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신년사를 대신하여> 비국민의 ‘비정상의 정상화’ ―‘소통·불통’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적 억압의 강화의 문제다!

채만수|소장




I

참으로 재밌다! ‘비정상의 정상화’란 소리가 최근 들어 부쩍 자주 저들 극우의 입에 오르더니, 마침내 박근혜 대통령 각하님께서 직접 그것을 자신의 정권의 금년 목표로, 아니 꿈도 야무지게 향후 3년의 목표로 삼겠다고 초들고 나섰다.

각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본즉, 6일 ‘신년 구상 발표 및 기자회견’에서 왈: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세워 “우리 사회에 만연한 비정상적 관행을 정상화하는 개혁을 통해서 기초가 튼튼한 경제를 만들겠습니다”(!) 운운.

비밀경찰 국정원과 군, 경찰을, 그리고 극우언론을 대대적으로 동원한 부정선거를 통해서 그야말로 비정상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그와 그 패거리들이, 오죽하면 여기저기에서 공공연히 ‘바뀐애 정권’ 퇴진, ‘댓통령(댓글 대통령)’ 퇴진을 요구받고 있는 그와 그 패거리들이, 제 주제에는 두 눈 꼭 감고, “우리 사회에 만연한 비정상적 관행을 정상화” 운운하며 왈왈대고 있으니, 도둑이 매를 들어도 유분수지, 어처구니없다 못해 참으로 재미있지 않은가!



II

그러나, 어처구니없다 못해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저들뿐인가?

결코 아니다. 어처구니없다 못해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저들의 행태를 ‘비판’한답시고 나서고 있는 ‘진보적’ 언론, ‘진보적’ 논객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이들 ‘진보적·비판적’ 언론과 논객들은 어처구니없다 못해 참으로 고약하게도 대중의 정치의식을 오도·마비시키고 있다!

대통령 각하님의 예의 ‘기자회견’ 극(劇)에 대하여 이른바 ‘진보적’인 혹은 ‘중도적’인 언론들이 가장 힘주어 ‘비판’한 것은 대체로 “불통을 확인했다”는 것이었다.

불통! 소통 없는 불통!―실로 이는 박근혜 및 그 정권의 행태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의 언어 중의 하나이다. 이른바 ‘진보적’인 언론과 그 논객들이 선도해왔고, 그리하여 이제는, ‘진보적’·‘중도적’인 언론들과 그 논객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진보적’ 그리고 ‘중도적’인 대중 속에서도 광범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박근혜 및 그 정권의 행태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의 언어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이는 심지어 극우언론의 한 모퉁이, 극우논객의 일부에서조차 ‘비판’해 마지않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만큼 그러한 ‘비판’에 대한 공감대가 널리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우선, 이 한국사회에서 이른바 ‘중도’, 그러니까 ‘중도언론’이니, ‘중도적 지식인’이니, ‘중도적 정치인’이니 하는 존재들의 정치적 색깔은 도대체 무엇일까?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의 모두(冒頭)에서 이렇게 말한다.


집권하고 있는 경쟁자로부터 공산주의적이라고 비방 받지 않은 야당이 어디에 있으며, 보다 진보적인 반대자나 반동적인 경쟁자에게 공산주의라는 낙인을 찍는 비난을 되받아 던지지 않은 야당이 어디에 있는가?1)


실로 말 그대로 아닌가? 이 나라, 이 사회에서, 소위 ‘진보’는 그만두고, 비(非)극우언론, 비극우정치인이나 비극우정당, 비극우지식인, 비극우노동자·시민단체치고 저들 극우로부터 ‘종북·좌빨’이라는 비난, 그것도 맹비난을 받지 않은 존재가 있는가? 그만큼 이 나라, 이 사회에는 ‘종북·좌빨’이라는 유령이 활개를 치며 배회하고 있다.

그런데도 또한 이 사회에는 극우와 비극우의 틈을 비집고 이른바 ‘중도언론’이니, ‘중도적 지식인’이니, ‘중도적 정치인’이니 하고 불리는 것들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 ‘중도’의 색깔은?

그것은 당연히 유사(類似) 비극우, 즉 근(近)극우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 사회의 ‘진보적·비판적’ 언론과 논객들, 지식인들은 “박근혜 (혹은 박근혜 정권)은 국민과 소통하지 않는다”, “불통이다”는 ‘비판’을 저들 ‘중도’와, 그리고 나아가서는 저들 극우의 일부와도 공유·공감하고 있다. 도대체 저들이 왜 그렇게 공감하고 나서는가 하는 데에 대한 아무런 자성적(自省的) 문제의식 없이 공유·공감하고 있다. 아니, 자성적 문제의식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러한 ‘비판’을 선도하고 있는 데에서 보람·자부심까지 느끼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니 어처구니없다 못해 참으로 재미있는 게 아닌가?

여기에서 우리는, 그러한 ‘비판’을 선도하는 ‘진보적·비판적’ 언론과 논객들, 지식인들의 색깔까지야 아니더라도, 그러한 ‘비판’의 색깔, 그 사회적 기능은 준엄하게 묻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비판’이란 것은 사실은, 비판이 아니라, 비판적인 노동자·인민 대중의 정치의식·사회의식을 오도하고 마비시키는 사이비 비판, 몽혼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저들 소위 ‘중도’와 극우의 일부가 그러한 비판 아닌 비판에 공감하고 나서는 것도 실은 저들이 본능적으로든 반성적(反省的) 사고를 통해서든 그 ‘비판’이 사실은 대중을 오도하고 마비시키는 사이비 비판이요 몽혼제임을 알고 그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III

“소통이 없다”느니, “불통이다”느니 하는, 언뜻 그럴듯한 ‘비판’의 색깔은 반(反)노동자적이요, 반인민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대중에게 그럴듯하게 들리면 들릴수록, 그리하여 대중이 그렇게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그것은 더욱 반노동자적이요, 반인민적이다.

