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회원마당: 이 달의 역사] 계급성을 잃어버린 대한민국 노동조합의 역사, 그 뿌리를 찾아서―전평의 와해와 대한노총의 성장

 

오해영 | 회원

 

 

 

들어가며

 

전평의 와해. 그리고 대한노총에서 한국노총으로 이어지는 노동 운동의 역사에 대한 글을 써야 한다. 세상에… 한국 현대사를 망라하는 그런 총체적인 글을 내가 쓸 수 있을까? 한동안 부담감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이내 마음을 정리했다. 늘 <이 달의 역사>를 쓸 때마다 처음엔 의지가 불타올라 잘 써야지 하고 욕심을 내며 이 책 저 책 뒤적거리다 막상 쓰기 시작하면 나의 한계를 깨닫고 소박한 목표를 가지게 되는데, 이번에도 역시다. 이런 고민을 가까이에서 함께해 온 동지가 고 전성식 동지의 글1)을 추천해 주어 읽어 보았는데, 바로 내가 쓰고 싶었던 그런 총체적인 관점에서 노동 운동사를 망라한 아주 훌륭한 글로 다시금 전 동지에 대한 존경심이 일고 그리운 마음이 샘솟았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한번 찾아서 읽어 보시길 권장한다.

따라서 전체적인 노동 운동사는 전 동지의 글을 읽어 보는 것으로 갈음하고, 필자는 이번 호에서 미군정기 가장 강력한 노동조합이었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의 와해 과정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누구보다 앞장서 전평을 와해시키며 세력을 키워 나간 대한노총의 실체를 밝히고, 그 세력이 현재 어디로 계승되었는지를 다루고자 한다.

 

 

미군정, 강력한 노동조합 전평에 위기감 느끼다

 

해방 후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인 자본가가 소유했던 회사와 공장을 접수하고 자주 관리를 시작한다. 이는 당시 조선 노동자들에겐 당연한 권리로 인식되었고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시행되었으며, 건준이나 인민위원회의 방침에도 힘입어 촉진되었다. 또한 노동자들은 해방이라는 확대된 정치적 공간 속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는데,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45년 11월 5일 전평이 출범한다.2)

전평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이 결집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미군정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연합군 최고 사령부에 노동 정책 및 노동 문제 고문을 파견해 달라고 요구했고, 1946년 6월 2일 2명의 위원3)이 경성에 도착했다. 이들은 한국 소위원회(Korean Subcommittee)를 꾸려 조사에 착수, 결과물로 권고안(recommendation)을 작성하여 미군정청에 제출했다. 그러나 조사의 결과는 미군정의 의도와는 다른 것이었다.

한국 소위원회는 전평 지도층이 좌익에 속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몇몇 실무 인사들의 경우 당 노선과 거리가 있다고 분석했다.4) 따라서 미군정이 노동 정책을 개편할 경우 이들로부터 협조를 얻어 노동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며, 서둘러 전평을 군정 질서 내에 통합시킬 필요가 있고,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소위원회는 군정이 전평에 대한 억압책을 계속할 경우 전평을 공산당 지배하의 조직이 되도록 강요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국 소위원회는 미군정의 노동 단체에 대한 그간의 억압적인 시책에도 불구하고 전평이라는 강력한 조합 운동이 전개되고 있으며, 전평에 가입하지 않은 노동조합 중 건전한 노조가 사실상 전무―당시 소위원회는 대한노총을 반조합주의적 단체로 규정하고 활동을 금지할 것을 조언했다―한 실상임에도 불구하고 군정 관리들은 전평을 공산주의자가 지배하는 조직이라 비판하고 이들 조직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5)

여기서 우리는 한국 소위원회의 조사 활동이 미군정의 노동 정책 마련이라는 목적의식 속에 이루어졌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 소위원회는 미군정에 실질적 도움을 주기 위해 조선의 노동조합 실태를 나름 냉철하게 분석하고, 정책 마련에 활용할 만한 요소들을 찾아내려 애썼을 것이다.6) 결론적으로 한국 소위원회는 전평을 강력한 노동 단체로 인정하고 실체로서 수용해야 한다고 판단했으며, 전평 내 인사들의 성향을 조사하여 포섭할 것을 미군정청에 권고하였다. 그러나 전평 위원장 허성택은 공산당 최고 의결 및 집행 기관인 5명의 공산당 서기 중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전평이 개량주의적 조합 조직으로 전환될 것이라는 한국 소위원회의 기대는, 한낱 환상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우리는 소위원회의 보고서를 통해 당시 전평의 조직력과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전국 16개 산별노조, 1,757개 조합, 조합원 수 약 55만여 명).

