여 무참하게 뜻이 꺾이게 되었으니, 이제 녹두장군의 마지막 말이 떠오른다.

“다른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나를 죽일진대,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가는 사람들게 내 피를 뿌려주라.”

영원히 기억하고 못다 이룬 한을 맺어달라는 당신들의 준엄한 호통이 오늘 우리들의 혈관을 뛰게 한다. 당신들이 지나간 땅 위에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는 갑오년 전의 당신들처럼 흙 속에 꿈틀거리는 벌레가 아닌가?

농민의 생존권은 날이 갈수록 위협을 받고 있다. 보릿고개는 면했으나 농민이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은, 누구를 위한 달콤한 선전문구인가?

겨우 지붕만 갈아덮고 변함없는 삼칸집에 늙어 죽도록 일해야 하는 우리는 진정 새마을의 주인들인가?

저 찬란한 도시의 번창과 풍요한 타락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초라한 땅 몇 마지기와 헛수고의 수확과 뼈빠지는 농업노동은 우리의 이웃으로 하여금 정든 고향을 버리게 했고 오늘도 누군가 떠나고 있다. 우리를 고향에서 내쫓는 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농민이 없는 농업정책은 드디어 우리가 게으르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역설로 오히려 저들의 특권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우리가 창의력이 없다고 몰아치고 무지하다고 비웃는다.

수지타산은커녕 기본적으로 먹고 입고 살아야 할 비용에도 미달되는 농업 소득의 적자는 그 누가 가져 갔기 때문인가?

이른바 고도성장이라는 헛개비의 발아래 짓밟혀 일방적 희생만을 강요당하는 저농산물 가격정책을 이제는 참지 못하겠다.

아! 아! 우리는 정말 갑오년 이전의 당신들처럼 으깨져 버린 흙벌레이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다.

올해도 풍년이라는 기묘한 신기루가 메마른 우리들의 목젖을 건드리며 사막 건너편으로 사라져 간다. 이것은 감쪽같은 마술이다. 추곡수매라는 요사스런 눈속임 앞에 허공으로 사라져버린 희극이다.

아! 아! 우리를 황금의 노예로 떨어뜨리지 말라. 위대한 자연의 조화를 대지의 아들인 우리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우리는 흙벌레가 아니라 바로 사람이라는 인간적 존엄을 일으켜 세우고, 나아가 모든 농민의 편에 서서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한 과감한 실천의 마당으로 뛰어들어라. 보아라 녹두의 피와 넋이 우리들 육신에 되살아 난다.

우리들의 생존권을 스스로 찾아야겠다. 우리들의 등 뒤에는 공동 운명체인 전국의 농민과 우리의 참다운 형제인 근로자의 불타는 눈길이 지켜보고 있다.

생존권을 되찾으려는 우리의 발걸음은 민중의 뜻이며, 역사의 의지이며 민족의 순순한 이념이다.

 

단기 4310년 11월 21일

 

녹두장군 위령제에서

 

출처: 김남주, ≪조국은 하나다≫, 남풍, 1988, pp. 170-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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