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자유주의의 악순환

 

 

신재길 | 교육위원장

 

 

* 이 글은, 지난 10월 2일 노동전선 사무실에서 진행된 ‘노동전선 정치학 강좌’의 ‘제1강 자유주의’의 강의 자료입니다.

 

 

1. 자유주의의 간단한 역사

 

한 사회를 대표하는 사상 경향을 거칠게 구분해 본다면 3가지다. 보수주의, 자유주의, 진보주의가 그것이다. 이런 구분은 영국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났다. 보수주의는 지주를 대표하는 사상이고, 자유주의는 자본가를, 진보주의는 노동자 민중을 대표하는 사상이다. 보수주의는 기독교 사상에 기초한 봉건주의로,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에 기초한 자유방임주의로, 진보주의는 사회주의 사상으로 나타났다.

 

자유주의는 한마디로 사회 계약론이다. 자유주의는 봉건 종교 권력으로부터 사유 재산권을 분리 옹호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졌다. 따라서 이들은 국가 폭력의 정당성을 종교에서 찾지 않고, 개인들의 계약에서 찾았다. 이때 개인은 재산을 소유한 자산가를 말한다. 개인들은 이성을 가진 존재들이다.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은 신의 원리를 이성의 원리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신의 계시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이 사회의 기초가 되기를 희망했다. 따라서 정교분리를 내세웠다. 이것은 종교의 자유로 표출되었고, 사상의 자유로 발전하였다. 정교분리 주장, 즉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게 되는 경제적 토대는 경제외적 강제로부터 사유 재산권을 보호하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자유로운 개인을 기초로, 전제로 하고 있다. 하지만 개인의 발견 내지 형성은, 국가나 민족의 형성 조건이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이다. 즉, 근대적 민족 국가의 형성 과정에서 개인이 발견되고 형성된 것이지, 개인이 국가 이전에 먼저 자연 상태로 있다가 국가를 계약에 의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같은 자연 상태는 인류 역사에 있어 본 적이 없다. 개인이 만들어진 역사적 과정은 원시적 축적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개인의 형성이란 곧 생산수단에서의 분리를 말한다. 이때 생산수단이란 토지였다. 농민은 토지로부터 분리를 사고할 수 없었다. 토지는 곧 삶이자 죽음이었다. 지주들은 폭력적으로 농민을 토지에서 분리시키고, 노동력을 팔 자유를 주었다. 이 과정이 자본가 국가와 법률의 형성 과정이다. 인류는 항상 집단을 이루고 있었고, 폭력은 이들 집단의 우열에 따라 분산되어 있었다. 그러다 근대에 이르러 근대 국가를 형성하면서 분산된 폭력을 국가가 독점하게 된다. 이런 국민 국가의 형성은 국민이 폭력의 대상에서 폭력의 담당자로 바뀌면서 이루어졌다. 즉, 국민 징병제와 함께한 것이다. 국민 징병제의 확대는 곧 참정권의 확대로 나타났다. 참정권의 확대는 사회생활에서 개인의 역할이 중요시된 계기이고 개인의 강화이었다. 민족 국가의 결과가 개인의식을 강화한 것이다. 생산수단인 토지로부터 농민이 분리되는 것이 노동자의 형성과 함께 이루어졌다면, 개인의식의 강화는 민족 국가의 형성과 함께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다른 의미로 전체(국가)주의적 요소와 개인주의적 요소가 함께 강화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경제적인 배타적 지배권인 민족 국가 내지 국민 국가는, 자본가계급이 민족 이데올로기나 국가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고 이를 바탕으로 국민이나 민족이라는 경제 공동체를 창출하게 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참정권의 주체로서의 개인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개인주의적 요소도 동시에 강화한다. 즉, 자본주의에서 자유주의의 발전은 민족 국가와 개인의 동시적 강화를 낳았다. 초기 부르주아 혁명 과정에서는 자유주의가 혁명적 이데올로기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자본가계급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곧 자본가계급은 반동화한다. 결국 보수주의와 사상적으로 결합되게 된다.

