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특집] 위기의 세계경제에 대하여

 

 

채만수 │ 소장

 

 

 

지난 해 말부터 유난히 여기저기에서 ‘경기 하강’에 대해서 설왕설래하더니, 마침내 지난 9월 20일 정부는 한국경제가 지난 2017년 9월 이래 장기간의 하강국면에 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IMF・세계은행 총회에 다녀온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10월 22일, “세계경제 상황에 대한 국제사회의 위기감을 체감했다”며, “경기 하강을 막기 위해 가용 정책을 총동원해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주 52시간 근로제 확대에 따른 기업 부담 최소화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다짐이 눈에 띈다. 거듭 “주 52시간 근무제의 보안”을 촉구한, 즉 노골적으로 거침없이 자본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시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의중을 반영한 발언일 터이다. 부르주아 국가의 권력은 본래 자본의 것이니 물론 조금도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아무튼 이러한 모든 움직임은, 한국경제뿐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경제 전체가 지금 다시금 위기로 빠져들고 있는 데에 대한 자본의 인식, 그 위기의식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이 위기의 부담을 최대한 노동자들에게 전가하겠다는, 언제나 있어 왔던 방침의 표현이다.

그런데 한편,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지난 2007/2008년의 공황 이후, 특히 2008년 가을의 리먼브라더스 파산과 2010년/2011년 남부 유럽국가들의 재정위기 이후, 예전에는 그저 잠복되어 있던 경향이 이제는 명확한 새로운 동향으로 나타나 있다.

 

 

인디플레이션 기조의 세계경제

 

다름 아니라, 인디플레이션(indeflation), 즉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의 동시 진행이라고 하는, 일견 (형용)모순적이지만, 그 성질상 사실은 전혀 모순적이지도, 형용모순적이지도 않은 현상이 그것인데, 이 인디플레이션은 현재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기조로까지 되어 있다.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의 동시 진행, 즉 인디플레이션이 전혀 모순적이지도, 형용모순적이지도 않은 이유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인플레이션은 전적으로 지폐의 감가(減價)에 의한 물가의 명목상의 상승, 즉 금량(金量)의 증가 없는 명목상의 물가상승임에 비해서, 디플레이션은 과잉생산과 그에 따른 수요부족에 의한 물가의 실질적인 하락, 즉 화폐=금의 가치의 상대적 상승에 의한 물가의 하락, 보다 적은 금량으로 표현되는 물가의 하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가의 명목적 인상과 그 심층에서의 실질적 하락의 동시 진행은 그 양자의 본질상 논리적으로 전혀 모순적이지 않은 것이다.

2008년 리먼브라더스 파산 이후 그리고 2010/2011년 아일랜드를 포함한 남부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 이후 미국과 유럽연합 등의 중앙은행들이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 QE)”라는 신조어까지 유행시키면서, 당시 미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이던 벤 버냉키(Ben S. Bernanke)의 표현대로, 그야말로 “헬리콥터에서 달러를 뿌리듯”, 엄청난 자금을 살포하기 시작했을 때, 경제(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누구나 고율의 급성 혹은 악성 인플레이션을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의 상황 전개는, 예상을 크게 빗나갔을 뿐 아니라, “인플레이션을 2%까지 끌어 올리는 것”이 자본주의 주요 국가들의 주요 경제정책 목표의 하나로 되어 왔다. 게다가 근자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디플레이션과의 싸움’이 저들의 당면정책으로까지 되어 있다.

그리고 최근에 다시 경제위기가 꿈틀대자, 2008년 이후의 상황이 이렇게 전개된 것에 힘입어, 미국의 정계・자본시장의 일부에서는, “화폐를 발행하는 국가는 화폐를 아무리 발행해도 문제가 없다”는 소위 “현대 화폐론(Modern Monetary Theory; MMT)”까지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상황이다.

우선 “화폐를 발행하는 국가는 화폐를 아무리 …” 운운에 대해서부터 간단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저들이 그렇게 말할 때 그 “화폐”란 물론 지폐 내지 불환의, 현대 중앙은행권을 가리킬 터인데, “화폐”란 용어의 그러한 사용법이 아무리 현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지배적이고 공인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주류 경제학을 자처하는 현대 부르주아 경제학의 비과학성을 광고할 뿐이다. “화폐”라는 용어의 그러한 사용법의 기초에는, 오늘날에는 “금은 더 이상 화폐가 아니다”라는, 저 유명한 이른바 ‘금폐화론(金廢貨論)’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들 금폐화론자들은 흔히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닉슨의, 1971년 8월 15일 특별성명에 의한 ‘금과 달러의 교환 정지’를 그 근거로 내세우곤 한다. 정말 훌륭한 근거다!

왜냐하면, 애초 브레튼 우즈 협정에서 미국이 금과 달러의 교환을 보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 정부에 의한 금과 달러의 일방적인 교환정지 역시 사실은, ‘금만이 여전히 진정한 화폐’라는 미 제국주의의 본능적 인식의 표현이었던 것인데, 즉 금만이 진정한 화폐이기 때문에 그 유출을 거부한 것이 그 성명이었던 것인데, 그것을 거꾸로 ‘금은 이제 화폐가 아니다’는 근거로 내세우고 있으니 말이다.