왜냐?

그것은 바로 지난번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저들 극우본당은 속칭 대박을 쳤고, 그 주변의 야당과 무심결에 들러리 노릇을 했던 ‘노동자 후보들’, ‘진보적’ 정치조직들은 쪽박을 찼던 이른바 ‘국민대통합’이니 ‘경제민주화’니 하는 대중 사기적(詐欺的) 구호·담론과 그 전제를 같이하는 담론이기 때문이고, 그 연장선상에서의 담론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통이 없다”느니, “불통이다”느니 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의 논조는 ‘소통을 통한 국민대통합’·‘소통을 통한 경제민주화’ 대신에 “불통이다”는 것 아닌가?!

그러면, “소통이 없다”느니, “불통이다”느니 하는 그럴듯한 ‘비판’과 ‘국민대통합’이니 ‘경제민주화’니 하는 대중 기만적 구호·담론 사이의 공통의 전제, 공통의 기반(基盤)은 무엇인가?

누차 얘기하고 강조했지만,2) 그것은 몰계급적(沒階級的)인 사회인식, 몰계급적인 사회관·국가관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사회, 이 국가는 크게 착취·억압당하고 있는 노동자·근로인민과 착취·억압하고 있는 자본가(·지주)계급으로 분열되어 있다. 그리고 착취 자본가계급 내부 역시 다수의 착취·수탈·억압당하고 있는 영세·중소 자본가(·지주) 계층과 착취·수탈·억압하고 있는 대·독점자본가 계급으로 분열되어 있다.3) 그런데 이렇게 분열되어 착취·수탈·억압하고 있고 착취·수탈·억압당하고 있는 계급들 사이에 어찌 ‘대통합’, ‘경제민주화’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한 사회에서는, ‘비정상’이니, ‘정상’이니 하는 저들의 어법을 빌려 말하자면, 그들 계급 간의 억압과 저항, 격렬한 대립·투쟁이 논리적으로도 실제로도 정상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 극우본당은 대중을 세뇌·기만하기 위하여 ‘국민대통합’이니 ‘경제민주화’니 하는 사기극을 벌였고, 부르주아 야당은 물론 언필칭 ‘노동자 후보’라는 사람과 그 배후의 집단들마저 그 장단에 합창하고 어릿광대춤을 춰댄 것이 지난 총선과 대선의 실상이었다.

그런데도 오늘날 언필칭 진보적이고 비판적이라는 언론과 논객들이 극우본당 박근혜 정권에 대한 비판이랍시고 “국민과 소통이 없다”느니, “불통이다”느니 하고 있으니, 즉, 말장난을 통해 마치 이른바 ‘국민대통합’·‘경제민주화’를 해야 하고 해낼 수 있다는 듯이 입을 모으고 있으니, 어찌 어처구니없다 못해 재미있지 아니한가?! 어찌 반노동자적·반인민적이지 아니한가?!

문제는 ‘소통·불통’이 아니라 계급적 분열, 착취와 피착취, 억압과 피억압이다. 따라서 ‘비정상적인’ 몰계급적 사고를 계급적·과학적 사고로 바로잡는 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상의, 사회의식·정치의식상의 ‘비정상의 정상화’이다.



IV

‘국민대통합’이란 게 대중기만, 대중사기에 불과하다고 말했지만,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지만, ‘국민’이란 말은 사실은 이의적(二義的)이다. 법률적 의미, 법률적 의제(擬制)로는 그것은 어떤 나라, 국가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 하나하나 혹은 그 모두를 의미한다. 그러나 정치적, 사회·경제적으로는 그것은 지배계급과 그 성원, 그리고 부차적으로는 그들에 종사(從仕)하는 군상들이다. 이 정치적, 사회·경제적 의미의 국민, 그 중에서도 특히 지배계급과 그 성원이야말로 현실적인 국민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이때 노동자들을 위시한 피착취·피지배 근로인민은 물론 비(非)국민이다. 실제로 지배계급, 그 성원으로서의 저들 국민은 누군가에게서 자신들의 이해에 대립적인 주장, 자신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소리를 들으면, 으레 그 사람(들)을 향해서 “도대체 어느 나라 국민이냐”고 묻지 않는가? 즉, 결코 자신들의 국민이 아니라고, 비국민이라고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실제로 저들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정치적 대표자들이 ‘국민대통합’ 운운한다든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4) 등등을 운운할 때, 그들은 ‘국민’이란 말의 이 이의적 의미를 교활하게 활용하여 정치적, 사회·경제적 의미의 비국민으로서의 ‘국민’을 기만하고, 그럼으로써 자신들 국민의 이익을 꾀하는 것이다. 지난 총선과 대선에서 ‘국민대통합’ 선풍을 선도했던 박근혜 댓통령 각하님의, 예의 ‘기자회견’ 극에서의 발언은 이와 관련하여 아주 시사적이다. 보도를 보자. 그의 발언을 악의적으로 왜곡 보도할 이유·동기가 없을 게 분명한 극우 ≪조선일보≫의 보도를 인용해보자면, 우선


박근혜 대통령은 6일 신년구상 기자회견에서 자신을 둘러싼 ‘불통’ 논란에 대해 “진정한 소통이 무엇이냐”며 “적당한 수용이나 타협은 소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작심한 듯 불통 논란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박 대통령은 “소통을 둘러싼 여러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소통의 의미가 단순한 기계적 만남이라든지 국민의 이익에 반하는 주장이라도 적당히 수용하거나 타협하는 것이라면 그건 소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5)


그렇다. “진정한 소통이 무엇이냐”며 댓통령 각하님께서 “이날 작심한 듯 불통 논란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며 명확히 한 것은 우선, “적당한 수용이나 타협은 소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극히 중요한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부정직한 침묵으로 넘어간 것, 즉 명확히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있는 것은, 누구의 주장을 적당히 수용할 수 없으며, 누구와 타협할 수 없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가면서도, 위에서 본 것처럼, 다음과 같이 못을 박는다.