 

자유주의의 반동화는 경제적으로 독점자본주의와 궤를 같이한다. 초기 자유주의가 개인의 자유(해방, 재산권)를 주로 강조했다면, 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는 시장을 중시하는 민족 국가를 강조한다. 이는 독일 등 후발 자본주의 국가의 국가 주도 자본주의와 관련하여 민족주의 운동으로 나타났다. 경제적으로는 보호 무역주의로 대표된다. 경제 이론에서도 고전파 경제학의 노동가치론을 버리고 효용가치론을 제시하며 신고전주의로 나아갔고, 이후 국가의 시장 개입을 주장하는 케인스주의가 대두했다. 이런 국가 주도 자유주의의 정점은 파씨즘과 뉴딜 정책이다. 이러한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에서 국가주의적 자유주의로의 전환은, 19세기 말/20세기 초 독점자본주의로의 이행과 대공황뿐 아니라, 폭발적으로 성장한 노동 운동과 노동자 정권의 창출도 그 주요 원인이다. 의회주의하에서 노동자 정당의 약진은, 선거로 정권이 노동자에게 넘어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일으켰고, 자본가들은 급기야 의회주의를 부정하는 나치즘, 파씨즘을 지원하게 되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자본주의는 국가독점자본주의가 되었고, 자본주의 사상인 자유주의도 국독자에 맞게 새로운(new) 자유주의로 전환된다. 이는 현실 사회주의의 영향력이 커 가는 상황에 대한 자유주의 진영의 대응이라 할 수 있는데, 경제적으로 케인스주의식 복지주의와 사상적으로 롤스식의 기회의 평등을 강조하는 논리이다. 여기서 자유 개념의 변형이 나타난다.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이전까지 자유가 유산가들의 자유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투표권은 재산의 정도에 따라 불평등하게 주어졌고, 대다수의 무산자와 여성에게는 투표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노동 운동의 성장과 참정권 운동의 발전 그리고 전쟁은 참정권의 확대를 가져왔고 의회 민주주의의 강화를 가져왔다. 이에 대응하여 나타난 것이 자유 개념의 형식화이다. 이전의 자유 개념이 봉건주의 권력으로부터의 해방과 권력의 쟁취, 그리고 재산의 획득과 사상의 자유를 의미했다면, 이제 단순히 기회의 평등으로 축소된다. 그러나 이는 자유주의의 엄청난 장점으로 작용하였다. 자유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목표를 추구할 수 있는 수단에 불과하게 되었고, 자유주의는 인생의 목표를 제시하여 주지 않고 스스로 찾도록 개인의 자유에 맡길 뿐이었다. 롤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다양한 가치관을 인정하는 다원주의,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평화롭게 같이 살아가는 민주 사회가,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가치 아닌 가치가 되었다. 자유는 어떤 추구할 가치에서 각자의 가치를 추구할 자유를 보장하는 조건의 의미로 변화되었다. 이렇게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 결합하여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낳았다. 이데올로기로서 자유주의는 중립적인 체하며 어떠한 선호도 주장하지 않고, 사람들의 정신을 빚어내려는 어떠한 의도도 부인한다. 자유주의는 안락한 자유, 오락거리, 그리고 자유와 쾌락, 부의 매력으로 환심을 샀다.

 