1946년 7월 23일, 미군정은 그동안의 조합 활동 및 노동쟁의 금지 입장에서 벗어나 민주노동조합을 적극 육성한다는 방침의 새로운 노동 정책을 발표하였다(법령 97호). 그러나 실상은 한국 소위원회가 권고한 (어디까지나 소위원회의 관점에서) 최소한의 기본권을 보장하며 전평을 미군정에 협력시킬 수 있는 정책 내용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법령 97호에 의하면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은 보장되었으나 교섭권의 기반이 되는 단체행동권은 유보되어 있었다. 또한 민주노동조합에 대한 정의를 규정하지 않고 노동부에 그 해석을 위임함으로써 군정 노동당국의 입장에 따라 어떤 노동조합이든 민주노동조합에서 배제시킴으로써 억압할 수 있었다.7) 미군정의 노동 정책 목표는 좌파 노동 운동을 근절시키고 그것을 반공적 노동조합으로 대치시켜 노동자들을 완전히 탈정치화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미군정은 근대 민주 국가답게(?) 좌익 세력인 전평을 퇴치할 법적 통치 기반을 재정비하였다. 그리고 우익 단체들을 이용하여 법을 집행해 나가며 전평을 깨부수기 시작한다.

 

 

독청의 임무, 전평에 대항할 우익 노동 단체를 조직하라

 

해방 후 첫 1년은 건국준비위원회 등 사회주의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였고, 자생적 노동조합인 전평은 대중의 크나큰 지지 속에 기반을 굳건히 하고 있었다. 이에 우익 민족진영도 민중과 노동자의 세력을 규합하여 전평에 대항할 수 있는 노동 단체를 조직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전평 결성 넉 달 후인 1946년 3월 10일 이승만을 총재, 김구(金九)를 부총재로 한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이하 대한노총)을 서둘러 결성하게 된다. 애초에 대한노총은 노동자를 기반으로 한 조직이 아니라 우익 민족진영의 반공 청년 단체를 기반으로 하여 목적의식적으로 조직한 노동 단체이다. 이는 전평과 대한노총의 출범식에서부터 차이가 여실히 드러난다. 자생적인 노동 운동 과정에서 개별 사업장 노조 대표가 주축이 되어 산별노조를 만들어 결성된 전평의 출범식에는 국토 분단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북조선 지역을 포함한 전국 40여 개 지역에서 1,194개 지부, 약 50만여 명의 조직 노동자를 대표하는 505명의 대의원이 참석했고, 김삼룡이 영등포와 인천 등에서 조직 동원한 노동자 800명이 참석하였다. 반면 대한노총 결성 대회는 용산공작소, 경성철도공장, 경성전기회사 등 15개 직장 48명이 참석했으며, 이 48명도 사실상 노동조합을 대표하는 인사들이 아니라 김구, 안재홍, 조소앙, 엄항섭 등 한독당 계열 우익 민족진영 지도자가 대거 참석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대한노총의 전신은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이하 독청)8)이다. 독청은 그 명칭이 시사하듯 독립 국가 건설에 방해가 되는 각종 제도와 조직, 특히 좌익 정치 단체를 제거하기 위해서 테러를 자행하던 우익 청년 단체들의 집합체였다. 주로 불교청년회, 기독교청년회, 천도교청년회 등 종교의 이름을 빌린 반공 단체와 광복청년회 등 약 40여 개의 우익 청년 단체로 이뤄졌다. 당시 이런 우익 청년 단체의 조직은 비교적 쉬웠는데, 그 이유는 해방 이후 심각한 실업으로 직업이 없었던 많은 청년들, 어떤 형태로든 신생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자 했던 정치 지향적 청년들, 이북에서 월남한 청년들9)의 범람이 그 원인이었다.

독청은 신탁 통치 문제로 한창 정국이 혼란스러웠던 1945년 12월 말에서 1946년 초 사이 노동자들의 좌익적 경향을 분쇄하기 위한 활동을 개시했다. 독청 위원장 전진한은 조직 내에 노동부를 신설하고 홍윤옥을 부장으로 임명하여 노동 문제를 전담케 했다. 독청은 전평을 타도하고 우익 노동 단체를 결성하기 위해 홍윤옥, 김구(金龜), 이일청 등의 우익 인사들을 용산, 영등포 등지의 철도와 기타 직장에 침투시켜 우익 노동단체 조직에 착수해 대한노총을 출범시킨다.

