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독립 투쟁의 역사(A History of Indian Freedom Struggle)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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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디리파드(E.M.S. Namboodiripad)

번역 : 이병진(양심수, 회원)

 

Ⅷ. 정치 선동과 단체들1)

 

영국의 인도로 인한 재앙과 같은 귀결을 폭로한 나로지, 라나데, 듀트의 연구가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초보적 형태의 시위들이 벵골에서 최초로 시작되었고 나중에는 잔인한 영국의 지배에 저항하고 인민들의 요구를 지키기 위하여 여타 지역들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또한 어떤 단체들은 조직적인 방법으로 투쟁을 이끌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최고의 단체는 람 모한 로이가 1828년에 세운 학술단체(Academic Association)이다. 이 단체는 기본적으로 종교와 도덕적 문제들에 관심을 가졌지만, 사회와 정치 쟁점들의 토론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유럽에서 강력한 힘을 얻고 있던 부르주아 민주주의 이념으로 가득 찬, 교육받은 중간계급이 그 단체를 이끌었다. 그래서 그 단체는 더 이상 쓸모없는 종교적, 카스트적 신조를 반대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고양하려는 두 가지 목적의 활동을 했다. 1838년에는 “배심제, 언론의 자유, 정부부처에 의한 강제노역 같은 주제를 토론하는” 보편적 지식습득협회(the Society for the Acquisition of General Knowledge)가 만들어졌다.2)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런 점들은 최소한 교육받은 중간 계급이 정치 일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지표일 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서 그러한 관심을 증진할 수단을 채택했다는 지표이기도 하다.

1842년에 드와르카나쓰 타고르(Dwarkanath Tagore)의 주도로 영국의 자유주의 정치가인 조지 톰슨(George Thompson)이 인도에 초대되었다. 영국에서 노예제를 반대하는 시위에 적극 참여했던 톰슨은 캘커타에 와서도 타고르의 영향에 있던 단체들과 함께 정치활동과 선전을 시작했다. 그런 활동의 결과로써, 벵골 영국인도협회(the Bengal British India Society)라는 새단체가 1843년에 만들어졌다. 그 협회의 목적은 “인도 대중들의 처지와 법, 제도, 자원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여 보급하는 것, 그리고 … 복지를 보장하고, 권리를 신장하며 인도의 모든 계급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여타 평화적 법률적 성격의 수단을 이용”하는 것이었다.3)

그러는 동안에 토지소유자들의 이익보호를 위해 토지소유자협회(the Land Holder Society)같은 단체도 1838년 캘커타에 만들어졌다. 그 단체의 목적은 토지소유자들을 공유지에서 쫓아내려는 정부의 법집행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진보적인 단체, 교육받은 중산층의 단체, 지주들 중심 단체들이 조직되면서 그들의 활동을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라났다. 그래서 영국인도인협회(the British Indian Association)가 1851년 만들어졌다. 이 단체는 지방행정과 정부 체제의 개량을 위한 또 “인도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영국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이 단체는 1853년 동인도회사의 행정의 변화를 위한 법안이 영국 의회에 제출되자, 의원들에게 그 문제에 대한 인도인들의 관점과 요구를 전달하기 위해 영국에 대표단을 보냈다. 그들의 중요한 요구 중 하나는 인도인들이 반드시 입법부에 대한 선출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유형의 활동이 봄베이에서도 일어났다. “로카히트와디(Lokahitwadi)”라는 필명으로 인민과 관련한 일반 문제들에 관한 글을 썼던 메쉬무크(Deshmukh)는 인도의 도시나 군지역에서 인민들을 대표하는 의원을 선출하여 ‘의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1852년에는 보다 중도적인 요구를 주장하는 봄베이협회(the Bombay Association)가 봄베이에서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1853년에 영국에 대표로 파견되어 의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던 다다브호이 나로지 같은 이들을 비롯한 저명한 인사들이 결성했다. 이 대표단을 보낸 것은 그 당시 부패한 행정을 고발하고 행정개혁을 위한 실제적인 제안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 제안들에는 사법부를 재조직하고 고위직에 인도인을 임명하고 대학교를 세우는 방안들이 포함돼 있었다.

1853년 마드라스에서는 마드라스원주민협회(the Madras Native Association)가 결성되었다. 이 단체 역시 영국 의회에 입법 청원활동을 하였다. 그 청원에서는 “불만과 대통령제에 대한 요구”를 설명하며 소작민들을 “극심한 가난과 궁핍으로” 몰아넣는 자민다리와 료뜨와리 제도의 부당성과 억압적 본질을 지적하였다. 또한 청원은 사법부의 비효율성과 지체 그리고 비용의 문제, 부족한 도로, 다리, 관계시설 및 교육을 위한 교정들을 언급했다. 또한 공공지출을 삭감하여 인민에게 행정적 혜택을 주는 것을 제안하였다.