이러한 새로운(new) 자유주의는 매우 성공적인 듯 보였다. 동구권이 붕괴하자, 모두들 자유주의의 최종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공의 영광은 새로운(new) 자유주의가 아니라 신(neo)자유주의의 차지였다. 이미 1970년대 케인스주의적 수정주의는 한계에 봉착하였다. 케인스주의 경제 정책은 재정을 중심으로 하는데, 이는 일국적 차원의 제한을 받는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이미 70년대에 이르러서는 세계적 분업 체계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세계적 분업의 구조는 미국의 소비와 일본ㆍ독일의 생산이고, 이는 90년대 이후 더 발전하여 미국 소비, 중국 생산의 구도가 정착하게 된다. 따라서 일국적 재정 정책 중심의 케인스주의는 세계적 경제 구도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이에 따라 케인스주의는 시장 지상주의자들인 신고전파 우파에 굴복하고, 국내 정책도 복지 축소, 노동 운동 파괴, 공공재 사유화 등의 정책으로 이동한다. 이런 신고전파 우파 정책의 핵심은 금융의 세계화이다. 금융의 세계화는 생산의 세계적 차원의 분업 체계에 대응하는 기제이다. 따라서 금융의 상대적 독자성을 그 특징으로 갖는다. 하지만 단지 상대적 독자성일 뿐이다. 일각에서 보이는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대립이라는 갈등적 시각은 문제가 있다. 금융화는 80년대부터 시작되어 90년대에 완성되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문제를 노정하게 된다. 이런 국독자의 신자유주의적 전환(후기 국독자)의 사상적 표현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은 개인주의를 극한까지 밀고 간 점에 있다. 새로운(new) 자유주의까지만 해도 보편적 가치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고 있다. 다만 보편적 가치를 강하게 주장할 때 그 가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피해를 볼 수 있으니, 이를 형식적으로 보호하는 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포스트주의에 와서는 모든 보편적 가치는 부정된다.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게 된다. 진리는 개인 각각의 주관적 욕망으로 해소된다. 물론 이들은 다원성의 이름으로, 특이성의 이름으로, 소수자의 이름으로, 차이의 이름으로 그렇게 한다. 이는 인간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이성의 능력을 부정한 데 기초하고 있다. 이들은 신을 대신한 이성이 인간을 자연과 사회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킬 능력이 있다고 믿었던 모더니즘의 기획은 실패했다고 진단한다. 이들은 이런 현대적 기획의 실패를 자본주의에서 찾지 않고 인간 이성에 그 원인을 돌렸다. 이들은 현상에 집착한다. 현상 이면의 본질, 경험 너머의 실재는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도 이성이 실패한 실례에 불과하게 된다. 현실 사회주의의 현실적 실패에 집착하여 그 본질과 원인을 보지 못한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자본주의 비판은 자본주의 외부로 탈주하는 길뿐이다. 결국 잡히지 않는 무지개를 찾아 헤매는 것뿐이다. 새로운(new) 자유주의를 형식주의라고 한다면, 포스트주의자들은 현상주의자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포스트자유주의자들은 반자본주의적 경향과 극우 보수주의적 경향으로 현실 운동에 나타나지만, 결국 철학적으로는 같은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2. 자유주의의 사상적 기초

 

일반적으로 부르주아 학계에서는 전체주의와 자유주의를 대립시키고 헤겔과 맑스를 전체주의적 사조에 포함시킨다. 사실 이는 냉전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니다. 전체주의=나치주의=볼쉐비즘=공산주의 구도를 만들어 내고자 한 억지이다. 나치즘과 볼쉐비즘은 역사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전혀 친화력이 없다. 철학적으로는 오히려 자유주의와 전체(국가)주의가 같은 사유 틀을 공유한다. 자유주의가 전체주의의 이면이다.

 

자유주의와 전체(국가)주의의 사상적 공통성은 부분과 전체를 분리하고 어느 하나를 절대화시키는 점이다. 개인과 전체(국가)를 대립시켜 개인을 강조하면 개인주의적 자유주의가 되고, 국가를 강조하면 국가주의적이나 전체주의적 자유주의로 발전한다. 이들의 경제적 공통성은 사유 재산의 옹호이다.

 

