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회원마당: 이 달의 역사] 부마 민중 항쟁

 

 

심미숙 | 편집위원

 

 

 

이번 호 <이 달의 역사>에서는 부마 민중 항쟁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부마 민중 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의 5일 동안 부산ㆍ마산 등 경남 지역에서 일어났으며, 5ㆍ16 군사 쿠데타로 시작하여 마침내 유신 독재로까지 나아간 박정희 정권의 극악한 공포 정치를 뚫고 나온, 1960년의 4ㆍ19 혁명 이후 처음 일어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거대하고 폭발적인 항쟁이었다. 부산대와 경남대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되어, 이후 민중들의 열렬한 호응과 합세로 이어져 박정희 정권 붕괴의 중요한 계기가 된 민중 항쟁이었다.

 

 

부마 민중 항쟁의 과정

 

10월 16일 부산 광복동에서의 시위

1979년 10월 15일, 부산대학교에 민주선언문, 민주투쟁선언문 등의 유인물이 뿌려졌다. 다음 날인 16일, 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었고 삽시간에 7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시위대는 가두 진출에 나섰고, 경찰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시내 중심가에서 산발적인 가두시위를 벌였으며, 시민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경찰의 진압 작전에 맞서 시위대는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방법으로 지속적인 시위를 벌여 나갔다. 저녁 무렵에는 일반 시민들이 합세하여 그 수가 급속히 늘어났고 시위 양상도 격렬해졌다. 시내는 5만여 명에 이르는 인파로 가득 메워졌고 유신 철폐, 언론 자유, 긴급조치 해제, 김영삼 총재 제명 철회 등의 구호들이 외쳐졌다. 진압 경찰과 치열하게 접전하며 새벽 1시까지 진행된 이날의 시위에서 언론 기관 1개와 파출소 11개소가 파괴되었다.

 

다음 날, 17일 아침이 되자 부산대는 임시 휴교 조치를 내렸고, 교문을 폐쇄하였다. 정문 앞에 집결한 1천여 명의 학생들은 다시 시내 진출을 시도했고 동아대에서도 교내 시위가 벌어졌다. 오후로 접어들면서 학생들은 시내로 집결하기 시작했고 저녁 무렵이 되면서 시위의 양상은 전날의 형태를 반복했다. 시내 각지의 파출소, 세무서, 동사무소 등이 파괴당하였고, KBS, MBC와 부산일보 등의 언론 기관이 공격당했으며, 시위는 새벽 1시 30분까지 계속되었다. 이틀간의 시위로 파출소 21개소가 파손되고, 경찰 차량 6대가 전소, 12대가 파손당했으며, 경남도청 등의 관공서와 언론 기관이 공격을 당하였다.

 

정부는 18일 0시를 기해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공수 부대 2개 여단을 투입하였다. 부산대, 동아대 등 부산 지역의 각 대학들에 대해 계엄사령부는 휴교령을 내렸다. 18일 아침부터 관공서와 방송국, 대학 등에 진주한 계엄군에 의해 검문검색이 강화되고, 시내로 나오는 학생들은 연행되었다. 저녁 7시경 부산수산대와 남포동에서 시위가 발생했으나, 진압 군경들에 의해 즉각 해산당함으로써 부산 지역에서의 시위는 일단 종결되었다.

 

10월 17일 경남대에 붙은 격문

이제 시위는 마산, 창원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18일 오후 1시경 경남대에서 무기 휴교와 귀가를 종용하는 교내 방송이 나가자, 경남대 학생들은 동요하면서 즉흥적인 가두시위를 시도했다. 구호도 노래도 없는 조용한 가두 행진이 시작되었다. 시내에 모인 학생들은 150여 명 정도였고 시민들의 호응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저녁 7시가 되자 시위대는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날이 어두워지자 공화당사와 파출소의 파괴, 방송국과 검찰청 등 관공서에 대한 공격으로 시위는 과격화되었다. 19일에 내무부가 마산 지역의 통행금지 시간을 2시간 연장한다는 방침을 발표했음에도 저녁부터 시내에 모여든 20대 청년들에 의해 18일과 같은 시위가 또다시 발생했다. 하지만 인근 지역으로부터 증강 배치된 경찰력에 의해 시위대는 전날보다 빨리 해산당하였다. 10월 20일 정오를 기해 마산 지역에 위수령이 발동됨으로써 마산, 창원 지역은 다시 잠잠해졌다.