눈을 씻고 봐도 세계 그 어느 나라에서도 금 태환은 실시되고 있지 않은데, ‘아직도 금만이 화폐라고 주장하는 것이냐’, ‘아직도 금 타령이냐’는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한다면, 동일한 인물이 설령 ‘그래, 과거 금태환제 하에서는 금이 화폐였다’고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역시 천박한 ‘화폐 국정론자(國定論者)’에 불과하다. 금은 상품교환의 발달과 함께 그 상품교환의 본성과 필요 때문에 역사 필연적으로, 말하자면, 저절로 화폐가 된 것이지, 국가가 법률로 그것을 화폐로 지정,1) 발권은행에 은행권의 태환을 강제했기 때문에 화폐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폐 혹은 은행권이 법률상 태환이 되고 안 되고는, 현재에는 금만이 여전히 화폐이고, 지폐나 은행권은 그것의 대리물일 뿐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바꾸지 못한다. 사실 지폐나 은행권의 태환성은 반드시 그 법률상의 태환성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법률에 의한, 은행권의 태환 강제는 단지 그 은행권의 가치감소를 저지하는 장치일 뿐이다. 맑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금과 은으로의 태환성은 …, 그 지폐가 법률적으로 태환할 수 있든 아니든, 금 혹은 은으로부터 그 명칭을 취하는 모든 지폐의 가치의 실질적인 척도이다. 명목가치는 단지 그림자로서 그 물체의 곁에 따라다닐 뿐이다. 그 양자가 일치하는지 여부는 지폐의 현실적 태환성(교환 가능성)이 입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명목가치 아래로의 실질가치의 저락(低落)이 감가(減價, Depreciation)다. [금・은과 지폐가: 인용자] 현실적으로 병존(竝存)하는 것, 서로 교환되는 것이 태환성이다. 태환할 수 없는 은행권들(Noten)의 경우, 그 태환성은, 은행의 창구(Kasse)에서가 아니라, 지폐와, 그 명칭을 지폐가 가지고 있는 금속화폐 사이의 매일 매일의 교환에서 입증된다.2) (강조는 인용자.)

 

법률에 의한 금태환제가 폐지되어 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금만이 화폐라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지폐, 따라서 또한 오늘날의 불환의 중앙은행권의 태환성에 대해서 새삼스러울 만큼 길게 얘기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오늘날 금폐화론, 즉 화폐국정설이 크게 위세를 떨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이 아무리 위세를 떨치더라도, 애초에 이 문제를 꺼내지 않을 수 없게 했던 “화폐를 발행하는 국가는 화폐를 아무리 …” 운운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국가나 국가의 은행인 중앙은행은 결코 ‘화폐’를 발행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대리물로서의 지폐, 통화를 발행할 뿐이다.

아무튼 오늘날에는 금만이 진정한 화폐이며, 지폐나 은행권은 그것의 대리물이라는 것을 이해해야만, 국가독점자본주의 시대의 화폐제도, 그리고 그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인플레이션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원인을 불문하고 모든 형태의 물가상승을 인플레이션이라고 주장하는 부르주아 비과학에 농락당하게 된다.

인플레이션은 결코, 부르주아 비과학이 늘상 떠드는 것과 같은 ‘물가상승’ 그 자체가 아니다. 오늘날에는 그 현실적 가능성은 사실상 전혀 없지만, 논리적으로, 만일 어딘가에서 거대한 노천금광이 발견되어 금 생산에서의 노동생산성이 다른 물건들의 생산에서의 노동생산성보다 월등히 증대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되면, 화폐 즉 금에 의한 상품들의 가치표현, 즉 상품들의 가격은 과거보다 더 많은 금량(金量)으로 표현되게 된다. 즉 그렇게 물가가 상승한다. 그러나 그러한 물가상승은 결코 인플레이션이 아니다. 그것은 물가의 실질적인 상승이다. 인플레이션이란, 상품들의 가격이 같은 금량으로, 혹은 심지어는 보다 적은 금량으로 표현되는데도, 지폐, 즉 오늘날에는 불환의 중앙은행권의 감가, 즉 가치감소 때문에3) 더 많은 지폐액으로 표현되는 물가현상이다. 즉, 그러한 명목상의 물가상승이다.

그리하여 아무튼 우리의 주제로 돌아오면, “양적 완화”라는 신조어까지 유행시키면서 엄청난 자금을 풀기 시작했을 때, 고율의 급성 혹은 악성 인플레이션을 예상했을 것이나, 그 후의 상황 전개는, 예상을 크게 빗나갔다고 앞에서 말했는데, 사실 이 발언에는 진실과 진실이 아닌 것이 뒤섞여 있다.

“인플레이션을 2%까지 끌어 올리는 것”이 목표라는, 중앙은행들이나 부르주아 언론・논객들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표면적 현상만을 관찰하자면, 예상이 크게 빗나갔다는 것은 진실인 것처럼 보인다. 나아가서, 예컨대, 특히 1970년대에 겪었던 것과 같은 그야말로 고율의 악성 인플레이션을 예상했다면, 그 예상이 크게 빗나갔다는 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부르주아적 비과학적 개념이 아니라 과학적인 인플레이션 개념에 입각해서 그 간의 물가 동향을 고찰하면, 표면에 나타난 것과는 달리 고율의 인플레이션이 진행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4) 비근하게, ‘금 가격’, 즉, 금이 화폐이기 때문에 금 가격이란 본래 불합리한 표현이지만, 금 태환제가 폐지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개념인, 불환통화에 의한 금의 가치의 표현인 ‘금 가격’의 변화를 보면, 2008년엔 1온스 당 평균 US$871.96이었는데,5) 2019년 8월, 9월의 월간 평균은 모두 US$1,500.-를 넘고 있다.6) 이는 2008년 평균의 금내용을 갖는 달러라면 US$871.96로 표현되어야 할 어떤 상품의 가격이 2019년 8월이나 9월 현재의 달러로는 US$1,500.- 이상으로 표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2009년 이래 달러의 금내용이 70% 이상 감가되었다는 것을, 즉 그만큼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년 평균 5%의 인플레이션이다. 이 년 평균 5%로 ‘금 가격’이 계속 상승하면, 2008년으로부터 100년 후인 2107년의 1온스 당 ‘금 가격’은 US$114,662.72, 즉 2008년의 약 131.5배가 된다. (16세기 100년 동안에 유럽의 물가가 약 4배 오른 것을 가리켜 경제사는 “가격혁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상기하면, 무척 흥미로울 것이다!)