대한노총의 조직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당시 테러 단체로 활동하였던 우익 청년 단체를 활용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대다수 노동자와 민중에게 환영받았던 전평을 파괴하기 위해 공장주와 기업주, 경찰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전평을 파괴해 간다. 그리고 전평이 와해된 그 자리를 대한노총이 대신하는 방식으로 조직을 확대해 나간다. 대한노총의 활동 자금은 대부분 한민당과 기업가・군정청 관리들로부터 충당되었으며, 대한노총 조합원들은 조합비를 내지 않았다.10) 우익 청년단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기업 내에서 좌익 세력에 대한 테러 활동을 전개하면서 기업주 측과의 공생 관계를 유지하였다. 미군정기 우익 정치조직과 기업가, 군정청은 대한노총을 앞세워 전평을 거세하는 일에 서로 의기투합하였다.

 

 

대한노총, 전평을 타도하자

 

대한노총은 이름만 노총이었을 뿐 실상은 노동자를 탄압하고 반노동자적 행위를 일삼았다. 전평은 이들의 테러와 폭력으로부터 조합원과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자위단을 꾸려 대항하였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저들의 공세에 점차 무너져 갔다. 대한노총은 미군정, 우익 정치 단체, 기업가, 경찰 등의 적극적인 원조를 받으며, 법, 돈, 폭력 등의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전방위적으로 전평의 개별 사업장들에 침투해 분회를 하나하나 와해시켜 나갔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1) 우익 청년단원을 이용한 전평 분회 파괴 공작

건청11) 등 북조선에서 쫓겨 온 우익 테러 청년단원을 채용하여 공장 내에 경찰권을 주어서 전평 분회원들을 위협하고, 인권 유린, 폭언과 폭행, 풍기 문란으로 도전적인 방해를 계속한다. 분회원들을 한편으로 협박하고, 한편으로 매수공작을 벌인다. 전평이 아닌 대한노총으로 하여금 요구 조건을 제출하게 하고, 이를 승인해 줌으로써 노동자를 기만하고, 분회를 파괴한다.12) 또는 우익 청년단이 자체적으로 대한노총 산하조직을 결성하여 청년단 간부가 그 지부장을 맡아 전평의 파업 분쇄에 적극 가담한다.

 

2) 전평 세력이 강했던 공장을 중심으로 집중 공격

대한노총의 파괴 활동은 전평 세력이 강력했던 경방(경성방직)・경전(경성전기)・동방(동양방적)・철도 경성공장 등에서 집중되었다. 이러한 곳에서 대한노총은 미군정・우익 청년단・기업주 측과의 긴밀한 협조로 전평 타도 활동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대한노총을 조직화했다.

① 경성방직

   – 1946. 8. 21. 서북청년회 약 200여 명이 테러단을 동원, 공장을 습격하여 전평 조합원 강제 해고 및 경찰 구금.

   – 1947. 7. 27. 인민대회 참석을 이유로 노동자 해고(8명), 진상조사차 공장을 방문한 기자들 협박 및 방해.

② 경성전기

   – 1946. 10. 1. 경전 전차과 노동자 3,000여 명 파업에 경찰대를 파견, 위원장 이하 200여 명 검거. 대한노총은 무장경찰, 서북청년회 등과 함께 무력과 폭력을 동원하여 파업 분쇄.

   – 1946. 11. 22. 전평 노조 간부 검거 등으로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 경전자치노조 결성. 이후 대한노총 경전노조(1947. 4. 19.)로 단체교섭권 획득.

   – 1947. 6. 16. 대한노총 경전노조 제1회 정기 대의원회에서 감찰위원회 설치. 공장 내 전평 잔존 세력 소탕 활동 펼침(그러나 전평세력이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으며 직장에서 추방된 전평원들의 산발적인 투쟁이 계속되었음).

③ 동양방적(인천)

   – 1945. 5. 경영주와 경찰이 함께 전평 노조원 검거 및 탄압. 풀어 주는 조건으로 회유책을 써서 대한노총에 가입시키려 했으나 실패.

   – 1946. 8. 3. 영등포 대한노총원 및 평안청년회원 700여 명을 동원하여 대한노총 결성 재차 시도. 결국 성공.