10월 18일 시위대에 의해 파괴된 마산 회원파출소의 모습

 

한편 타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될 것을 우려한 독재 권력은 경북대에 임시 휴교령을 내리고, 울산 지역의 대학들에는 가정 학습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10월 24일 대구 계명대 학생 2천여 명은 유신 철폐를 요구하며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부마 민중 항쟁의 배경

 

부마 민중 항쟁은 박정희 정권 말기에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의 유신 체제에 대한 반감이나 비판 의식이 얼마나 드높았는가를 극명히 보여 준다. 부산과 마산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한 규모로 시민과 학생들이 일체가 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친 것은 18년 동안 계속된 박정희 정권의 폭압과 유신 체제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1979년 하반기는 유신 체제의 경직성이 극에 달해 가는 상황이었다.

신민당사를 점거하고 농성 중인 YH무역 노동자들

8월에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점거 투쟁에 대한 유신 정권의 피의 진압이 있었고, 9월의 신민당 총재단 직무 정지 가처분 결정으로 정국은 긴장 상태였다. 결국 10월에 공화당과 유정회1)는 합동으로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이에 대항해 신민당 의원 전원이 국회에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이와 같은 사태는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 마산 지역에서 정치적 불만과 긴장을 고조시켰고, 그 지역의 학생과 민중들이 전격적으로 시위에 나서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민청학련 사건2) 이후 타격을 입은 부산 지역의 운동권은 중부교회 청년회를 중심으로 정기적 학습을 통해 다시 모이기 시작했으며, 1978년 4월 창립한 양서조합3)은 1979년 11월 19일 해체되기까지 조합원 560여 명을 확보하며 농촌 활동, 수련회 등의 활동으로 상당 정도 대중성을 획득하고 있었다. 또한 앰네스티, 가톨릭노동청년회, 기독청년협의회 등의 사회단체 등도 활동하고 있었다. 1978년 4월 19일 부산대 시위 미수 사건과 7월의 대학생 페인트 사건은 당시 부산 지역에서 보기 드문 반정부 학생 운동이었고, 이는 몇몇 교회 출신의 학생 운동권과 아카데미, 전통예술연구회 등의 학생 서클 중심의 산발적인 움직임이었지만 이를 통해 투쟁력을 모아 가고 있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 정책은 외자 도입, 수출 주도, 중화학 공업 위주의 독점자본의 육성을 위하여, 저곡가, 저임금ㆍ장시간 노동 등 노동자 민중에 대한 극도의 수탈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이에 따르는 빈부 격차, 경제 악화, 세금 가중, 투기 붐, 비리ㆍ부조리가 저임금 노동자, 소외 계층의 심한 반발을 초래한 것이 부마 민중 항쟁의 기본 동인이었다. 한편, 1979년 하반기부터 경제 위기가 급격히 심화되면서 한국 경제는 고용 불안, 고인플레이션, 국제 수지 불안 등으로 침체된다. 부산 지역은 대표적 노동 집약적 산업인 섬유와 신발류 등의 경공업이 밀집된 지역이었고, 경제 활동 인구 중 73% 이상이 노동자들이었다. 이들 노동자들의 임금은 전국 최저 수준이었고, 1979년의 경제 위기로 인해 대량 실업이 부산 지역을 압박하고 있었다. 당시 부산 지역의 제조업체당 평균 근로자 수는 27% 줄었고, 임금 체불 문제도 심각했으며, 어음 부도율도 전국 평균보다 2.4배나 높은 수준이었다.

 

 

부마 민중 항쟁의 의의와 한계

 

연행된 사람들의 많은 부분이 일반 대중이었다. 총 연행자 수는 1,561명으로 그 가운데 학생이 427명, 일반인이 1,134명이었다. 학생들이 항쟁을 선도했지만, 낮보다 더 큰 규모로 전개된 야간 투쟁은 일반 대중들이 적극 가담한 민중 항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또한 회사원 등 중간층 시민들도 참여했지만, 영세상인, 중소기업이나 영세기업의 노동자, 식당ㆍ상점의 종업원, 반룸펜층, 실업자 등 유신 체제에서 사회적으로 몹시 소외당했던 층이 많았다.4) 박정희 정권 시기의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이 의미하는 것은, 노동자 민중에 대한 극악한 착취와 그에 따르는 노동자 민중의 엄청난 고통일 뿐이었다.