이는 물론, 예컨대, 1960년대나 1970년대 등에 자본주의 세계가 겪은 엄청난 악성 인플레이션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다. 그러나 사실 실제의 인플레이션률은 이보다 훨씬 더 높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간의 생산력 발전이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되는 일부 전통적 산업부문들, 예컨대, 농업이나 어업 등은 그저 그렇다 하더라도, 제4차 산업혁명이니, AI(인공지능)니 운운하며 자동화・무인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기타 공업부문 일반에서는, 금 생산부문에 비해서, 그 생산력 상승이, 통계화・수치화할 수는 없더라도, 월등히 높았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인정될 수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지폐의 감가가 없었다면, 물가 일반은 그 생산력 발전의 차이만큼 내려갔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2008년 위기 이후의 이른바 양적 완화, 즉 국채 및 시중의 유가증권 매입에 의한 중앙은행의 자금살포는, 미국의 그것도, 유럽의 그것도, 일본이나 기타 국가들의 그것도, 이구동성으로 “사상 유례없는”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닐 만큼 엄청난 량이었고, 또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급성 혹은 악성 인플레이션을 예상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년 2%까지 인플레이션을 끌어올리는 것”이 그들 국가의 정책목표가 되어야 했던 원인은 무엇일까?

대략 세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맨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엄청난 자금이 살포되긴 했지만, 그 자금들은, 주로 투기적 금융자본의 파산을 막기 위한 것이어서, 대중의 소득으로는 물론 전혀, 그리고 생산자본・상업자본 등으로도 별로 흘러들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투입자금의 아주 적은 부분만이 ‘유통영역’에 주입되고, 그리하여 ‘낮은’ 인플레이션으로 나타난 것이다. 남부유럽 국가들에서의 재정위기의 구제 역시 마찬가지여서 구제자금이 결국은 투기적 국제 금융자본의 구제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특히 그리스 등 ‘구제금융’을 받은 국가들 내에서는 이를 둘러싼 계급적 갈등・투쟁이 격화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좌익 포퓰리즘의 득세로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아무튼 이렇게 엄청난 자금이 투기적 자본의 파산을 막기 위해서, 그것도 “제로 금리” 운운하는 ‘초저금리’로 주로 금융부문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그 투입의 결과가, 한편에서는 예상을 빗나간 ‘낮은’ 인플레이션으로 나타났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이른바 자산 가격, 즉 주식・채권 등의 유가증권과 대도시 부동산 가격의 폭등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러한 이른바 ‘자산 가격’의 폭등은, 부르주아 논객들도 널리 인정하는 바이지만, “빈부격차”를 더욱 극심하게 확대시켰다.

게다가 이른바 ‘양적 완화’, 즉 막대한 자금을 풀어 투기자본의 파산을 막는 정책은, 공황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일체의 국가독점자본주의적 정책이 그렇듯이,7) 투기를 더욱 증폭시키는 그 자체의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 다시금 시작되고 있는 ‘경기 하강’, 즉 공황이 미구에 본격화될 때, 과연 어떤 상황이 전개될 것인지 적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8)

투기・금융 자본의 이러한 거대화와 그에 따른 금융위기의 폭발은 자본주의의 부후성(腐朽性)이 이미 극에 달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두 번째로는, 고도의 생산성 증대에 의한 상품의 저렴화, 즉 생산과 재생산과정 일반의 자동화・무인화의 급속한 진전에 의한 상품의 저렴화 역시 인플레이션의 앙진을 저지한 주요 요인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자동화・무인화의 속도는 산업별로, 그리고 독점자본과 비독점자본, 중・소・영세 자본 간에 무척 다른 속도로 진전되고 있어서, 특히 지배적인 독점자본 부문 및 정보・통신 부분에서는 가히 비약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반면에, 비독점 자본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더디게 진행되고 있지만, 이러한 속도의 차이는 인플레이션의 앙진을 저지하는 요인으로서는 정도의 차이로서만 작용하고 있을 뿐이다.

참고로, 이 속도의 차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만 간단히 언급하자면, 그것은 엄청난 규모의 독점이윤의 획득・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 제4차 산업혁명9)이니, AI(인공지능)니 하고 떠들어대는 생산과 재생산 일반의 자동화・무인화가 격화시키고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의 모순, 따라서 그 역사적 의의는 절(節)을 바꾸어 뒤에서 논의하자.