나치의 법철학자 칼 슈미트는 개인의 자유를 위해 강한 국가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칼 슈미트가 부르주아 의회 제도를 비판한 핵심이, 부르주아 의회 제도가 민주주의(인민 주권)에 오염되어 개인의 자유를 위협한다는 데 있었다. 슈미트의 직접적 비판 대상은 바이마르 의회였다. 슈미트의 입장에서는, 바이마르 의회의 민주주의는 곧 전체주의로 보였다. 민주주의는 인민 주권주의이며, 인민 주권은 전체 인민의 공공성을 앞세우게 되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사유 재산권)를 침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슈미트는 인민을 억압할 수 있는 강한 국가만이 개인의 자유를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슈미트의 의회주의 비판은, 제한 선거 시기에는 의회주의가 제 기능을 하였지만, 노동자들이 의회에 진출한 의회(바이마르 공화국 의회)에서는 자유주의에 의회는 더 이상 맞지 않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현재 자유주의 국가의 대명사인 미국은 어떤가? 셸던 월린은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후마니타스, 2013)에서 미국을 전도된 전체주의라고 규정하고 있다. 나치즘이나 파씨즘이 대중 운동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였다면, 미국의 전도된 전체주의는 대중을 정치에서 배제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새로운 사회 체제에서는 시민의 탈정치화와 탈동원화가 중요한 체제 유지 동력이 된다. 시민의 관심을 사로잡는 건, 신기술과 신상품, 최신주의, 그리고 최신의 것이 이전의 것을 대치하는 속도라는 것이다. 미국의 자본가들은 방대한 국가 기구를 장악하고 지배 도구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국방부는 방산업체가 장악하고 있으며, 연방준비은행은 여섯 개의 대은행의 연합체에 불과하다. 미국 인민들은 국가 기구에의 접근이 체계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이를 위해 언론, 스포츠, 영화 등등 무수히 많은 기제들이 동원된다. 그러니 그림자 정부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현상적으로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와 전체주의(적 자유주의)는 대립한다. 자유주의는 개인이 전부이고, 전체는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전체주의는 전체가 전부이고,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와 전체주의는 하나의 사물을 바라볼 때 부분과 전체를 전혀 다른 것으로 분리하여 사고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어떤 대상을 부분과 전체로 나누어 사고할 때, 부분이 없이는 전체는 형성될 수 없다. 이 점에 집중하는 사고방식이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이다. 어떤 사물은 기초적인 구성 요소의 결합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기초적인 구성 요소가 사회에서는 개인이다. 국가나 사회의 그 이상이란 것들은 허구이거나 개인들이 만들어 낸 개인적 구성물이지 개인과 별도로 존재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에게 국가나 사회란 것도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국가나 사회의 고유의 운동 법칙이나 성격이 있을 수 없고, 모두 어떤 개인의 행동으로 환원되거나 개인의 행동들이 결합된 것으로 환원해서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들은 역사적 사건에서 개인의 동기나 신념, 책임 의식 등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한국의 대표적 자유주의자인 유시민이 자신의 저서 ≪국가란 무엇인가≫(돌베개, 2017)에서 한국 전쟁 발발의 책임을 김일성과 박헌영의 신념에 돌리고는, 이들이 책임 의식이 결여되었다고 질타하는 것에서 이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전체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전체와 그 구성 요소를 구분하는 것에서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자들과 같지만, 전체는 단순한 구성 요소의 합 그 이상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전체주의자들에 의하면 그 이상은 개별적 구성 요소의 속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인간은 이성적 능력이 있는데, 인간의 이성적 능력은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구성하는 세포나 DNA 등에서는 찾을 수 없다. 즉, 인간의 이성이나 정신 등은 인간의 구성 요소(세포, 유전자, 기관 등)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나 국가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사회나 국가, 민족을 구성하는 개개인의 속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회나 국가, 민족의 고유의 기능, 속성,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체주의적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이런 전체의 그 이상은 구성 요소의 속성이나 구조에서 찾을 수 없고 구성 요소에 앞서 주어져야 한다고 본다. 이들에겐 개인보다 국가가 앞선다. 따라서 국가나 민족이 부여해 준 계급적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이 개인이 해야 할 전부가 된다.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자와 전체주의적 자유주의자가 공유하는 사유 방식의 공동성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구성 요소와 전체를 분리하여 어느 한쪽을 절대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공유하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이들은 둘 다 변증법적 사유를 부정하고 형식 논리에 머물러 있다는 데 또한 공통점이 있다. 