이런 전개들이 1857-59년 세포이 항쟁보다 먼저 일어났다는 것을 반드시 지적해야 한다. 그들은 신층 지주계급을 포함하여 교육받은 중간계급이 그 당시의 지배적인 정세와 인민의 미래 진보에 대해 어떻게 보고 있는지 전체적인 그림을 제시하였다. 이들 계층의 관점이 이후 1857-59년 봉기에 참여했던 이들의 관점과 두 측면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봉기자들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지배를 확장하고 있던 영국 체제를 뿌리부터 끊어내고 그것을 낡은 봉건체제로 대체하려고 하였다. 반면에, 신흥 지주계급을 포함한 교육받은 중간계급은 유럽과 특히 영국에서 부상하는 새로운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그런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의 기초가 되는 사회・경제적 체제를 인도에 수립하길 원했다.

둘째, 봉기자들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영국을 패배시키려고 무장 투쟁의 길을 가려고 했다. 반면에, 교육받은 중간계급은 영국의 여론에 호소하여 공감을 유발하고 법으로 영국정부의 지지를 얻고자 하였다.

당연하게도 교육받은 중간계급은 모든 봉기자들에게 공감대가 없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실 라자 람모한 로이의 계승자들과 다다브호이 나로지 같은 이들의 지지로 인해 영국은 봉기를 제압하는 데 성공하였다. 만약 인도가 그들의 목적대로 인민과 영국정부의 공감과 협조로 독립된 (부르주아) 민주국가로 점진적으로 진보하였다면, 봉기자들의 노력은 확실히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기대는 점차 약해졌다. 그들은 영국이 인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경로에 따른 근대화를 원하지 않고, 가장 온건하고 정당한 인민의 요구조차 거부하고 단지 인도 인민 전체를 그들의 지배하에 통합하는 것에만 관심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세포이항쟁(1857-59년)이 진압되고 영국 지배하에 통합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배자들과 교육받은 중간계급 간에 갈등이 나타났다. 그들은 그런 여러가지 갈등의 경험에서 1853년 인도법(the 1853 India Bill)개정을 위해 의회에 청원했던 일보다 더 강력하고 결정적인 힘으로 정치 선동을 조직하지 않는다면 영국의 입장은 조금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민주주의자들이 갈망했던 인도인의 고위직 행정관료 임명 기회를 부정하는 영국정부 정책이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것은 캘커타, 봄베이, 마드라스에서 온 대표단이 영국 의회에 청원했던 중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그런 청원을 무시하고 더욱더 인도인을 배제하는 엄격한 지배와 통제를 하였다. 그런 정부의 태도는 인도 언론에서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던 중에 이와 관련해서 인도 전국적인 주요쟁점이 된 사건이 일어났다. 벵골 청년 수렌드라나쓰 바네르지(Surendranath Banerji; 1848-1925)가 인도 행정고시에서 높은 순위로 합격하였다. 그런데 그는 공직 인도인 배제에 따라 갖은 고난을 겪었고 결국 취약한 토대의 공직에서 쫓겨났다.

이 사건은 강렬한 불만이 불러일으켰고 캘커타뿐만 아니라 인도 전체의 교육받은 중간계급이 들고 일어났다. 조직적인 노력을 통해, 권력기관으로부터 상처받은 자존심을 세우고 인도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선동을 개시해야 한다는 강한 여론이 형성되었다. 바네르지는 스스로 이 기회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는데, 이 문제에 대한 대중여론을 고조시키기 위해 전국 여행을 하였다. 그는 우따르 쁘라데쉬, 펀자브, 신드, 구자라뜨와 마하라쉬트라 그리고 델리와 마드라스를 방문했다.

그것은 대중여론을 동원하여 선동을 지도한 최초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그 선동은 인도 언론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따라서 모든 인도 언어로 발간되는 언론4)이 대중의 여론이 되어 정부정책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것은 법률적 강제로 언론의 입을 틀어 막으려 한 지배자들을 성가시게 하였다.

그러나 이런 법안들로 운동이 잦아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법으로 또 다른 운동이 일어났다. 그 운동으로 인해 1878년에 효력을 발휘한 법을 정부가 철폐하도록 하는 효과를 얻었다.5)

대기근으로 인도의 여러 지역이 파괴되는데도, 1878년도에 국군법을 통과시키고, 기근이 한창인데도 영국 여왕 지배를 기념하는 오만한 축하연이 열리고 북-서 전선 지역에서 전쟁을 준비하는 등 기타 여러 가지 사건들이 인민 사이의 불만을 키웠다. 교육받은 중간계급은 그런 각각의 쟁점들에 대해서 시위를 조직하려 하였다. 그 당시 식민지 총독인 리튼 경6)은 인도 대중들에게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리튼 시대 만큼 도덕적으로 비난받은 통치를 했던 정부가 전에는 없었다. 또한 전례없이 대중지도자들에 의해서 수많은 시위들이 조직되었다. 그가 직위를 포기하고 영국으로 돌아간 때에 즈음하여 영자신문인 벵갈리(Bengalee)7)는 다음과 같이 썼다.