마지막으로는, 만성적 과잉생산과 그에 따른 만성적 수요부족에 의한 시장가격의 하락 압력, 즉 디플레이션 또한 엄청난 지폐의 투입에도 불구한 ‘낮은’ 인플레이션의 한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수요부족과 그에 따라 물가현상의 심층에서 진행되고 있는 디플레이션은 당연히, 엄청난 자금이 투입되었지만, 그것이 대중의 소득증대로는 나타나지 않은 사실을 반영한다. 이는, 예컨대, 1930년대 미국에서의 ‘뉴딜’, 즉, 1933년 4월 금태환 정지 후의 대대적인 공공토목공사를 통한 자금의 살포와 그에 따른 수요 확대, 인플레이션과도 비교되는 현상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만성적 과잉생산과 소비부족에 의한 이러한 디플레이션은, 이른바 제4차 산업 혁명 혹은 인공지능 등에 의한 생산의 자동화・무인화에 따른 고용의 상대적, 그리고 많은 경우 심지어 절대적 축소와 그에 수반한 고용의 질의 악화, 즉 저임금 비정규직화의 확산의 반영이기도 하다. 그런데 고용의 축소와 그에 수반한 고용의 질의 악화에 따른 대중의 이 소비제약이라는 현상은, 자본주의적 생산이라는 조건 속에서는 이른바 제4차 산업 혁명 혹은 인공지능 등에 의한 생산의 자동화・무인화가 가속화될수록 그와 더불어 더욱 더 격화될 수밖에 없는 성질의 현상이다. 최근에 유난히 “D의 공포”니, “디플레이션”이니 하는 소리가 시끄러운 것도, 그 기초에는 물론 주기적인 과잉생산과 그 공황으로의 폭발이라는 산업순환의 국면이 있지만, 급속한 생산의 자동화・무인화 또한 주요한 요인의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고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과학기술혁명의 고도화에 따른 고용의 축소와 그에 따른 고용의 질의 악화, 그리고 다시 그에 따른 대중의 소비의 제약이 디플레이션의 요인의 하나라면, 이 과학기술혁명의 고도화는 다시 전반적 과잉생산과 그에 따른 경쟁의 격화에 의해서 가속화되고 있다. 그리하여 과잉생산이 경쟁의 격화를, 경쟁의 격화가 과학기술혁명의 고도화를, 과학기술혁명의 고도화가 고용의 축소・악화와 그에 따른 소비의 제약을, 소비의 제약이 다시 과잉생산에 의한 경쟁의 격화를, … 하는 식으로 악순환과 모순이 격화되어 가고 있다.

최근 제4차 산업 혁명 혹은 인공지능 등으로 고조되고 있는 생산과 재생산 일반의 급속한 자동화・무인화를 고려할 때, 즉 자본주의적 생산이라는 조건 속에서의 그것을 고려할 때, 이 악순환은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현 시기 생산력 혁명의 특징

 

현 시기에 문자 그대로 비약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생산력 혁명으로서의 이른바 ‘제4차 산업혁명’・‘AI(인공지능) 혁명’은 그 성격과 규모, 속도 등 모든 면에서 가히 획기적이다. 그리고 그 핵심적 특징은, 누구의 눈에나 명백한 것처럼, ‘전면적인 자동화’・‘무인생산’을 향한 돌진이다! 그리고 이 전면적인 자동화・무인화는, 공장에서만, 즉 직접적 생산과정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컨대, “로봇이 커피 내리고, 디저트 장식하고, 칵테일 만들고… 외식업계에 로봇 도입 붐”10) 운운하는 데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재생산과정 전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야말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생산력 혁명, 즉 ‘제4차 산업혁명’이니 ‘AI 혁명’이니 하고 불리는 과학기술의 고도화가 과거의 산업혁명들과 구별되는 결정적인 특징이다.

사실상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예들을 제시할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우선 현재 투쟁이 한창 진행 중인 한국도로공사의 통행료 수납원의 예부터 보자.

 

자동화・무인화 바람에 밀려 일자리를 잃는 노동자가 늘고 있다. 소규모 영세한 산업군은 ‘악’ 소리도 못 내고 사라졌다. 한국은 이미 ‘예견된 미래’로 접어들었다.

기술로 인한 노동자 떠밀림 현상은 4차 산업혁명 대세론에 눌려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했다. 더구나 자동화의 첫 번째 타깃은 이미 불완전 고용에 시달리던 이른바 하위 노동자들로 한국 산업구조에서 이들의 실직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었다. 조용히 확산되던 노동자 떠밀림 문제는 한국도로공사 톨게이트 수납원의 정규직 전환 문제를 계기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도로공사가 톨게이트 수납인력을 직접고용하라는 법원의 판단을 거부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자동화 시스템’이었다. 도공은 “수납시스템(하이패스) 자동화로 수납인력을 고용할 수 없다”며 되레 한국 사회에 “하이패스 시대에 수납원은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대해 경제계는 “수납원의 도태는 기술 진보로 인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수납원은 필요 없다”고 답했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정부의 뜻을 물었다. 노동계는 정부가 전환의 속도와 방향을 조절해줄 것을 기대했다. 청와대의 답은 기대와 달랐다. 이호승 청와대 경제수석은 … “도로공사 톨게이트 노조의 수납원들이 (투쟁을) 하지만, 톨게이트 수납원이 없어지는 직업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느냐”고 말했다.11)

 

“청와대의 답은”, “톨게이트 수납원이 없어지는 직업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느냐”!

다음엔, 역시 자본의 착취욕・축적욕과 이데올로기를 가장 잘 대표하는 극우 신문이 보도하고 있는 네덜란드의 한 항만을 보자.

 

“유럽 최대 항만인 네덜란드 로테르담 항구는 영화 ‘트랜스포머’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지난달 찾은 로테르담항(港)의 마스블락테(Maasvlakte) 2터미널엔 대형 크레인이 컨테이너 수백 개를 일사불란하게 옮기고 있었다.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전기로 움직이는 크레인과 화물차의 기계음만 들릴 뿐 고요하다. 북해(北海)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만 스친다.

