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미래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배은주|회원

꿈을 꾸었다. 꿈에 나는 이제 막 열아홉에서 스물로 넘어가는 젊은이였다. 꿈의 나는 또래의 이성친구와 함께 무언가를 작당하고 있는지 생기가 넘쳐흘렀다. 푸릇푸릇한 청년의 활기가 절로 느껴졌다. 말이 없고 우울해 하던 내 젊은 날의 모습이 아닌, 발랄한 모습이 꿈에서도 맘에 들었다.

새해 첫 날 꿈이었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삼십 년 전 시절로 돌아간 꿈을 꾸다니! 최근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에 대한 나의 느낌이 반영된 걸까. 전 날 밤, 보신각에서 경찰들의 철통같은 경계를 뚫고, 기습시위를 벌인 ‘안녕들’에 대한 인상도 한 몫 한 것 같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보신각 앞에는 경찰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이 두려웠는지 깃발만 올려도 떼거리로 득달같이 달려와 깃발을 빼앗는가 하면, 몇몇 사람들이 구호만 외쳐도 몰려와 두세 겹으로 경찰장벽을 치고 십여 대의 카메라로 채증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젊은이들이 보란 듯이 “단결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라는 외침으로 새해를 열었으니, 그 모습이 자랑스러웠고 믿음직스러웠던 것이다. 또 모른다, 나는 한편으론 은연 중에 젊은 그들에게 나를 투사하였는지도. 그래서 그런 꿈을 꾸었는지도.

 며칠 전, 그들처럼 시절의 하수상함을 그냥 넘기지 못하고 이십대 젊은 시절을 불태웠던 친구를 아주 오랜만에 만났다. 얼마 만에 보는 얼굴인지, 그의 젊은 모습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의 검게 그을린 얼굴빛과 이마의 주름살, 조금은 더 넓어진 어깨 등이 다소 낯설었다. 그 역시 사뭇 어색해 했다. 지금은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는 친구 박. 정말 얼마 만이던가. 기억도 아득했다.

 박은 1980년대 초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전문군인을 양성하는 그곳의 강제적인 규율에 그는 적응하지 못했다. 자주 정신착란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은 국가가 원하는 충직한 군인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내 그곳을 그만두었다. 그는 재수를 한 후 그 다음해에 고려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이른바 명문대에 좋은 성적으로 입학한 박은 희망차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였다. 그의 부친은 독립유공자였기에 그는 등록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오로지 전공공부에만 몰두해 20대에 경제학박사가 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나는 그가 그의 계획을 어렵지 않게 성취해 낼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똑똑했으며 이루고자 하는 것에 대한 집념도 강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꿈은 1년도 되지 않아 완전히 바뀌었다. 시대는 80년대. 그가 올곧게 경제학 공부에 몰두하도록 시대는 그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당시 대학가는 전두환 군사정권의 탄압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의 기치를 올리고 있었던 때였다. 최류탄 가스가 매캐하게 지면을 뒤덮었고 운동권 학생들은 ‘빨간모자’ 부대의 감찰대상이었고, 아무도 모르게 어디론가 끌려가곤 했던 시절이었다. 박은 지배계급과 타협하는 속류경제학에 일찌감치 희망을 버리고 역사의 부름에 응답했다. 그는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조직에 몸을 담았고 민주화투쟁의 선봉에 섰다. 그는 1985년도 11월에 새마을운동본부를 점거하여 구속되어, 87년 7월에 이루어진 특별사면으로 나오기까지 약 20개월 동안 징역살이를 했다. 그는 감옥에서도 형광등을 깨서 씹어 삼키고, 배를 그으며 이른바 ‘빵투’를 하고, 부당한 판결에 항의, 재판장에서 고무신을 던지고 유인물을 뿌려 법정모독죄로 6개월 형이 추가되기도 했다. 그렇게 그는 불의를 못 참는 ‘꼴통’이었다.

 그가 새마을운동본부를 점거하고 징역을 살고 난 이후로 나는 그를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단지 그의 절친한 후배한테서 간간히 소식을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이런저런 직장을 옮겨 다녔고, 영악하지도 못 해 돈도 잘 벌지도 못하고, 민주화보상금까지도 부인에게 다 주고 이혼을 했다는 소식들… 크고 작은 일들이 시간 안에 녹아 있는 것이야 당연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왜 홀연히 운동을 접었는지, 그것이 무엇보다 궁금했다. 조심스럽게 그에게 에둘러 물었다. “참, 대학은 졸업했던가?” 그는 내 물음에 담담했다.

 그는 87년 6월 민주화항쟁 이후 7월의 특별사면을 받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박은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해서 조직화에 더 힘을 쓰려고 했다 한다. 하지만 얼마 후 당시 쏘련을 비롯해 동구 사회주의국가가 차례로 붕괴되면서 그가 속해 있던 조직의 지도부는 해체되고 자연스럽게 조직 또한 와해되면서, 더 이상 설 곳이 없어졌다고 했다. 저항과 투쟁으로 이십대 청춘을 보낸 그에게 세상이 준 선물은 너무 가혹했다. 세상의 배신에 그는 패배감과 상실감을 쉽게 극복하지 못했고,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이유를 찾지 못했다. 사회에 나왔지만, ‘빨간’ 이력이 붙어있는 그는 변변한 직장을 잡기가 어려웠다. 운동권 선배의 소개로 중소기업을 전전했으며 독서실을 운영하며 겨우 생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약 4년 전 선배와 함께 베트남에서 사업을 시작했고 이제야 가까스로 자리를 잡았다고 말했다.