소통의 의미가 단순한 기계적 만남이라든지 국민의 이익에 반하는 주장이라도 적당히 수용하거나 타협하는 것이라면 그건 소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국 “국민의 이익에 반하는 주장”을 “적당히 수용”할 수 없으며,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과 “타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 “국민의 이익에 반하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비(非)국민이며, 따라서 그러한 사람들은 ‘소통’의 대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는 어떤 사람들이 소통해서는 안 되는 그러한 비국민인가? 그 보도를 더 인용해보자면,


박 대통령은 최근의 철도노조 파업과 관련해서도 “정부가 ‘민영화 하는 것 아니다’ 누차 이야기해도 그 말을 들으려고도 안 하고 불법 파업을 이어가는데 이런 상황에서 직접 만나는 방식의 소통이 가능하겠느냐”며 “어떤 직역에 종사하는 분이라도 못 만날 이유 없고 앞으로 소통에 힘 쓰겠지만 불법이라든가 이런 행동에 대해서는 법과 원칙에 따라서 엄정하게 대응해나갈 것”이라고 했다.


결국 이번의 철도노조원들처럼 파업을 하는, 파업을 이어가는 노동자들이 소통할 수 없는 비국민의 대표적인 예라는 것이다.

독점자본가들, 재벌총수와 그 족벌들이 한 해에 수십 억, 수백 억, 수천 억을 긁어모아도 저들은 그것을, 찬탄할지언정, 비판하거나 매도하는 일은 결단코 없다. 바로 저들 국민의 이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양이면, 저들은 벌떼처럼 나서서 ‘국민의 이익을 해치는, 노동자들의6) 밥그릇 챙기기, 밥그릇 키우기’라고 매도한다. 결국, 노동자들의 이익은 결코 국민의 이익이 아니라 국민의 이익을 해치는 것이라는 것, 노동자들은 비국민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나선다.

그리하여 그러한 비국민, 비국민의 주장과는 타협하지 않겠으며 “법과 원칙에 따라서 엄정하게 대응해나갈 것”, 즉 엄혹하게 억압할 것임을 천명하고 나선 것이다.

물론 표독하기 그지없는 국민의 이러한 의지·선언에 당의(糖衣)를 입히기 위해서 이렇게, 즉 “정부가 ‘민영화 하는 것 아니다’ 누차 이야기해도 그 말을 들으려고도 안 하고 불법 파업을 이어가는데 이런 상황에서 직접 만나는 방식의 소통이 가능하겠느냐”고 표현한다.

여기에선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한다. 하나는 “정부가 ‘민영화 하는 것 아니다’ 누차 이야기해도” 노동자들이 “그 말을 들으려고도 안” 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이 ‘불법파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점, 즉 “정부가 ‘민영화 하는 것 아니다’ 누차 이야기해도” 노동자들이 “그 말을 들으려고도 안” 했다는 데에 대해서는 이것이 대답이다.―“누차고 지랄이고, 계급적 이해의 대립은 그만두더라도, 도대체 눈곱만큼이라도 믿을 만한 인간, 믿을 만한 집단의 이야기여야 믿지?! 다 그만두고, 비근하게 지난 대선과정에서 숱하게 남발한 달콤한 ‘공약’이 결국 사실상 모두 권력 장악을 위한 사기·기만이었음은 스스로들 고백하고 있는 대로 아닌가?!”

둘째 점, 즉 불법파업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구차한 법률 논쟁 다 집어치우고, 우선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당신들이 집권하고 있을 때, 그러니까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이 집권하고 있을 때 ‘불법’이라고 엄단했던 사건들, 즉 체포하고, 고문하고, 징역 살리고, 심지어 줄줄이 ‘처형’=학살했던 사건들이 오늘날 바로 그 국가, 그 국가의 사법부에 의해서 줄줄이 무죄판결되고 있지 않은가?! 당신들의 ‘불법’이란 당신들의 법률, 당신들의 사법부에 의하더라도 바로 그런 ‘불법’이 아니던가?!”

아무튼, 그러면 댓통령 각하님께서는 누구와 소통하는가?

지배 독점자본가들과는, 그들을 청와대로 모셔서는 물론, 전경련으로, 경총으로, 상공회의소로, 등등으로 찾아가시면서까지 환한 미소로 소통하신다는 것에 대해서는 새삼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은 그들도 익히 알고 있고, 우리 비국민들도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해왔다. 틈이 나면 현장을 방문해서 목소리를 경청하고 농어민, 소상공인, 중소기업인, 문화, 과학계 청년 지방 각계각층 국민과 대표와 만나 청와대에서 간담회를 하고, 현장에 가서도 간담회하고 소통해 왔다. … 국민이 보기엔 부족한 점이 있겠지만 더욱 경청하고 노력하겠다.7)


다름 아니라, 이렇게 지배계급 및 그 성원에 종사(從仕)하는 군상들과 소통하고 소통하려 한다고만 말씀하신다.

예의 ‘기자회견’ 극에서는, 그 모두(冒頭) 연설에서는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이라는 말씀이 거듭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모두(冒頭) 중의 모두의 다음과 같은 말씀은 누가 저들의 국민이고, 누가 저들의 비국민인가를 사실상 특히 명확히 하고 있다. 말씀인즉,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2014년 갑오년(甲午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 한해 여러분의 가정에 건강과 축복이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 새 정부가 출범한 후에 국민 여러분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기 위해 밤낮으로 고민하고, 최선을 다했던 한 해였습니다.