거대한 철제 크레인은 항구에 정박한 화물선에 실린 컨테이너를 성큼 들어 올려 항만에 차곡차곡 내려놓았다. 크레인의 키는 144m. 50층 건물 높이의 거대한 철제 기계는 묵묵한 하인처럼 배에서 땅으로 컨테이너를 하나씩 옮겼다. 봐주는 사람도 없는데 크레인이 움직여도 괜찮은 건가?물어볼 사람조차 없다.(강조는 인용자.)

이곳 로테르담 항구는 세계 최초로 무인 자동화 하역 시스템을 도입(2015년)한 곳이다. 사람의 지시를 받아 크레인이 배에서 컨테이너를 내려놓는 대신 인공지능(AI)이 알아서 ‘교통정리’를 하고 초대형 로봇(크레인)이 작업을 완료한다. 이런 무인 스마트 항구를 만들기 위한 준비에 15년이 걸렸다고 한다. 국내외 전문가를 모아 추진 전략을 세우고 노조와 길게 대화했다.

영・호남을 합친 정도 크기의 땅에 인구 1700만 명 수준인 네덜란드가 강소국(强小國) 입지를 굳힌 저력을 나는 이 항구에서 볼 수 있었다. 키워드는 AI를 활용한 치밀한 무인화, 그리고 그 변화를 가능케 한 치열한 인간 설득이었다. ….”12)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봐주는 사람도 없는데 크레인이 움직여도 괜찮은 건가?’ 물어볼 사람조차 없”을 만큼 항만이 완전히 자동화・무인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외 아닌가?

물론 현재로서는 극단적인 예외이다. 그리고 이렇게 완전히 자동화・무인화되어 있는 항만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재생산과정 일반에서의 자동화・무인화의 “사실상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예들을 제시할 수 있다”는 서술 자체가 사실은 그것들이 아직은 보편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외 아닌가’ 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조차도, 자본주의적 생산의 특징을 운운하지 않더라도, 그리고 “모든 것은 처음이 어렵다”는 금언을 구태여 들먹이지 않더라도, 현재의 기세・속도로 봐서, 그들 자동화・무인화의 보편화가 시간의 문제, 단지 시간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즉 생산과 재생산과정 일반의 전면적 자동화・무인화가 현재와 같은 기세・속도로 진행된다면, 그 사회적 결과는 무엇일까?

공동체적으로 조직된 사회라면, 맑스가 ≪자본론≫이나 ≪고타강령 비판≫ 등에서 전개하고 있는 것과 같은, “자유의 왕국”, 즉 인간이 생존을 위해 노동해야 하는 “필연의 왕국”을 넘어선 사회, 노동은 필연이 아니고 생활의 욕구의 일부이며, 인간으로서 타고난 자질을 맘껏 발전시킬 수 있는 활동이 되는 사회일 것이다.

그러나 생산수단이 소수에 의해서 사유, 즉 독점되어 있고, 무산자인 노동자는 자본에 의해서 고용되어야만 호구(糊口)할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일자리를 잃거나 찾을 수 없는 노동자들에게 그 생산력의 혁명, 즉 그러한 전면적인 자동화・무인화는 재앙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미 그렇게 재앙이 되고 있다.

자본에게는 그것은, 역시 무엇보다도 우선은 거대한 공황으로서, 따라서 역시 재앙으로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이미 그렇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면, 결국은 사회혁명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근래의 추세를 고려하면, 그 “결국”이 사실은 조만간의 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임금노동자의 수가 상대적으로는 감소함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는 증가한다고 하는 것은, 단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요구임에 불과하다. 이 생산양식에서는, 노동력을 하루에 12시간에서 15시간 일하게 하는 것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면, 이미 노동력은 과잉이 된다. 노동자의 절대수를 줄이는, 즉 국민 전체로 하여금 실제로 보다 적은 시간에 총생산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생산력의 발전은 혁명을 불러일으킬 것인바, 왜냐하면, 그것은 인구의 다수를 용도폐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자본주의적 생산의 독특한 한계가 나타나고, 또 자본주의적 생산이 결코 생산력의 발전이나 부의 생산을 위한 절대적인 형태가 아니라, 오히려 일정한 시점에서 그 발전과 충돌하게 된다는 것이 나타난다. 부분적으로 이 충돌은 노동자 인구의 이런저런 부분이 지금까지의 취업양식으로는 과잉으로 되는 주기적인 공항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한계는 노동자들의 과잉시간이다. 사회가 획득하는 절대적인 과잉시간은 자본주의적 생산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생산력의 발전이 중요한 것은, 단지 그것이 노동자계급의 잉여노동시간을 늘리는 한에서이지, 그것이 물질적 생산을 위한 노동시간 일반을 줄이기 때문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대립 속에서 운동하는 것이다.”13)

 

여기에서 의문이 들지 모른다. ― 결국은 사회혁명을, 즉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의 종말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그 ‘제4차 산업혁명’・‘AI 혁명’, 다시 말하면, 재생산과정 일반의 전면적 자동화・무인화에 자본은 도대체 왜 미친 듯이 매달리는 것일까?

그렇다면, 앞에서 길게 인용한, 4월 3일자 ≪조선일보≫로 되돌아가 보자. 그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장황한 글줄기가 달려 있다:

 

무인 자동화는

선택 아닌 생존문제

15년 설득에 노조도 ‘OK’

무인 크레인이 컨테이너 내리면

자율주행 트럭이 알아서 운반

하역작업하는 시간 40% 줄고

인건비・연료비도 37% 절약

그럼 사람은 뭘하지? 순간 섬뜩

하지만 이미 ‘피할 수 없는 흐름” (강조는 인용자.)