즉, 이들에겐 1+1=2일 뿐이다. 이들은 현실을 보지 못하고, 양적 사고와 형식 논리에 매몰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1+1=3이거나 4 심지어 100도 될 수 있다. 분업의 예만 들어도 충분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생산한 량과 분업 체계 속에서 생산한 량의 차이는 수백 배에 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이런 현상을 이해하거나 설명하지 못한다. 특히나 분업과 달리 그 이상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거나, 드러난 것이 질적 현상일 경우에는 더욱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그 이상을 부정하는 것으로 나아가고, 전체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그 이상이 구성 요소의 결합 구조 밖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자유민주주의라고 말들 하지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본래 친화적이지 않다. 아니 오히려 대립적이다. 민주주의는 인민 주권 사상으로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하는 정치 형태의 일종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정치는 공적 영역으로 사적 영역인 경제와 구분되었다. 정치 형태의 일종인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공적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근대 부르주아 사회의 산물이다. 상인계급이 성장하면서 나타난 사상이 자유주의이다. 자유주의의 근간은 사적 재산권의 인정이다. 이 사적 재산권을 천부 인권으로 자연권으로, 인간 사회 이전에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고, 인위적 국가 권력이 침해 간섭할 수 없는 신성한 것으로 주장한다. 이런 자연권으로서의 재산권을 국가 권력(봉건 시대의 종교 권력)으로부터 분리시키는 투쟁 과정에서, 종교의 자유라는 이데올로기 투쟁이 전개되었다. 신의 지배를 인간 이성의 지배로 대신하고자 하였다. 이성적 개인은 자본가만을 의미한다. 노동자, 농민, 여성은 비이성적 존재로서, 이성적 개인에 포함되지 않는다. 즉,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전 인민의 민주주의, 인민 주권과 어울리지 않는다.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결합할 수 있는 조건은, 제한 선거 제도하에서거나 민주주의가 형식화되어 인민 주권이 내용적으로 실현되지 못하는 조건에서뿐이다. 민주주의가 인민 주권을 실현하고자 하는 단초만 보이면, 자유주의자는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파씨즘, 나치즘으로 돌변하게 된다. 뿌리가 같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와 국가주의는 각각 가지고 있는 문제점의 해결책이 아니라 그 원인이다. 전체주의, 국가주의의 원인은 전통적인 공동체와 제도를 해체하여 인간이 생산수단으로부터 소외되어 나타난 결과이다. 국가주의는 원자화된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 폭력적으로 반발하는 가운데 등장했다. 정치적 사회적 동물로 태어난 사람들은 제대로 된 인간으로서 기능하기 위해 일군의 두터운 집단 연대를 필요로 한다. 가족, 공동체, 지역, 종교, 문화와 이어진 가장 깊은 유대를 빼앗겨 뿌리가 없어진 사람들, 이런 결속의 형태들이 인간의 자율성을 제한한다고 마음 깊이 믿게 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단 하나 남은 정당한 조직, 즉 국가나 민족을 통해 소속감을 느끼고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려 한다. 자본 물신성의 이면에 국가(민족) 물신성이 있는 것이다. 이는 동전의 양면이다. 자본이 모든 공동체와 정체성을 파괴하고 생산자로서의 사회성을 소외시켰다면, 여기서 불거져 나온 사회성, 정체성, 인정의 욕구는 국가(민족)라는 유사 종교를 낳았다. 국가(민족)라는 새로운 공동체와 연결되는 무수한 부분 단체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주의와 개인을 대표하는 개인주의만이 남는다. 개인화된 시민은 어떤 동료 개인에게도 지원을 기대하거나 인정받을 수 없다. 시민은 계약에 의해 맺어진 관계일 뿐이다. 나와 거래할 필요도 나와 경쟁할 필요도 없다면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모두 무기력하고 냉정할 뿐이다. 이를 합리적 개인이라 한다. 개인은 자연과 사회에서 취약한 존재임을 끊임없이 강요당한다. 그런 가운데 홀로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실체, 즉 국가를 마주한다. 시민은 이 실체를 개인적 취약함을 보강하는 유일하고도 긴요한 지지물로 여기게 된다. 이런 상황은 현대 자유주의 국가의 보편적 현상이다. 아무리 작은 정부를 추구해도 국가 지출은 한 사회의 총지출에서 적게는 30%에서 많게는 50%를 넘게 차지한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중앙 집권적 국가를 부정하기는커녕 더욱 강화시킨다. 개인의 파편화는 국가의 확장을 가져오고, 국가의 확장은 다시 개인의 파편화를 가져온다. 개인들은 거래와 경쟁으로 관계한다. 이런 거래와 경쟁은 권리와 책임으로 확장되고, 이를 조율하는 국가 권력의 강화를 요구한다. 법 앞의 평등이다. 자유주의는 법적 행정적 체제를 점점 더 많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런 법적 행정 체계인 국가 권력은 누가 장악하고 있는가? 파편화된 시민들인가? 롤스는 무지의 베일최소 수혜자의 최대 이익의 원리로 공정한 국가 체계가 가능하다고 한다. 무지의 베일은 롤스의 사회 계약에서, 사회 제도를 만드는 데 있어 사회 구성원들이 갖는 전제이다. 즉, 합리적 개인들은 자신이 미래에 어떠한 위치에 있을지 무지하기에 가장 최악의 조건을 가정하여 가장 약자가 가장 좋은 대우를 받는 계약을 체결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최소 수혜자의 최대 이익의 원리가 관철될 수 있다는 것이고, 이런 조건하에서 불평등을 용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롤스에 따르면 이를 통해 사회주의도 가능하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조국 법무부장관이 청문회에서 자신은 자유주의자며 사회주의자라고 한 말을 이해할 만도 하다.