④ 철도 경성공장

   – 건국청년회원, 국민당 청년부원 등이 전평 파괴를 목적으로 많이 침투해 들어감. 외부 세력과 긴밀한 연락으로 전평 파괴 공작 펼침. 특히, 신탁 통치 문제를 이용하여 노조 해체 음모를 획책.

   – 1946. 1. 7. 외부 테러 단체와 연락, 약 300여 명의 테러단을 동원하여 경성공장 분회 사무실을 습격하고 파괴함.

   – 1946. 5. 12. 대한노총운수부 경성공장지부연맹 창립.

⑤ 조선피혁(영등포)

   – 1946. 4. 10. 군정청 명령으로 새 관리인 파견. 대한노총 조선피혁분회 결성(1946. 7. 12.)으로 대한노총원과 전평 조합원 사이 갈등 심화.

   – 1946. 8. 송규철이라는 노동자가 숨진 사건 발생. 이유는 회사 트럭을 정식 수속 없이 사용하였다는 이유로 대한노총원 여러 명이 집단 폭행하여 죽음에 이르게 함.

   – 1947. 2. 4. 노동자들이 집회를 하려 하자 대한노총원이 노동자 3명을 납치・구타.

   – 1947. 2. 7. 전평계 노동자 300여 명이 집회를 개최하자 경찰 진압으로 230여 명 검거.

 

3) 노동자 회유・협박

대한노총에 가입하지 않으면 해고의 위협을 가하고, 가입하면 임금 인상 등의 특권을 제공하겠다는 회유책을 사용하였다. 실례로 화재로 집, 옷, 양식을 잃은 50호 왕십리 주민들에게 대한노총에 가입하면 집을 사 주고 돈을 빌려준다고 선전하였다. 또는 노동자들을 협박하여 강제로 전평계 노조원을 해고하고 대한노총에 가입시켰다(영등포 조선피혁, 삼영제과, 오류동 조선주조공장 등). 조선주조에서는 대한노총에 들지 않으면 배급을 주지 않는다고 협박하였다.13) 특히, 회유 및 협박은 전평의 9월 총파업(46년), 3ㆍ22 총파업(47년) 과정에서 체포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광범하게 이루어졌다. 당시 경찰에서는 대한노총 수습위원회가 신원을 보장하는 사람들을 석방시켜 주었고, 대한노총은 회유와 협박으로 노동자들을 강제 가입시켰다.

▲ 47년 총파업 과정에서 체포당하고 있는 철도 노동자들

 

4) 공장 관리자를 대한노총 간부로 조직하여 공장 내 노동자 장악

전평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공장 및 직장 내 관리자에게 대한노총 간부를 맡기고 전평 파괴 공작을 벌였다. 이는 대한노총이 노동조합이 아니라 공장주 측의 이익을 대변하는 반노동자 단체라는 점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부산의 한 방직회사는 사장이 곧 노조위원장이고 그 회사 청년단장인 경우도 있었다. 9월 총파업, 3ㆍ22 총파업으로 전평이 쇠약해진 기회를 틈타 대한노총은 각 공장, 직장에서 관리자를 통하여 세력을 장악해 갔다. 관리자 및 직장(職長)들로 하여금 위원회를 구성하게 하고, 그들에게 노총 간부직을 맡기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대한노총 공장지도부는 대부분 관리직 사원들로 구성되었다(영등포 기린맥주공장, 동양방적공장, 용산주물공장, 다복면주식회사 등).

 

이 밖에 미군정기 대한노총의 반(反)전평 활동은 총파업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대한노총은 9월 총파업이 일어나자 9월 24일 파업 대책을 협의하고 28일 확대회의를 열어 우익 정당, 사회단체, 청년단체 등과 협력하여 전평의 총파업 투쟁을 반대하고 직장복귀 투쟁을 전개한다. 이들은 한국 모든 민중의 이익을 위해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노동자들에게 촉구하고, 철도 파업은 공산당의 책임이고, 이 파업이 민중들을 가장 비참한 조건으로 몰아넣을 것이라고 비난하는 선전물을 뿌려 댔다. 또한, 청년단원 및 경찰들과 함께 노동자의 농성장을 포위해 들어가 파업하는 노동자들과 격돌하였고, 파업단을 강제 해산시켰다. 이는 이후 3ㆍ22 총파업, 2・7 구국투쟁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같이 대한노총은 전평 타도 활동으로 조직을 확장하였으며, 이승만을 필두로 한 우익 세력의 정치 노선에 충실한 조직으로 철저히 기능하였다.