 

바로 이렇게, “그럼 사람은 뭘하지?하고, 순간 섬뜩”해 하면서도, 자본에게 있어 “무인 자동화는 선택 아닌 생존문제”이고 “이미 ‘피할 수 없는 흐름’”인 것이다!

다름 아니라, “경쟁이 각 개별자본가 누구에게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내재하는 법칙을 외적인 강제법칙으로서 강요”14)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15년 설득에 노조도 ‘OK’” 운운하고 있는데, 이는 단지 두 가지를 말해줄 뿐이다. ― 하나는 해당 노조의 타락. 그리고 다른 하나는 경쟁 앞에서는 마치 자본과 노동이 운명공동체라는 식의, 자본과 그 언론의 기망. 하지만 깨어 있는 노동자들은 결코 그러한 기망에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한때 기망에 빠지는 후진의 노동자들도 이윽고, 그 ‘설득’이란 것이 사실은 고용을 대폭 축소하기 위한 자본의 계략에 불과했다는 것이 사실에 의해서 밝혀지고, 그에 따라 실업자로 전락함에 따라 결국엔 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시쳇말로, 공은 노동자계급에게 넘어 와 있다. ― 자본은 이미 그것이 죽음의 길인 줄 알면서도 ‘당장의’ 연명을 위해서 “무인 자동화는 선택 아닌 생존문제”이고 “이미 ‘피할 수 없는 흐름’”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고, 소부르주아지는, 역사와 경험이 입증하는 바와 같이, 착취자 즉 자본가계급과 피착취자 즉 노동자계급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그 계급적 성격상 변혁의 주체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잉여가치의 생산이야말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규정적 목적인데,15) 이 잉여가치는, 가치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아니 가치 그것의 일부이기 때문에, 오직 인간의 노동에 의해서만 생산된다. 그 때문에, 경쟁에 의해 강제되어서, 그리고 그 경쟁의 한 형태이긴 하지만, 선진적 기술을 채용함으로써 획득하는 특별잉여가치에 눈이 멀어서, 지금 자본이 경쟁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생산 및 재생산 일반의 전면적 자동화・무인화는 결국엔 잉여가치의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과는 물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전제로 하는 바의, 노동생산물의 가치로서의 생산, 즉 상품생산과도 결정적으로 충돌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생산력 혁명으로 미구에 불가피한 무산의 노동자계급에 의한 사회혁명,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의 폐지는 바로 이 충돌의 해결이다.

 

 

‘진보적’ 소부르주아 지식인들의 반동성

 

현재 급속히 보급되고 있는 생산 및 재생산 일반의 전면적 자동화・무인화는, 앞에서 본 것처럼, 자본과 극우 언론조차 “그럼 사람은 뭘 하지?” 하며 “섬뜩”함을 느끼게끔 하고 있다. 그런데 적잖은 수의 ‘진보적’ 소부르주아 지식인들은 그 앞에서, 그러한 섬뜩함을 느끼는 대신에, 사회혁명 없이, 즉 생산수단에 대한 현존의 자본의, 독점자본의 소유, 곧 사적소유를 공고히 유지한 채,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길을 모색하고, 그 유토피아를 대중에게 선전・설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감을 느끼고 있다.

이들 ‘진보적 지식인들’, 즉 소부르주아 진보 이데올로그들의 주의・주장을 잠깐 들어보자면, 그들은 대체로 소위 ‘복지국가’의 추억에 젖어 있다. 그리고는 그 추억을 기초로 영지(英智)를 발휘하여, 국가가, 즉 독점자본의 국가가 모든 사람에게 보장하는 소위 ‘기본소득’이라는 기막힌 유토피아를 구상, 그 유토피아를 실현하기 위해 대중을 분주히・헌신적으로 설득・조직하고 있다. ― 독점자본의 국가가 ‘기본소득’을 통해서 모든 국민에게 품위 있는 삶을 보장한다! 이 얼마나 황홀한 유토피아인가!

그런데 우선 저들은, 추억에 젖어 있을 뿐, 과거의 그 ‘복지국가’라는 것이 어떤 배경과 조건에 의해서 성립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그리고 그것이 왜 해체되어 왔는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저들은 혹시 저 ‘복지국가’가 기본적으로 박애주의적 인지(人智)・의지의 산물이며 발현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저토록 이른바 ‘기본소득’이라는 박애주의적 망상에 매달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1930년대 대공황과 제2차 대전을 계기로 주요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 형성된 이른바 ‘복지국가’ 체제는 박애주의적 인지・의지의 산물도 그 발현도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끝날 줄 모르는 대공황이라는 대재앙과 수천만의 인명을 도륙하는 제2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에 분노하여, 그리고 사회주의 쏘련의 발전에 자극받아 혁명적으로 진출하던 노동자계급을 회유, 그 혁명을 예방・저지하기 위한, 독점자본의 고육지계, 따라서 그 음흉한 계략이었을 뿐이었다.