하지만 부족한 점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신뢰를 보내주신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신뢰를 보내주신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국민 여러분의 어려움[?: 인용자]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기 위해 밤낮으로 고민하고, 최선을 다했”으며, 그리하여 “국민 여러분”은 자신과 자신의 정권에 “신뢰를 보내주”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과연 댓통령 각하님과 그 정권은 누구를 위해서 일했으며, 누가 그들에게 신뢰를 보내주었는가?―바로 국내외 독점자본과 그들의 수족이다.

누가 그와 그 정권에 신뢰를 보내는 대신에 불신·부정(否定)하며 투쟁해왔는가?―바로 착취·억압당하고 있는 노동자·민중과 ‘시민들’이다.

이제 이른바 ‘소통·불통’이 문제가 아니라 계급적 분열과 착취·억압이 문제라는 것, 그 착취와 억압의 강화가 문제라는 것, 그리고 ‘비판’이랍시고 문제를 ‘소통·불통’으로 제기하는 것은 이 사회의 계급적 분열과 착취·억압을 은폐하는 것이며, 따라서 노동자·근로인민 대중을, 그 정치의식·사회의식을 오도하고 마비시키는 것이라는 것이 다소 분명해졌을 것이다.



V

그나저나, 앞에서도 말했지만, 지난 1년은 지지난해 총선과 대선을 거치면서 떠들어댔던 ‘화려한’(?) 공약들이 모두 대중을 기만하여 표를 얻기 위한 사기, 헛소리였음을 스스로 입증해준 한 해였다. 그 때문에 각하님께서 예의 ‘기자회견’ 극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말들을 내뱉었든 그다지 신경 쓸 일이 아니지만, 그가 “비정상적인 것들”의 첫 예, 그리하여 ‘정상화’하려는 첫 예로 들고 있는 것을 심심풀이 땅콩 삼아 잠깐 곱씹어보자면, 왈:


그동안 우리 사회에 비정상적인 것들이 너무나 많이 쌓여왔습니다. 원전비리만 해도 그렇게 문제가 많았는데, 몇십 년 동안 국민들의 안전을 도외시한 채 그대로 방치해왔습니다.

원전비리에서 보듯이 부품의 시험성적서를 위조했는데도 그대로 설치해서 국민 안전을 크게 저해하고, 지난 여름 무더위에 국민들에게 얼마나 큰 피해와 고통을 주었습니까.

또 코레일 사례에서 드러났듯이 많은 공공기관에서 효율성과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방만 경영과 고용세습까지 오랜 기간 이루어져왔습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개혁은 역대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추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또다시 그 전철을 되풀이해서 국민들에게 부담을 지우고, 국가발전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번 철도개혁을 시작으로 올해 공공부문의 정상화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입니다.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있지만, “역대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추진했지만 실패했”던 “철도개혁을 시작으로 올해 공공부문의 정상화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라는 것이 요지다. 결국 공공부문의 ‘민영화’, 즉 사유화를 밀어붙이겠다는 의지의 천명이다. 결국은 그것을 선언하기 위해서 “원전비리”가 어떻고, “공공기관에서 효율성과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방만 경영과 고용세습”이 어떻고 하며, 있는 사실, 없는 사실을 떠벌였던 것이다.

소위 ‘고용세습’ 같은 악의적으로 거두절미한 모략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 그리하여 “원전비리”나 “공공기관에서 효율성과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방만 경영”을 보자면, 그래, “그동안 우리 사회에” 그러한 “비정상적인 것들이 너무나 많이 쌓여”온 것도 사실이고, “원전비리만 해도 그렇게 문제가 많았는데, 몇 십 년 동안 국민들의 안전을 도외시한 채 그대로 방치해”온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서 공공기관의 ‘경쟁력’ 운운하는 것은 그 자체가 신자유주의적 치매의 표현이거니와, 공기업의 소위 “방만 경영”을 얘기할 때에도 물론 그것이 공기업의 사명으로서의 공공성에 충실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발생하고 누적되는 적자·‘부채’를 가리키는 것일 수는 없다. 결국 문제는 여기에서 지적되고 있는 ‘원전비리’ 같은, 공기업에, 나아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범죄·비리이다.

그런데, 그러한 범죄·비리들은 왜, 누구에 의해서 저질러지는가?

지면을 아끼기 위해서 ‘공공부문’ 혹은 ‘공기업’으로 좁혀서 얘기하면, 그 모든 비리·범죄는 명백히 그들 공공부문 혹은 공기업의 고황지질(膏肓之疾)인 관료주의의 필연적 표현형태의 하나이고, 따라서 그 모두가 그들 공기업의 상·하 간부들과 그들에 매수되거나 편승하는 그들의 앞잡이들에 의해서 저질러져 왔다. 바로 이승만 자유당 정권 시절엔 “빽”이라고 불렸고, 오늘날에는 “낙하산”이라고 불리는, 겉은 번드르르하나 속은 두억시니 같은 정상배와 그 수족들 말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공부문, 공기업의 각급 간부자리는 그 정권에 딸린 정상배에게 나눠주는 전리품이었고, 바로 그들 두억시니 정상배와 그 수족들이 온갖 비리·범죄, ‘방만 경영’의 장본인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리품의 분배는 비정상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박근혜 댓통령 각하님의 정권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닌 것은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대로이다.

그런데도 댓통령 각하님께서는, “국가발전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될 것”이니 “철도개혁”이니 운운하며, 구렁이 담 넘듯 하는 화법으로 그러한 비리·범죄가 마치 ‘민영화’·사유화를 반대하여 투쟁하는 노동자들 탓이라도 되는 듯한, 마치 그들 노동자들에 의해서 저질러지기라도 하는 듯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 그 파렴치 역시 어처구니없다 못해 재밌지 아니한가?