 

 

대한노총, 노동조합인가? 정치 조직인가?

 

대한노총은 이승만 지지와 반공 활동에 충실하며, 정부 수립 이후에도 노동조합으로서의 노동 활동보다 이승만의 권력을 뒷받침하기 위한 정치 활동에 주력했다. 5・10 선거가 다가오자 남로당과 전평은 5・8 총파업 투쟁으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저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반면 대한노총은 5・10 선거의 선봉에 서서 이승만과 단독 정부 수립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뿐만 아니라 대한노총의 일부 임원과 대한노총에 우호적인 정치인 등 6명은 국회에 진출하기 위해 입후보하였다. 그러나 노총 위원장 전진한 1명만이 상주 을구에서 당선된다. 전진한은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후에도 노총 위원장을 계속 겸직하면서 자주적인 노동 조직과는 거리가 먼 대한노총의 조직적 진면목을 보여 주었다. 또한,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전진한을 사회부 장관으로 임명하였는데, 이때에도 여전히 노총 위원장을 겸직함으로써 노동 단체와 정부의 유착과 노동조합의 왜곡된 운동 방식을 제도적으로 굳혀 놓는 선례를 남겨 놓았다. 한편, 새롭게 제정된 헌법은 노동기본권은 보장하였으나, 현업공무원의 단체행동권은 박탈함으로써 형식적인 수준에 머물렀고, 또한 조합의 정치 활동을 금지하였는데, 이는 이후 한국 노동 운동에 커다란 제약으로 작용한다.

 

 

대한노총에서 한국노총으로, 무엇이 변하였나?

 

미군정기에 갖은 탄압으로 점점 쇠퇴해 가던 전평은 정부 수립 후 한국(조선) 전쟁을 거치며 멸공의 광풍으로 씨가 말라 갔다. 그리고 이 시기 대한노총은 드디어 전국의 모든 노동조합을 그 휘하로 접수한다. 그리고 1960년 4월 혁명으로 이승만 권력이 무너졌을 때, 그 세력의 기반이었던 대한노총도 당연히 휘청였으나, 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박정희라는 새로운 권력자에게 충성하며 이름을 한국노총으로 바꾸고 그 명맥을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다.

 

▲ 한국노총 새마을운동 실천 선언식

 

한국노총 홈페이지에 들어가 연혁을 살펴보니 맨 윗줄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한국노총 73년은 척박한 이 땅에 노동조합의 깃발을 세우고 억압받는 노동자들과 함께 고난에 맞서온 세월이었습니다.

 

1946. 3. 10.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결성(위원장 홍윤옥)

: 민족진영의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약칭 ‘독청’)의 노동부가 분리되어 만든

우익정치결사체.

 

다행이다. 자신들의 뿌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잊진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억압받는 노동자를 더욱 억압하며 그들의 권리를 빼앗아 왔던 부끄러운 역사는 역시나 잘 숨기고 있다. 물론 지금의 한국노총은 대한노총 시절만큼 노골적인 테러 행위는 하지 않는다. 아니 못 한다. 그러나 아직도 노동자의 편보다는 사용자의 편에, 정부의 편에 더 가까이 있다. 진정으로 노동자의 편에 함께 서고자 한다면 73년의 깊이 내린 뿌리를 자르고 씨앗부터 다시 심어야 할 것이다.

 

 

나오며

 

전평이 와해된 후, 오랜 기간 한국의 노동조합은 반공 이데올로기와 독재 정권하에서 계급성과 혁명성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국의 노동조합에 대한 것이지 노동자계급에 대한 것은 아니다. 60년 4월 혁명으로 이승만을 하야시키고, 87년 노동자 대투쟁 시기 폭발적으로 민주노조가 들어서며 90년 전노협 결성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억눌려 있던 노동자들의 계급성과 혁명성이 터져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혁명성을 갖춘 노동조합 전평은 지금 사라지고 없지만, 노동자는 그 존재로서 여전히 계급성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요즘따라 더욱 그리운, 존경해 마지않는 고 전성식 동지의 글을 인용하며 <이 달의 역사>를 마무리하려 한다.