이는, 다름 아니라, 그들 ‘복지국가’의 노동자계급이 1950년대 후반 이후 그 ‘복지국가’ 체제에 안주하자, 그리고 특히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해체되자, 저 박애주의적 독점자본가계급과 그 국가가 문제의 ‘복지국가’ 체제를 어떻게 해체해 왔는가를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저들 ‘진보적 지식인들’이 ‘기본소득’ 운운하며, 사실상 숙명적인 자본주의 영구번영론인 ‘개량’에 대한 열정에 매달리는 것은, 소부르주아로서의 그 계급적 체질을 차치하면, 특히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해체된 후 진한 청산주의가 이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들을 그러한 망상 속으로 몰아가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심화일로의 위기이고, 그에 대한 저들의 위기감이다. ‘기본소득’이라는 망상, 즉 독점자본의 국가에 노동자계급의 미래를 의탁할 수 있다는 저들의 망상은, 그러한 체제의 위기, 위기감에 대한, 특히 근래 급속히 전개되고 있는 재생산 과정 일반의 자동화・무인화에 따른 위기・위기감에 대한 저들 소부르주아 지식인들의 반동적 위안인 것이다.

그런데 적지 않은 수의 저들 ‘진보적 지식인들’은 위기 및 자신들의 위기감에 대한 소부르주아적 싸구려 위안을 오늘날 심지어 ‘맑스주의’ 등의 이름으로 노동자들에게 강매하려 들고 있다.

 

 

위기와 제국주의, 그리고 노동자계급

 

근래 우리는 ‘경기 하강’에 대한 설왕설래와 함께, ‘중-미 무역분쟁’이라든가, ‘미-유럽 무역분쟁’이라든가, ‘한-일 무역분쟁’ 등에 대한 보도・논의 등도 빈번히 접하고 있다. 세계경제에서의 그 두 나라의 압도적인 비중 때문에 ‘중-미 무역분쟁’이 특히 주요 관심사로 되어 있는데, 대개의 보도나 논의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중-미 무역분쟁’으로 생산규모가”, 혹은 “교역규모가” 얼마만큼 “축소되었다”는 식이다. 혹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독불장군 식의 퍼스낼리티와 그에 따른 즉흥적이고 포퓰리즘적인 정책들이, 예컨대, ‘중-미 무역분쟁’을 불러일으키고 있고, 그 때문에 영향을 받는 국가들의 생산규모나 국제 무역규모가 그렇게 축소되고 있다는 식이다.

그런데 그런 식의 논의・보도는 그들 분쟁과, 생산 혹은 교역의 규모 축소 간의 인과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그 인과관계를 실제와는 정반대로 설명하고 있다. 그들 분쟁이 생산과 교역을 축소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반대여서, 과잉생산과 그에 따른 시장의 부족, 그에 따른 생산 및 교역의 축소가 저들 분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즉, 이미 새로운 공황이 시작되고 있어서 독점자본들이 그들의 국가를 내세워 시장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고, 저들 분쟁은 그 쟁탈전의 형태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제국주의는 역사적으로 대공황을 어떻게 극복했으며, 극복하려 하는가를 주목해야 한다!

20세기 이래 제국주의가 대공황을 극복한 것은, 주지하다시피, 전쟁 ― 특히 제1차, 제2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이었다. 그리고 제국주의는 지금도 곳곳에서, 특히 ‘중・미 무역분쟁’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와, 석유자원에 대한 지배문제 때문에 진즉부터 크고 작은 전쟁이 빈발하고 있는 중동에서 전쟁의 혓바닥을 날름대고 있다.

게다가 2008년 9월에 리먼브라더스 파산이라는 대금융위기에서 그 절정에 달했던 2007/2008년 위기의 연장선상에서 2010/2011년에 발발한 재정위기를 계기로 득세하기 시작하여 근자에는 ‘난민문제’를 중심으로 극우적 광기로까지 발전하고 있는 유럽의 우익 포퓰리즘, 즉 파씨즘도 새로운 전쟁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유럽은 양차 대전의 최대의 피해지역이었기 때문에 제2차 대전 후 상대적으로 반극우적 분위기가 강했던 곳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오늘날 저렇게 극우적 광기가 득세하고 있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 바탕에 바로 경제위기・공황으로 표출되고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격화된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전쟁과 관련해서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첫째로는 제1, 제2차 대전의 참화를 통해서 인류가 다시는 그러한 대전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인류를 절멸시킬 수 있는 핵무기가 그러한 대전을 억제하고 있다는 슬픈 역설이다.

그러나 국지전들은 계속 벌어져 왔고, 벌어질 수 있으며, 그러다 보면 자칫 핵전쟁으로 비화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어떤 절대적 장치는 없다. ― 말하자면, 사실 인류는 자칫 인류 절멸을 초래할지도 모를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험 앞에서 노동자계급은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간단히만 얘기하자면, 무엇보다도 우선 조합주의・경제주의를 시급히 극복하고, 정치적 혁명성, 혁명적 정치조직을 획득해야 한다. ― 과거 ‘복지국가’ 체제에의 안주에서 체질화되다시피 한 조합주의・경제주의,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붕괴에 따른 좌절감・패배주의・무력감, 그리고 그 때문에 만연한 사상・이론적 혼란 등등, 여러 이유로 지금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혁명적 정당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세계적으로도 극소수이다. 이러한 상황을 시급히 극복해야 하고, 따라서 그것을 시급히 극복하려는 필사적인 의식적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이 과학을 재획득해야 하고, 그 재획득을 위한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 ― 사실은 야바위꾼들에 불과한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이 ‘맑스주의’ 등의 이름으로 강매하는 부르주아적・소부르주아적 비과학을 배격하고, 노동자계급의 과학을 재획득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종파주의로 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키면서 극좌적 언사로 노동자계급 속에 위장된 반공주의를 심고 있는, 독점자본의 위장된 도구들인 수많은 형태의 뜨로츠키주의와 이른바 ‘좌익 공산주의’ 조류들도 걷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자본이 고취하는 국가주의・애국주의・민족주의를 극복하고, 노동자 국제주의를 재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신식민지 사회의 해방・혁명은, 제국주의16) 및 그의 대리통치 세력인 신식민지 내의 토착 자본가계급과의 투쟁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바, 이 역시 몰계급적인 민족주의를 배격하고, 노동자 국제주의를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17)

그리고 노동자 국제연대의 관점에서, “코리안 인베스터스 아 브루탈!”을 외치고 있는, 동남아시아 노동자계급과의 연대는 당연히 한국 노동자계급의 영광스러운 의무다!