 그는 후배에게서 나에 대한 소식을 들었는지 내게 첫마디 인사로 이렇게 물었다.

“아니, 요즘 맑스를 공부하신다고?”

“응. ≪자본론≫하고 ≪맑스-엥겔스선집≫ 세미나 하고 있어.”

“대단하시네…”

“힘들어. 머리가 단단해져 가지고. 하하… 그건 그렇고. 그래, 베트남에선 무슨 사업을 하는 거지? 살기는 괜찮은가?”

그는 석탄을 태우고 남은 재를 이용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전에는 그것을 전량 다 수몰했는데 이제는 그것을 재활용하고 있으니 나름 친환경적인 사업이 아니겠냐며 하는 일에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난 이제 온정자본주의자가 되었지…”

그는 몇 년 만에 밟는 한국 땅에서 때마침 봉기한 철도노조파업투쟁과 ‘안녕들하십니까’의 물결을 마주하고 자신의 젊은 시간들을 반추했을까, 그의 목소리에는 쓸쓸함과 허무함이 묻어있었다.

그는 투자대비 변곡점에 이르려면 아직도 2-3년 시간이 더 필요하지만, 지금까지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연관된 부문에도 투자해 사업을 확장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베트남 입장에서 보면 우리 회사가 외국기업이잖아. 자국기업보다는 1.5배 정도 임금을 더 주지. 베트남 사람들, 성실해. 일도 잘 하고…”

 그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짤막짤막하게 끊어 대답했다. 그에게서 예전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그의 말대로 그는 다른 기업보다는 조금 더 임금을 주고, 최대한 노동자의 편의를 봐주며 사업체를 운영하는, 그야말로 온정자본주의자가 되어, 베트남에서 ‘착한 자본주의’를 실현(?)하고 있었다. 그의 말끝에서 나는 최근 한 일간지에 실린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의 인터뷰기사 중 한 대목이 떠올랐다. ‘사업을 하다 보면 나중에는 정의고 나발이고 삶의 목적도 다 부수적이 된다,’¹⁾

 20세기 사회주의국가의 붕괴라는 역사적 사건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쉽게(단순한 그의 설명만으로는 이렇게 받아들여졌다!) 운동의 힘을 상실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나로서는 사실 잘 이해되지 않았다. 혁명적 투쟁에 앞장섰던 그가 무기력한 소시민의 삶을 택하고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간 것이, 사회주의 노선의 부재였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여전히 의문이었으나 더 이상 물어볼 수 없었다. 그는 그때 함께 운동했던, 지금 이름만 대면 누구나 잘 아는 정치인들을 들며 두어 마디 덧붙였다.

“어쨌거나, 걔들, 지금 다 한 자리씩 하고 있잖아, 새누리당이든 민주당이든. 나는 이 꼴이고…”

 친구 박을 ‘후일담소설’로 소개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곁에는 이렇게 개인적인 투쟁의 역사를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들이 동구권 사회주의국가의 붕괴 이후 시나브로 무기력해지고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점,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와해해 버린 점 등을 기억하고 싶었다. 나는 친구 박이 자신을 배신하고 역사의 도도한 명령을 등지고 세상의 흐름에 편승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본다.

미천한 경험이지만, 나는 지금도 민중의 분노와 저항을 단결시키는 제대로 된 조직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물론 정치적 활동의 자유를 침해받는 정세에서 조직과 개인의 조우는 이미 일정부분 차단되고 있는 현실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민중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정치적 판단을 유보하게 만들어서도, 부초 같은 인생을 살게 해서도 안 되지 않겠는가.

 친구 박은 오래전에 사회주의를 꿈꾸었다가 중도에 그 길에서 돌아섰다. 반면 나는 이제, 무지한 젊은 날들을 보내고 출산과 육아를 끝내고 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이 길에 들어섰다. 그의 선택이 자본주의의 승리를 인정해서였는지 혹은 어쩔 수 없어서였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이 광포한 자본주의는 반드시 망할 것이고, 반드시 망해야 하며, 망할 수밖에 없는 체제라고 생각했기에 이 길을 선택했다.

과연 누구의 판단이 옳을 것인가. 미래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미래는 결국,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완성해 나가는 것이 아니던가.

 삼십 년 후 새해를 맞이하는 아침에도, 나는 올해처럼 시간을 거꾸로 돌려, 지금 오늘의 나를 만나는 꿈을 꾸고 싶다. 그때엔 어떤 일기를 쓰게 될까. 이런 일기를 쓰는 날이 과연 실현되어 있을까.

 ‘꿈을 꾸었다. 꿈에 나는 50대 초반이었고, 공산주의사회 건설에 매진한 동지를 인터뷰하러 가고 있었다.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빠뜨릴 수 없는 일이다. 엄혹한 시절이었는데도 꿈에 나타난 남녀노소 모두 활력이 넘쳐흘렀다. 그들 모두는 이미 그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후에는 오랜만에 유 동지가 만든 옛날 영화를 보며 추억에 잠겨보는 것도 좋겠다. 아니면 와인이나 한 잔 하면서 이웃 친구들이랑 수다나 풀어 볼까. 날이 풀려서인지 수다가 방언처럼 터지고 있다.’ <노사과연>


1) “이진순의 열림”—“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 ≪한겨레신문≫, 2014.1.4. 토요판. http://www.hani.co.kr/arti/SERIES/503/61826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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