 

그러나 롤스의 무지의 베일의 가정과는 반대로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를 정확히 알고 있다. 그들은 노동자, 여성, 이민자들과 자신들의 지위가 다르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그러므로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사회적 계약에 참여할 이유가 없다. 부르주아들은 다른 사회 구성원과 계약하여 사회 제도를 안정화시키지 않더라도 그들 자신만의 부를 통해 자기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 강남이 있듯이, LA에는 벨에어, 샌마리노, 베벌리힐스 등이 있고, 리우데자네이루에는 무장 경찰이 지키는 부르주아들만의 독립된 도시가 따로 건설되어 있다. 21세기의 부르주아들은 타자와의 계약을 통한 안전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에 의한 안정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사회의 최소 수혜자를 위해 세금을 낼 의사가 없다. 법적 행정 체계는 단지 노동자 민중을 착취 억압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의 기능이다. 다시 말해, 개인주의의 강화는 국가 기능의 강화를 가져오고, 국가 기능의 강화는 부르주아 지배의 강화일 뿐이다. 그것이 나치적 민족 국가주의이든 신자유주의의 애국주의이든 차이는 없다.

 

 

3. 지속 불가능한 자유주의

 

자유주의가 지속 불가능한 이유는 위에서 본 대로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있다. 자유주의의 이상은, 국가 등 어떤 권력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개인들의 사회이다. 그러나 그런 개인의 추구는 결국 잔인한 국가 권력을 결과했다. 원시적 축적의 잔인한 폭력, 자유 시장이란 미명하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약탈, 생활 영역의 확보를 위한 제국주의 전쟁, 신자유주의하에서의 군수 산업의 팽창과 개인의 감시(구글의 개인 정보 수집 등) 등등에서 그 단면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문제는 자유주의의 인간관에 있다. 자유주의는 어떤 공동체로부터도 독립적인 자유로운 개체를 인간으로 전제한다.

 

홉스는 인간의 본성을 이기적 존재로 보고, 자기 보호 즉 생존을 최우선시한다고 하였다. 홉스의 사고는 개인이라는 독립적 존재를 전제한다. 이런 독립적 개인이 계약을 맺어 사회를 이루고 국가가 탄생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회나 국가는 개인이 먼저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이들의 관계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독립적 존재로서의 개인은 근대의 산물일 뿐이다. 근대 이전의 개인은 언제나 집단 속의 개체였다. 이는 사회가 먼저인가 개인이 먼저인가라는 논쟁, 진화론에서 자연 선택의 주체가 집단인가 개체인가 유전자인가의 논쟁과 연관되는 문제이다. 다른 생물에 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겠으나, 인간의 경우는 사회가 개인보다 먼저고, 자연 선택의 주체는 집단이다. 유인원의 무리 집단이 인간 사회로 전화한 것이지, 유인원이 개별적으로 인간으로 진화한 다음, 즉 독립적 개인이 형성되고 나서, 개인들 간의 계약을 통해 사회를 만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유인원 무리는 지난한 세월을 집단적으로 생활하면서 무리 집단 속에서 특이한 속성이 생성되었는데, 이 특이한 집단적 속성이 집단 속에서 개인에게 교육되고 전이된 것이 개인을 형성하는 근원이며, 이 특이한 집단 속성이 사회를 이루는 본질이다. 유인원은 동물적 무리의 속성과 구분되는 사회적 속성을 획득함으로써 사회를 만들고 인간으로 진화한다.

 

그렇다면 동물 무리와 구분되는 인간의 사회적 속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과의 관계에서 생존 원리로서의 지배성과 이 지배성의 발현 주체인 사회(인간 집단)를 성형하는 원리로서의 집단성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르게 자연에 순종만 하거나 적응만 하면서 살아가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을 개조하고 변형시켜 지배하면서 자신의 생존을 담보한다. 옷을 해 입고, 불을 이용하여 날씨의 한계를 극복하고, 동물을 길들여 가축으로 기른다. 결국 농경을 시작하여 정주하고, 사회를 형성하여 자연으로부터 독립한다. 이스라엘 바이츠만 과학 연구소(Weizmann Institute of Science)의 론 밀로(Ron Milo) 교수에 의하면,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0.01%에 불과한 인간이 모든 야생 포유동물의 83%와 식물의 절반을 파괴했다고 한다. 인간이 유일하게 개체 보전을 지켜 준 생명체는 가축뿐이다. 이에 따라 현재 닭, 오리 등 가금류는 모든 조류의 70%, 소, 돼지 등 가축은 모든 포유류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의 총량은 포유류의 3분의 1 정도이다. 포유동물 가운데 야생에서 서식하는 동물은 불과 4%다. 이렇게 자연으로부터 독립한 인간 사회는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면서 현재에 이른 것이다. 이것이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생존 원리로서의 지배성이다. 동물 일반에 적용되는 자연 적응성이 아니라, 자연을 변화 개조시키는 지배성이 인간 사회의 고유한 특징이다. 자연에 적응하고자 한 유인원 집단은 사라지고, 자연을 지배한 유인원 집단만 사회를 이루고 살아남았다.