사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개혁은 역대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추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하는 얘기는, 표현만 다를 뿐, 사실은 “지금까지 처먹었던 놈들을 몰아내고 이제는 우리가 처잡수시겠습니다” 하는 의지의 선언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지를 가장 목청 높여 외쳤던 게 지금 댓통령 각하님의 아버님 대통령 각하님이셨던 박정희와 김종필 일당이었다. 5·16 군사‘혁명’ 때 그들은 내질렀다. “구악(舊惡)을 일소하고”(!) 어쩌구 허구 말이다. 물론 불과 수개월이 채 안 되어 시중엔 왁자했다. ― “신악(新惡)이 구악(舊惡)을 뺨친다!” “신악이 구악을 뺨친다!” “신악이 구악을 …” … ― 실제로, 예컨대 저 박정희·김종필 일가, 그 일가붙이들, 그 패거리들의 거만(鉅萬)의 부(富)를 보라!

아무튼 저들 일당 다음에는 전두환·노태우 일당의 “사회정의”가 어떻고, “숙정”이 어떻고. 그리고 그 다음 김영삼 정권에 오면 ‘문민정부’스럽게 점잖게 ‘개혁’이 어떻고. 그리고, 그리고 그렇게 면면히 이어져 왔다.

한편, 당면 현안인 ‘철도 민영화’ 문제에 대해서도 보자.

저들은 수서발 KTX를 운영할 회사의 설립이 ‘절대 민영화를 위한 게 아니다’라고 강변하고 있지만, 그것이 파렴치한 거짓말임은, 주지하는 것처럼, 자신들 내부 문건들에 의해서도 널리 폭로되어온 대로이다.8)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그 ‘민영화’, 즉 사유화 작업에 대한 철도노동자들의, 나아가 범시민·대중의 투쟁과 저항이 완강한 것이다.

그런데, 한편에서 부정선거에 의한 비정상적인 집권으로 대중의 강력한 퇴진 압력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권은 자신들에 대한 대중의 정치적 반대투쟁을 더욱 자극할 게 뻔한 철도의 ‘민영화’·사유화 작업을 ‘개혁’이란 이름으로 서둘러 밀어붙이고 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제2의 ‘유신체제’ 확립을 서두르기 위한 의도적 도발이라는 추측도 일부에 있는 모양이지만, 그러한 추측은 너무나 협소한 국내적·정치주의적 시각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소견으로는 하나의 이유로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다름 아니라, 어딘가로부터 거역할 수 없는 ‘오다(order)’가 없고서야 저렇게 무리해서 당장 밀어붙일 이유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국내에는 물론 서슬 퍼런 저 권력집단에 그런 ‘오다’를 내릴 세력이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답은 역시 뻔하다.―제국주의! 미 제국주의! 즉, 제국주의 독점자본과 그 이익 대표자들의 ‘오다’!

실제로 저들은 사실상 ‘그렇다’고 자백하고 있다. ‘당신들이 주장하는 대로 정말 민영화가 아니라면, 그것을 입법으로 매듭짓자’는 요구에, “그것은 한미 FTA 위반”이라고 응수함으로써 말이다.

주목하자. 이것이 진실이고 달리 설명할 수 없다면, 문제는 ‘민영화’·사유화를 훨씬 넘어서 실로 이 나라의 주권의 문제이고, 국체의 문제, 성격의 문제라는 것을!



VI

자, 이제 화제를 바꿔서, 저들이 ‘비정상의 정상화’ 운운할 때 그 진의는 무엇일까? 그리고 왜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일까? 그러니까, ‘2개년’이나 ‘4개년’, 혹은 ‘5개년’이나 ‘7개년’ 계획이 아니라 하필 ‘3개년’ 계획일까?

지난 1년 동안의 저들의 행태로부터도 유추할 수 있는 것이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들이 ‘비정상을 정상화’하겠다고 나설 때, 그것은, 이미 널리 회자되고 있는 것처럼, 제2의 ‘유신체제’, 즉 제2의 엄혹한 파쇼억압체제를 확립하겠다는 것이다. 저들 패거리들과 그들의 국민은 물론 그러한 체제, 그러한 체제의 확립이야말로 자신들의 착취·억압체제를 확고히 하고 영구화하는 길이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다. 현상(現狀, the state quo)의 유지야말로 자신들의 최대의 이익임을 알고 있는, 저들의 해외 상전들이야 물론,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노골적인 혹은 은밀한 물심양면의 지원, 방관, 쿠데타, 암살, 모살, 등등 이런저런 변화무쌍한 패(牌)들을 손안에 쥐고 상황의 추이를, 계급투쟁의 추이를 예의주시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제2의 ‘유신체제’를 확립하려는 것도, 그러한 체제의 확립이 자신들 국민의 착취·억압체제를 확고히 하고 영구화하는 길이라고 타산하고 믿는 것도 물론 저들의 주관일 뿐이다. 객관적으로는, 현재의 조건에서 과연 그러한 체제가 확립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 자체부터 근거가 의문이려니와, 설령 그러한 체제가 어찌어찌 확립된다고 하더라도 그 체제는 조그만 불씨만 튀어도, 조그만 타격만 가해도 폭발해버릴 임계상태(臨界狀態) 혹은 임계상황(臨界狀況)을 조성하는 것일 뿐이다. 계급의식·정치의식·사회의식 있는 대자적(對自的) 비국민을 몰살하다시피 했던 비극의 일대 전쟁을 겪은 지 10년 혹은 20년 내외밖에 안 되었던 4·50여 년 전과 지금은 무엇보다도 피착취·피억압 인민의 정치적 의식, 역량이 현격하게 다르기 때문이고, 국제정세 또한 현격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승자가 언제나 유달리 독차지하다시피 해온 전리품, 저들의 상투적인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파이가 그 동안 자본주의적 생산의 가히 비약적인 발전으로 엄청나게 커진 만큼, 지배계급 내 분파들 간의 정치투쟁도 4·50여 년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격렬해져 있고, 팽팽해져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조건 속에서 지금 저들 일당은 ‘경제혁신 3개년 계획’ 운운하며, 4·50여 년 전에도 박정희 일당이 그것을 건설하기까지 10년이 넘게 걸렸던 그 운명적 성채(城砦)를, ‘3개년’ 내에, 하물며 ‘3개년’ 내에 쌓겠다고 설치고 있다!