 

억압적인 조치를 통해 이 나라의 공적활동(the public life, 집회, 시위 등 : 편집자)을 고무시킨 커다란 공로는 필히 리튼 경에게 돌아가야 하며, 이러한 봉사에 대해 우리나라는 각하에게 무척 감사드린다.

 

인도 인민의 권리와 요구를 지키려는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에, 인도의 영국인들도 자신들 방식으로 운동을 이끌었다. 입법위원(the Law Member)인 일베르트(Ilbert)가 입법위원회에 공직에서의 영국인과 인도인 사이의 차별을 없애는 법안을 제출하였고 양측 모두에게 적용되는 조항을 만들었다. 이 법안에 반대하여 인종지배의 특권을 누리던 영국인들이 전국적인 운동을 조직하였다. 그들에 의한 발행되는 신문들과 인도인들이 발행하는 인도어 신문들이 일베르트 법안과 관련해서 충돌하였다. 이 싸움에서 그 영국인들이 승리하여 법안은 그들의 요구대로 수정되어 통과되었다.

이 일로 인도인의 자존심은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들의 애국심과 조직화된 의식이 도전받았다. 인도인들은 권력을 잡고 있던 정부가 정당한 요구를 깔아뭉갤 뿐 아니라 영국인들의 부당한 요구를 들어준다는 사실을 눈을 뜨고 똑똑히 지켜보았다. 더 나아가서 지배자의 선의를 가늠해 볼 수 있던 수렌드라나쓰 바네르지가 기소되자, 인도인들은 강력한 운동 이외에는 그들 앞에 다른 방법이 없음을 깨달았다.

사태가 그렇게 전개되자 1883년 12월 28일부터 30일까지 캘커타에서 국민협회(national conference)가 소집되었다. 초기임에도 불구하고, 캘커타의 영국계인도인협회(British Indian Association), 뿌나의 사르바자니끄 사바(Sarvajanik Sabha) 그리고 마드라스의 마하자나 사바(Mahajana Sabha)는 그들 지역을 대표하여 조직적으로 참여하였고 그들의 활동을 통일해야 한다는 의식을 고양시켰다. 이것은 1883년 캘커타에서 최초로 열린 국민협회에서 여러 차례 논의된 토론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 회의에서는 인민 대의기구 설치, 일반교육과 기술교육 시설의 발전, 행정부에서 사법기능의 분리, 인도인 공무원 임용 등 여타 문제들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일베르트 법안을 반대하는 영국인들의 반동적인 시위도 있었음을 말할 필요도 없다.

이에따라 수렌드라나쓰 바네르지는 다시 북인도 여행을 떠났다. 그는 여러 지역의 다양한 정치 집단들의 통합 요구와 중앙 집중적인 조직 건설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다른 지도자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1885년 인도 국민회의(the Indian National Congress)가 만들어졌다. <노사과연>

 


1)  편집자주: 이 장은 6월호에 연재되었던 인도 독립 투쟁의 역사 (16) “Ⅶ. 인도 정치 경제학의 출현” 다음에 실렸어야 한다. 편집자의 실수로 누락된 부분인데 늦었지만 이번에 인도 독립 투쟁의 역사(16-2)로 게재한다. 잘못으로 인해 독자들에게 혼란을 드린 것에 사과를 드린다. 또 감옥에서도 힘겨운 학문 활동을 꿋꿋이 이어가고 계신 이병진 동지께도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최상철)

2)  Tarachand, op cit, p. 525.

3)  Tarachand, Ibid, p. 526.

4)  편집자주: the entire Indian language press. 주지하다시피 통일된 인도어는 없다. 아마도 힌디어, 벵골어, 텔루구어 등을 포함한 모든 언어로 발간되는 인도 언론이 한목소리를 냈다는 뜻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영어로 발행되는 언론이 포함되는 것인지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5)  역주: 영국은 1858년에 동인도회사의 지배를 종식하고 인도를 직접 지배하였는데 1877년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의 공식 국왕임을 선포하고 1878년에 지방어 신문법을 공포하여 인도 신문들을 통제하였다. 또한 영국은 1878년 제2차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켰는데 그때 인도인들을 강제동원하는 국군법을 만들었다. 

6)  편집자주: Lord Lytton. (Robert Bulwer-Lytton, 1st Earl of Lytton; 1831-1891). “펜은 칼 보다 강하다”는 금언으로 잘 알려진 에드워드 B. 리튼(Edward Bulwer-Lytton, 1st Baron Lytton)의 아들로 1876-1880년까지 인도 총독이었다. 

7)  편집자주: 1879년에 이 신문을 바네르지가 인수하여 40년간 편집자로 일하였다.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Dec 12th, 2013 | By | Category: 2013년 12월호 제96호, 번역 | 조회수: 1,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