 

부마 민중 항쟁은 박정희 유신 체제에서 일어난 다른 반유신 시위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규모가 컸고 폭발적이었으며, 1960년 4월 혁명 이후로 잡아 보더라도 최대 규모의 시위였고, 그전의 다른 시위와 달리 규모가 큰 시위가 여러 날에 걸쳐 격렬히 계속되었다. 이러한 부마 민중 항쟁을 어떻게 진압할 것인가를 두고 박정희 정권 내부의 갈등과 대립이 격화되었으며, 이것이 박정희 피살 사건으로 이어졌다. 부마 민중 항쟁은 박정희 정권 붕괴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0월 26일 저녁 궁정동 안가의 술자리에서 울려 퍼진 몇 방의 총소리와 함께 독재자 박정희도, 그 파쑈 정권도 끝장을 맞았다. 그런데, 그렇게 박정희 정권은 무너졌지만, 과연 박정희 시대도 끝이 난 것일까? 우리는 여전히 박정희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나는 앞에서 박정희와 그 정권의 임무는, 민중적 의지를 압살하고, 확고부동한 반공국가주조(鑄造)하는 것이었다고 말했고, 또한 그와 그 정권은 그러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 대체로 성공했다고 말했다. 즉, 아직도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주조된 이 사회의 기본 틀이 여전히 유지ㆍ발전되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의 죽음과 그 정권ㆍ유신체제의 폐지도, 6월 항쟁과 그 해 7-9월의 노동자 대투쟁도,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도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주조된 이 사회의 기본구조를 전혀 건드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5) (강조는 원문)

 

4ㆍ19 이후의 노동자 민중의 혁명적 진출을 압살하고 등장한 박정희 독재 권력의 임무가 확고부동한 반공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면, 박정희 정권이 붕괴된 지 4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박정희 시대를 살고 있음에 틀림없다. 한국은 지금도 여전히 확고부동한 반공국가임에 틀림없으니까.  노사과연

 

 

[참고 자료]

채만수, 박정희 시대를 다시 본다, ≪정세와 노동≫ 제84호(2012년 11월).

한국정치연구회 정치사분과, ≪한국현대사 이야기주머니≫ 3권, 녹두, 1993.

서중석, ≪지배자의 국가 / 민중의 나라≫, 돌베개, 2010.

 

 


 

1) 1972년 유신 헌법에 따라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의 국회의원을 대통령이 추천하면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승인ㆍ선출하였는데, 이렇게 국회의원이 된 의원들이 만든 단체가 유신정우회였다. 그 탄생 배경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유정회는 유신 체제를 지지하고 박정희의 의지를 정치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한 단체였다.

 

2)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줄여서 민청학련 사건은 1974년 4월 민청학련 관련자 180여 명이 불온 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시키고 공산 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혐의로 구속ㆍ기소된 사건이다. 또한 민청학련의 배후 조직으로 인혁당 관계자들이 지목되어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고, 그중 8명(인혁당 재건위 사건 7명, 민청학련 사건 1명)이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18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사형 집행을 당했다.

 

3) 양서협동조합운동은 부산의 중부교회를 중심으로 모인 청년 그룹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양서(좋은 책)를 매개로 한 소비자협동조합운동이다. 부마 민중 항쟁의 배후로 의심받아 강제 해산당했다. 당시 회원들이 많이 읽었던 책은 ≪어느 돌멩이의 외침≫(유동우), ≪전환시대의 논리≫(리영희), ≪저 낮은 곳을 향하여≫(한완상), ≪뜻으로 본 한국역사≫(함석헌) 등이다. (참고: https://sanzinibook.tistory.com/1347)

 

4) “마산의 10ㆍ18 항쟁은 대학생들이 먼저 시작했지만, 수출자유지역 근로자들, 어시장 상인들 등 저층 구조에 있던 사람들이 합류했다. 응어리진 것들이 있었고, 데모가 일종의 분출구가 됐다 ― 신용수 당시 마산MBC 기자.”(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ㆍ부산민주화기념사업회, ≪부마민주항쟁―마산편: 마산, 다시 한국의 역사를 바꾸다≫, 2011.)

 

5) 채만수, “박정희 시대를 다시 본다”, ≪정세와 노동≫ 제84호(2012년 11월), p.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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