왜 그렇게 서두를까?

그것은, 내놓고 쿠데타를 할 수 없는 바에야 5년 단임제 헌법하에서 이제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것밖에 없다고 타산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부정선거를 통해서 권력을 장악한 비정상을 분쇄하려는 대중의 투쟁을, 즉 정상(正常)을 서둘러 억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몰려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진부하기 그지없는 말이지만, 역시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했던가?

실제로 지난 1년 동안의 박근혜 정권의 족적은 박정희 정권이 즐겨 애용했던 비열하고 가혹했던 그 수단·방식들을 모방한 비국민 공격, 저항·투쟁하는 피착취·피억압 노동자·민중에 대한 공격을 통해서 밀려닥치는 정치적 위기, 퇴진 압력을 제압하고 동시에 제2의 ‘유신체제’를 확립해가려는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공격, 혹은 투쟁·대립의 중심에는 당연히 착취와 피착취, 억압과 피억압이라는 계급문제가, 그러나 주로 과거엔 어설프게 ‘용공’ 문제로 포장되었었으나 지금은 보다 쎄련되게 ‘종북·좌빨’의 문제로 포장되어 있는 계급문제가 있다.9) NLL 즉 ‘북방한계선’을 둘러싼 요란스럽던 정치적 기만과 공방, 이른바 ‘이석기 내란 예비·음모’ 사건, 대북 긴장 고조화,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세칭 ‘역사 전쟁’, 노동자·농민에 대한 엄혹한 탄압, 떠들썩한 ‘통일 대박’·‘통일 대비’·‘통일 주도’ 담론, 등등.

그러나 비국민, 즉 노동자·민중의 정치·사회의식, 정치적 투쟁, 전반적 정치적 역량은 그 규모와 질 양 측면에서 모두, 커다란 불균형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4·50년 전의 그것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성장해 있다. 과거에 “용공!”, “빨갱이!”라는 겁박에 주눅이 들 대로 들어 꼼짝달싹 못하던 노동자·민중, 그런 노동자·민중이 이미 아니다. “종북·좌빨”이라는 겁박엔 오히려 여러 형태의 조롱으로 답하고 있는 노동자·민중이다. 그리하여, 여러 요인 때문에 아직 대대적으로 폭발하고 있지는 않지만, 노동자·민중의 투쟁이 여기저기에서 탄압을 뚫고 끈질기고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투쟁 속에서 노동자·민중의 정치의식·사회의식이 새롭게 계발되고, 강고해져 가는 것은 새삼 두말할 나위도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저들 극우 파쇼는 효과적으로 겁박·탄압할 수단과 방법을 상실하면서 궁지에 몰려가고 있는 것 역시 새삼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특히 예컨대, 국가 정보기관을 동원한 부정선거를 통해 집권했다는 정치적 비판·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필시 회심의 카드로 던졌을 이른바 ‘이석기 내란 예비·음모’ 사건이나 그와 짝을 이루는 통합진보당 해산 청구사건을 보라. 박정희 시대 같았으면 ‘내란·음모 사건’ 하면 필시 사회에, 그러니까 비국민인 노동자·민중에게 상당히 커다란 충격을 주는 겁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사람들은, 사실상 ‘피의자’ 당사자들과 그 가족들까지도, 겁박당하여 주눅이 들긴커녕, 비웃으며 폭로·조롱하며 도전하고 있지 않은가? “웃기네! 사기다!” 하고 말이다.

이러한 비웃음과 조롱, 도전은 소위 사법부의 판결이 어떻게 나든 변함이 없을 것이다. 사법부의 이른바 ‘독립성’이란 것이 사실은 권력에의 그 종속성을 가리려는 엷은 베일에 불과하다는 것을 대중이 이미 경험적으로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번 ‘내란 예비·음모’ 조작 사건은 저들이 던지는 회심의 카드가 더 이상 정치적 효과를 낼 수 없을 만큼 이미 노동자·민중의 정치의식이 성장해 있음을 확인하는, 바로 비국민 노동자·민중의 회심의 기회였다.

또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이른바 ‘역사 전쟁’은 어떤가?

‘국정교과서 체제’를 추진하겠다는 둥, 아직도 집요하게 매달리고 있긴 하지만, ‘역사 전쟁’ 역시 일단은 저들 극우 파쇼 진영의 ‘완패’로 끝났다. 말하자면 사필귀정인데, 이 나라, 이 사회의 역사적, 법률적, 이데올로기적 조건을 보면 기존의 교과서들 역시 필시 ‘우익적’일 수밖에 없을 터인데, 그러한 교과서들을 ‘좌편향’, 심지어 ‘종북·좌빨적’이라고 매도하며 역사를, 즉 현대사를 왜곡·날조해도 지나치게 왜곡·날조하려 들고 있으니, ‘완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그 승패가 아니라, 왜 저들은 그토록 집요하게 이 ‘역사 전쟁’에 매달리는가 하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다. 자세히 얘기할 수 있는 계제도, 조건도 아니기 때문에 극히 간단하게만 답하자면, 그것은 이 나라, 이 사회에 헌법 위의 국가보안법이 필요한 이유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즉, 그것은 이 나라, 그리고 남과 북에서의 현대사의 진실, 즉 그 계급투쟁의 진실, 그 내용과 그 전개 양태를 은폐하고 왜곡해야 할 절실한 필요성 때문이다. 물론, 저들이 추구하는 제2의 ‘유신체제’를 확립하고(?) 안정화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은폐와 왜곡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그 때문에 저들은 일단의 완패에도 결코 승복하지 않고 ‘한국사 국정교과서’ 체제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최근 갑자기 요란을 떨고 있는 ‘통일 소동’.―1월 6일 예의 ‘기자회견’ 극에서 “올해 국정 운영에 있어 또 하나의 핵심과제는 한반도 통일시대의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니, “통일은 대박”이니 운운하며 풍선을 불어 띄우더니, 불과 3일 후에는 “통일 헌법 만든다”10)고 수선을 떤다. 다름 아니라 ‘통일 헌법’이니 ‘통일주체국민회의’니 하며 요란하게 사기를 쳤던 1972년 유신 당시 소동의 애처로운 희극적 재판(再版)이요, 광대극이다. 그야말로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아니 희극적 비극으로!?