 

세계사의 어느 시대를 거치면 노동자계급은 민주주의 혁명의 중심 주체, 민족해방 운동 중심 주체였다. 민주주의 혁명, 민족해방은 노동자계급의 궁극적인 역사적 과제인 계급해방・인간해방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었다. 이러한 투쟁의 성공은 올바른 사상과 이론으로 무장된 노동자계급의 정치(조직)와 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의 결합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역사에서 증명된 진리이다.14)

노사과연

 

[참고 자료]

전성식, ≪종교・국가・소유가 없는 세상을 꿈꾸며≫, 노사과연, 2014.

임송자, ≪대한노총연구(1946-1961)≫,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2003.

박영기ㆍ김영환, ≪한국노동운동사≫ 제3권, 지식마당, 2004.

송종래, ≪한국노동운동사≫ 제4권, 지식마당, 2004.

 

 


 

1) 전성식, “1987년 노동자 대투쟁까지 노동운동의 전개”, ≪종교・국가・소유가 없는 세상을 꿈꾸며≫, 노사과연, 2014, pp. 174-198. 이 책은, 고 전성식 동지의 글들을 모아서 엮은 유고집이다. 원래 이 글은, ≪정세와 노동≫ 제26호(2007년 7/8월)의 “[특집] 1987년 7ㆍ8ㆍ9월 노동자 대투쟁과 오늘”의 5편의 글 중 첫 번째로 실렸던 글이다.

 

2) 보다 자세한 내용은, 오해영, “[이 달의 역사] 1945년 11월 5일―한국 최초 전국총파업을 조직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결성되다!!”, ≪정세와 노동≫ 제138호(2017년 11월)를 참조하시길 바란다.

 

3) 미국 전시노동위원회(National War Labor Board) 사무국장 Paul L. Stanchfield와 전시노동위원회 조선위원장 William McPherson을 말한다(≪동아일보≫, 1946. 6. 14., 대한민국문교부 국사편찬위원회: 2-762).

 

4) 어느 조직이든 사상적 층위가 완전히 같을 수 없음을 상기하자. 또한 한국 소위원회의 몇몇 실무 인사들에 대한 분석은 이들이 ‘좌익 성향이 아니다’라는 분석이 아니라, ‘당 노선을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분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한국 소위원회가 전평을 군정 질서 내로 통합할 수 있다고 평가한 것은 지나치게 긍정적인 전망으로 봐야 할 것이다.

 

5) 박영기ㆍ김영환, ≪한국노동운동사≫ 제3권, 지식마당, 2004, p. 376.

 

6) 실제로 노동관계, 임금, 급여 정책 및 물가, 노동행정 조직의 기능 및 운영 등 구체적인 문제점들이 권고 내용에 들어가 있다.

 

7) 노동부에서는 민주노동조합을 “몇 사람의 독단이나 강압이 아니라, 조합원 모두가 참여하여 조합을 결성하고 조합원 전체의 지지를 받으면서 조합원 전체를 위한 노동조합”으로 해석하였다. 말은 그럴싸하지만 ‘조합원 전체의 지지’라는 다분히 애매한 문구를 넣음으로써 원하는 대로 해석하고 원치 않는 조직을 언제든 배제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였다.

 

8) 1945년 12월 21일 결성(총재 이승만, 부총재 김구, 위원장 전진한). 일부 문헌에는 독청이 1945년 11월 21일 결성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독청이 좌익 청년 단체 결성 후 출범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주장이고 보면, 좌익 정치 세력 청년 단체 집합체인 ‘조선민주청년총동맹(약칭 민청)’이 12월 11일 결성되었음을 감안할 때, 그 이후가 되는 12월 21일에 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한국노총, 1979: 281).

 

9) 친일 경력자, 대지주, 자본가, 종교인 등으로 북의 숙청 리스트에 올라 적극적으로 월남해 온 이들이 많았다.

 

10) “대한노총은 발족으로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는 조합비란 받아본 예가 없었다. 항상 선의의 기부와 악행의 구걸로써 대한노총의 생명을 이어 왔던 것이다.”(김중열, ≪노동문제총론≫, 집현사, 1969, p. 38.[임송자, ≪대한노총연구(1946-1961)≫, 2003에서 재인용.])

 

11) 평안청년회, 서북청년회, 건국청년회 등.

 

12) 민주주의민족전선 편, ≪해방조선≫ Ⅱ, 과학과 사상, 1988, p. 419.(임송자, 앞의 책에서 재인용.)

 

13) ≪전국노동자신문≫, 1946. 5. 24.(임송자, 앞의 책에서 재인용.)

 

14) 전성식, 앞의 책, p.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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