노사과연

 

 


 

1) 법률에 의해서 국가가 금을 화폐로 지정했기 때문에 금이 화폐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부르주아 경제(비과)학자들은, 화폐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부재, 즉 무지 때문에, 국가에 의한 도량표준의 확정, 즉 그 자체 화폐인 금이나 은의 일정량에 국가가 법률로 화폐명(貨幣名)을 부여하는 것을 국가가 화폐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2) MEGA2, II, 1.1, SS. 66, 69.; 김호균 역,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백의, 2000, pp. 109-109. 인용하면서, “명목가치 아래로의 실질가치의 저락(低落)이 감가(減價, Depreciation)다”라고 강조한 이유는, “Depreciation”을 김호균 교수가 “평가절하”로 잘못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가절하”란 국가의 법률상・행정상의 조치에 의한 지폐의 감가이기 때문이다.

 

3) 지폐의 이러한 가치감소는 유통에 필요한 금량, 즉 화폐량보다 더 많은 지폐, 즉 화폐의 대리물이 유통에 투입됨으로써 발생한다.

 

4) 이하에서는, 주로 자본주의 세계의 최강국이자 중심국인 미국의 달러, 물가를 중심으로 얘기하자.

 

5) <https://www.statista.com/statistics/268027/change-in-gold-price-since-1990/>

 

6) <https://www.indexmundi.com/commodities/?commodity=gold&months=60>

 

7) 참고로, 제2차 대전 후 한때나마 ‘수정자본주의’니. ‘케인즈주의 혁명’이니 하는 허위 이데올로기가 득세했던 것은, 제국주의 제2차 대전에 의한 엄청난 파괴와 살육 ‘덕택’이었다. 특히 서유럽과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생산시설들이 대대적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수천만 명이 무참하게 도륙당했기 때문에, 한 동안 과잉생산의 문제도, ‘과잉인구’, 즉 실업의 문제도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저들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은 ‘수정자본주의’니, ‘케인즈주의 혁명’이니 하며, 마치 국가독점자본주의적 정책에 의한 공황의 퇴치라도 되는 듯 찬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전쟁을 통해서 생산력을 배가한 미국의 경우에는 제2차 대전 이후에도 공황이 빈발했고, 38선을 중심으로 소규모 국지전으로 벌어지던 전쟁이 1950년에 전면전으로 확전된 것도 1949년에 미국에서 발발한 공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연구들도 없지 않다.

 

8) 사실 이미 지난 7월 8일에는 유럽경제의 견인차라는 독일의 최대은행 도이체방크(Deutsche Bank)가 경영위기로 18,000명의 감원과 €740억(약 98조 원)의 자산매각을 발표하고 나섰고, 9월 23일엔 190여 개의 호텔과 항공사를 운영하는, 세계 최고(最古) 178년 전통의 영국 여행사 토마스쿡(Thomas Cook)이 파산, 수십만 명의 여행객이 귀국을 못해 유럽 여러 나라가 자국민 긴급 귀국작전을 펴야 했던 소동도 벌어지긴 했지만….

 

9) 오늘날 널리 ‘제4차 산업혁명’ 운운하며 떠들고 있지만, 실은 그것은 과거에 ‘제3차 산업혁명’으로 불렸던, 1970년대 이래의 극소전자(ME) 혁명 및 디지털 혁명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고, 그 가속화・고도화다. 다만, 통상적인 용어법에 따라 여기에서도 ‘제4차 산업혁명’으로 부르기로 하자.

 

10) ≪조선일보≫, 2019. 10. 05.

 

11) 반기웅 기자, “‘없어질 직업’에 매달린 우리의 노동”, ≪경향신문≫(인터넷판) 2019. 10. 26. (<http://biz.khan.co.kr/khan_art_view.html?artid=201910261015001&code=920100>)

 

12) “AI가 크레인을 움직인다 … 로테르담 항구, 無人혁명”, ≪조선일보≫, 2019. 4. 3.

 

13) ≪자본론≫ 제3권, MEW, Bd. 25, S. 274.

 

14) ≪자본론≫ 제1권, MEW, Bd. 23, S. 618.; 채만수 역, ≪자본론≫ 제1권, 제4분책(근간), p. 977.

 

15) ≪자본론≫ 제1권, MEW, Bd. 23, S. 243.; 채만수 역, ≪자본론≫ 제1권, 제2분책, p. 381.

 

16) 이 제국주의와의 투쟁에서 제국주의 국가 내 노동자계급의 반제국주의 투쟁과의 연대 없는 승리는, 물론 절대적으로 그렇지는 않겠지만, 사실상 무망하거나, 극히 지난할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17)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논쟁적 논의는, 채만수, “‘현 시기 민족문제’의 본질과 통일운동, 그 주체와 투쟁대상에 대하여”, ≪정세와 노동≫ 제156호, 2019년 11월, 참조.

 

채만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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