아무튼 이상(以上)이 댓통령 각하님의 ‘기자회견’ 극과 그 패거리들, 그리고 그 국민들의 최근의 동향·행태를 통해서 대략 본 저들의 ‘비정상의 정상화’의 목표이고, 그 소동이다. 요약하자면, 저들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의 비국민인 노동자·인민이 자신의 권익을 주장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투쟁하는 조그마한 정치적 권리라도 누리는 정치적·사회적 상태,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비정상이며, 노동자·인민을 절대적으로 제압하여 그들을 철저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무권리 상태에 억압해두는 것, 그러한 극단적 파쇼 억압체제를 확립하고 유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상(理想)·목표로서의 정상인 것이다.



VII

우리 ― 저들의 비국민 ― 노동자·민중의 ‘비정상의 정상화’는 당연히 저들 착취·억압자들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면 무엇이 노동자·민중의 정상과 비정상이며, 그 정상화인가?

노동자·민중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해방을 위해서 착취·지배의 자본가계급과, 그 체제와 투쟁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투쟁이 지금처럼 지지부진하고 분산적인 것은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즉 정상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비정상이다.

맑스와 엥겔스가 지적했듯이,11) 어느 계급사회에서나 그러한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 자본가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지배 이데올로기인 것은, 특히 독점자본주의 사회에서 독점자본가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지배이데올로기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정상’이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의 선진분자들조차, 예컨대, ‘국민대통합’이 어떻고 ‘경제민주화’가 어떻고 ‘사회적 기업’·‘사회적 경제’가 어떻고, 혹은 비판이랍시고 ‘소통’이 어떻고 ‘불통’이 어떻고 하며 떠드는 얼치기 진보적 지식인들의 기만적인 부르주아적·소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에 휘둘리고, 그리하여 노동자·근로인민 대중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및 소부르주아 허위 이데올로기의 지배하에 방치해두는 것은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즉 정상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비정상이다. 노동자 선진분자들은 물론 가능한 한 최대의 노동자·근로인민 대중까지도 노동자계급 자신의 과학과 사상·이념으로 무장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정상이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정치적 참모부, 즉 혁명적 정당을 갖지 못하도록 지배 부르주아계급이 온갖 수단과 책동을 다 동원하는 것은 ‘정상’, 물론 부르주아계급 독재하의 ‘정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노동자계급이 현실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참모부, 즉 혁명적 정당을 갖지 못한 것은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즉 정상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비정상이다.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해방을 위해서 투쟁하는 것은 당연히 정상이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의 선진분자들이 협소한 노동자주의, 경제주의에 갇혀 범근로인민의 이익을 옹호하여 투쟁하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 것, “언제나 민주주의 정당들 간의 제휴와 협력을 위해 노력하지”12) 않는 것은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즉 정상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비정상이다. 등등.

언제라도 그렇지만, 저들 극우 파쇼 패거리들이 자신들의 ‘비정상의 정상화’, 즉 제2의 ‘유신체제’의 확립을 서두르고 있는 지금 저들의 비국민인 노동자·민중이, 그 중에서도 특히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비정상의 정상화’를 위해 극력 분투해야 하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긴급한 시대적 과제이다.

박근혜 정권 1년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부정선거를 통하여 집권하여 엄혹한 억압체제를 확립하려는 패거리 및 그 국민과, 그 부정선거의 책임을 묻고 그러한 정권을 퇴진시키려는 비국민으로서의 노동자·민중 간의 투쟁이었다. 이 투쟁은 시간이 갈수록 가열되며 저들 극우 파쇼 패거리들을 궁지로 몰았다. 그리고 그럴수록 저들 패거리들은 정치적 분위기의 전반적 반전을 위하여 ‘내란 예비·음모’ 사건을 날조한다든지, 국정원 등의 부정선거의 내막·실상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자신의 정권의 검찰총장과 수사팀장을 찍어내고 징계하는 등의 비열한 수단·흑선전에 매달렸는데, 이 모두가 사실은 저들을 더욱더 궁지와 위기로 몰아갔다.

공공부문 철도의 민영화, 즉 사유화를 반대하는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이 터져 나온 건 그러한 와중에서였다. 물론 그간의 무기력을 고려한 조심스러운 파업, 부르주아 국가가 강요하는 일체의 법률적 요건, 법률적 절차를 준수한 ‘부분 파업’이었다. 그런데 그 파업의 한 가운데에서 박근혜 정권은 대량의 노동자들을 ‘직위해제’했고, 엿 먹어란 듯이 수서발 KTX 운영회사에 ‘면허’를 발급하였으며, 노동조합의 주요간부들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하여 민주노총 본부를 무장경찰로 유린했다. 그리고 마침내 22일 만에 파업은 이렇다 할 ‘가시적 성과 없이’ 끝났다.

내심이야 어떤지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아무튼 저들은 ‘완승’을 거두었다는 듯이 기고만장이다. 보도에 의하면, 500여 명의 노동자를 해고 등 ‘중징계’하려 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번 파업을 접은 것으로 투쟁이 끝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고 ‘가시적 성과’가 없다고 해서 정말 성과가 없는 것도 아니다.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투쟁한 것 자체가, 그것도 기록적으로 22일 동안이나 파업하여 투쟁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자신감을 가진 것 자체가 성과이고, 공공부문 ‘민영화’·사유화 반대투쟁에 대한 광범한 민중의 지지를 확보·확인한 것도 성과이며, 그러한 기초 위에서 그 파업 대중, 지지 대중의 요구가 공공연히 ‘박근혜 정권 퇴진’으로까지 나아간 것도 성과이다. 보도대로 저들이 정말 500여 명을 해고 등 중징계 처분한다면, 그것 역시 앞으로의 보다 차원을 달리하는 ‘성과’를 위한 초석의 하나가 되리라는 것도 자명하다.