 

자연을 지배하고자 하는 집단적 과정 속에서 정교한 소통이 필요하였고, 그리하여 언어가 나타났다. 언어의 출현은 다시 의식의 고도화를 가속시켰다. 따라서 인간의 고도한 의식성은 사회적 속성인 것이지, 생물학적 속성이 아니다. 이는 늑대 소년의 예에서 실증된다. 늑대 소년은 생물학적 조건은 인간이었지만, 사회에서 성장하지 못하였기에 언어를 습득할 수 없었다. 즉, 의식이나 언어는 사회에서 형성되는 것이지 생물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의식 개념은 단순히 이성적 계산 능력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상호 관계에서 형성되는 제반 감정과 사고 작용, 잠재의식, 사회(집단)의식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이다. 이러한 언어의 정교화와 의식의 고도화는 인간 집단의 크기에 영향을 받는다. 자연을 정복하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집단의 크기가 클수록 유리하다. 집단이 커진다는 것은 인간관계가 복잡해진다는 의미이며, 인간 집단의 복잡한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호 협력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인간 사회의 속성이 집단성이다. 협력이 잘 이루어진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집단성의 발현은 개인의 산술적 합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단순 분업만 생각해 봐도 집단성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집단성은 사회 제도의 형성 원리이기도 하다. 일정 정도 이상 크기의 집단은 제도를 통하지 않고는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집단성은 개성이라는 전혀 다른 성질을 내포하고 있다. 개성이란 집단의 구성 요소인 개인의 능력과 역할이다. 집단이 커지거나 정교화ㆍ고도화됨에 따라 개성도 발전한다. 그리고 개성의 발전은 다시 집단성을 발전시킨다. 즉, 사회성이 강화될수록 개인의 자유도는 높아진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이런 집단성과 개성을 대립시킨다. 자유주의는 집단성과 개성을 국가주의와 개인주의로 분리 대립시키며, 서로서로 자기 존재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런 분리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어느 한쪽의 강화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이 어느 한쪽의 강화는 다른 쪽의 강화로 결과한다. 현실은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의 이상과도 전체주의적 자유주의의 이상과도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점점 그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커지고 있다.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이론은 현실에 의해 붕괴되고 말 것이다.

 

 

4. 대안은 변증법적 총체주의이다

 

자유주의(개인주의와 전체주의)에 대립되는 입장으로 변증법적 총체주의가 있다. 이는 헤겔로부터 발원하여 맑스주의로 지양ㆍ발전되어 온 사고방식이다. 한마디로 결론부터 말한다면, 개인(개체, 부분)=전체라고 보는 사유 방식이다. 헤겔이 진리는 전체이다라고 할 때, 이 전체는 변증법적 총체성을 말한다. 그리고 맑스가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말할 때, 이 총체가 바로 변증법적 총체성이다. 이는 헤겔식 용어로는 구체적 보편성이다. 구체적인 것은 개별, 부분이고, 보편성은 전체이다. 헤겔은 국가를 구체적 보편성이라고 보았고, 맑스는 시민 사회(사회 구성체)를 구체적 보편성이라고 보았다.

 

총체성 개념을 이해하는 핵심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이다. 우리는 위에서 부분과 전체를 이해하는 잘못된 사고를 보았다. 부연하면, 방법론적으로 부분을 강조하게 되면 환원주의(개인주의)에 빠지고, 전체를 강조하게 되면 신비주의(전체주의)에 빠진다. 헤겔과 맑스의 방법은 부분과 전체의 통일이다. 어떤 한 사물 대상은 구성 요소들로 분할할 수 있다. 그리고 구성 요소들의 결합이 부분을 이루고, 부분들의 총결합 구조가 전체를 이룬다. 이렇게 구성 요소와 결합 구조적 측면에서 볼 때, 사물은 전체, 부분, 개별 요소로 분리된다. 반면 관계적 측면에서 볼 때, 사물은 개별 요소와 개별 요소의 관계, 개별 요소와 부분의 관계, 부분과 부분의 관계, 개별 요소와 전체의 관계, 부분과 전체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총체성 개념은 이런 요소별 구분과 관계적 다양성을 통일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변화를 담지해 내야 한다. 총체성 개념에서 어려운 점은 구조 속에 변화가 내포되어 있다는 점과 전체가 개별 요소와 같아진다는 지점이다.