마지막으로 ‘철도 민영화’ 반대 투쟁에 대한 민중의 광범하고 열렬한 지지를 주목해보자.

이 지지는 물론 한편에서는 박근혜 정권의 반민주성·반민중성 일반에 대한 민중의 불만·투쟁과 때마침 결합한 것이긴 하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파업의 요구가 임금인상이나 고용보장 등, 조합원들 자신의 ‘협소한’ 요구, 조합주의적인 요구에만 국한된 것이었어도 그러한 광범하고 열렬한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을까?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그 요구가 철도의 공공성 수호라는, 근로인민 일반의 이익과 민주주의의 수호에 부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지지가 가능했을 것이다.

여기에서의 교훈은 명확하다. 노동자가 자신들의 직접적인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투쟁하는 것은 당연지사이지만, 노동자계급이 노동자·근로인민 대중을 새로운 사회로 이끄는 영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의 직접적인 경제적 이익을 위한 투쟁을 넘어 근로인민 일반의 이익과 민주주의 일반을 위한 투쟁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러한 투쟁을 언제나 누구보다도 더욱 성실히 수행하고 선도함으로서 근로인민 일반의 신뢰와 지지를 획득해야만 한다는 것, 그래야만 노동자들 자신의 직접적인 경제적 이익도 보다 광범하게 확보할 수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주지하는 바이지만, 실제로 민주주의 없이는 노동자계급의 생활상태의 개선도, 그 해방도 있을 수 없다. 민주주의 일반을 확대·심화시킴으로써만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가능하다. 바로 팽두이숙(烹頭耳熟)의 리(理), 즉 머리를 삶으면 귀가 익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주로 국내의 정치정세를 중심으로 고찰해봤지만, 아무튼 정세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국내외의 요인과 그 추이로 보아 2014년은 저들 극우 파쇼 세력과 노동자·근로인민 간의 일대 격돌, 격전이, 그리하여 크건 작건 정세 전개상의 무언가 하나의 매듭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정세의 추이를 예의주시하면서 그 투쟁, 그 격전을 그것들이 노동자계급의 해방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것, 그리고 그 최종적인 승리를 담보할 정치의식과 정치적 조직을 획득하는 것, 그것이 지금 노동자계급의 선진분자들에게 부여된 시대적 사명이다. <노사과연>



1)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1권, 박종철출판사, 2010, (최인호 역) p. 399; MEW, Bd. 4, S. 461.



2) 특히, 채만수, “대통령 선거 후의 한국의 상황 ―노동자계급의 상태와 금후의 진로”, ≪정세와 노동≫ 제87호, 2013년 2월, pp. 112-22 참조.



3)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자본가와 지주는 대개 자본가로서 일체화되어 있고, 특히 대자본, 독점자본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4) 주지하는 바이지만, 애초 링컨(A. Lincoln)의 저 유명한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운운 자체가 위선적이고 기만적인 언사이지만, 한국에 와서는 그것이 더욱 위선적·기만적으로 왜곡되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of the nation, by the nation, for the nation)” 운운이 되었다. 물론 ‘인민’이란 어휘가 가진 일말의 계급·계층적 의미를 허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덧붙여 얘기하자면, 이 ‘인민’이란 단어는 ‘계급’이라는 단어와 더불어 오랫동안 사실상의 정치적 금지어였고, 오늘날에도 부분적으로는 정치적 기피어이다. 물론 그것이 현실적이든 가상적·상상적인 것이든, 정치적·‘이념적’ 억압 때문에! 그러나 가장 반북적이고, 가장 반(反)‘좌빨적’인 노래, ‘6.25의 노래’ 속에 “자~유~의 인민들 피를 흘린다. …”라고 쓰여 있는 것까지를 지울 재주는 저들에게 없다!



5) 박국희 기자, “朴대통령, 불통 논란에 ‘적당한 수용·타협은 소통 아니다’ 작심 반박”, 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1/06/2014010601298.html.



6) 저들은 물론 “귀족노동자들‘이라고 매도한다.



7) 같은 기사.



8) 비근한 예로, 노현웅·이정국 기자, “KTX 분리 ‘종착역은 철도민영화’ 문서로 확인”, ≪한겨레≫, 2014. 1. 7.을 보라.



9) 저 ‘종북’ 혹은 ‘종북주의’라는 규정의 ‘지적재산권’이, 다름 아니라, 과거엔 ‘사회당’ 및 ‘진보신당’의 상층지도부를 형성했었고 오늘날에는 ‘노동당’의 상층지도부를 구성하고 있는 주요 인사들에게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10) 2014년 1월 9일자 ≪조선일보≫ 제1면 머리기사의 제목.



11) ≪공산당 선언≫ 및 ≪독일 이데올로기≫ 참조.



12) ≪공산당 선언≫, MEW, Bd. 4, S. 493.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1개의 댓글

  • 복 많이 받으세요.
    정상/비정상을 보니, 비정상성에 대한 저항에서 정상성에 대한 저항으로 라는,
    조희연 교수의 책이 떠오르네요. 조희연 교수의 당시의 분석이, 꽤나 낙관적이었을 지도 몰겠네요.
    한편,
    정상성/비정상성 구분 자체에 회의를 갖는,
    다양한 소수자 연구들이 존재하는 이 때에, 정상성을 향한 투쟁이 필요한 이 현실을 우째 설명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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