 

이를 멱집합을 통해 비유적으로 설명해 보자.

멱집합이란 어떤 집합의 부분 집합을 원소로 하는 집합을 말한다. 예를 들어, 집합B={1, 2}가 있다고 하자. 집합B의 멱집합은 { { }, {1}, {2}, {1, 2} }이다. 공집합 { }의 멱집합은 { { } }가 된다. 여기서 핵심은 자기 자신을 원소로 갖는 집합이라는 점과 공집합의 멱집합은 원소가 없다가 하나 생성된다는 점이다. 집합B={1, 2}의 구성 요소는 1과 2 둘 뿐이고 전체는 {1, 2}이다. 그런데 집합B={1, 2}의 멱집합은 구성 요소의 변화는 없으면서 관계의 변화만으로 전체 {1, 2}가 새로운 구성 요소가 된다. 여기서 전체가 구성 요소가 되고 부분이 되는 사고방식을 잡아낼 수 있다. 이 집합에서 구성 요소는 1과 2뿐이며 전체는 {1, 2}이고 외부에서 다른 요소가 첨가된 것도 없고 빠진 것도 없다. 그러나 멱집합은 요소의 단순 총합 그 이상일 뿐만 아니라 전체가 부분이 된다. {1, 2}는 전체이면서 부분인 것이다.

집합B와 멱집합B의 사이에는 구성 요소들이 관계하는 결합 구조의 차이만이 존재한다. 구성 요소의 차이는 없다. 결합 구조는 관계이다. 어떤 사물의 본질이나 속성은 그 사물의 구성 요소로 환원해서 설명할 수 없고, 구성 요소의 결합 구조, 즉 관계를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원자 중심의 실체주의가 아닌, 결합 구조의 관계 중심으로 사물을 바라보아야,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멱집합적 사고로 전체를 바라볼 때, 어떤 사물 대상이 발전하는 결합 구조를 변화 발전의 상태 그 자체로 볼 수 있다. 어떤 집합에 멱집합을 입히고 다시 그 멱집합에 다시 멱집합을 입히는 구조를 사고해 볼 수 있다. 그러면 사물 자체의 자기 변화와 확장성을 내재적으로 그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멱집합의 부분 집합의 개수만을 생각해 보자. 공집합은 부분 집합이 없다. 공집합에 멱집합을 입히면 부분 집합이 하나 생긴다. 다시 거기다 멱집합을 입히면 이제는 부분 집합의 개수는 2개가 된다. 다시 여기에 멱집합을 입히면 이제 부분 집합의 개수는 3개가 된다. 이렇게 무수히 발전할 수 있다.

 

이렇게 멱집합의 예를 들어 비유적으로 설명했듯이, 변증법적 총체성은 전체와 부분이 대립되지 않고 통일되어 있으며, 부분이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부분이 된다. 그리고 결합 방식의 구조가 고정된 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 변화하는 관계로 실존한다. 그러면서도 모든 관계를 모두 포괄한다. 이것이 전체와 다른 총체성이다. 여기에 총체성을 이루는 관계들이 모순적이고 대립적이라는 것이다. 변증법적 총체성이다.

 

이런 총체성의 원리에 기초한 사회가 사회주의 사회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자본의 자기 증식의 원리에 기초한 사회라면, 사회주의 사회는 사회 구성원의 욕망 실현의 원리에 기초한 사회이다. 자본주의가 자본가의 욕망 실현이 목적이라면, 사회주의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욕망 실현이 목적이다. 자본주의의 인간관계가 거래와 경쟁의 원리에 의해 작동한다면, 사회주의는 욕망 추구와 절제의 원리에 의해 작동한다. 자본주의가 개인주의와 전체주의에 기초한다면, 사회주의는 총체적 집단주의에 기초한다. 자본주의 국가 체계에서는 자본가들만 자기 집단의 독립성을 유지한다. 즉, 권력과 독립적으로 관계한다. 나머지 소위 시민들은 국가에 개인적으로 관계한다. 노동자 민중의 생산 조직, 소비 조직, 임의 조직, 정치 조직들은 국가 권력에서 철저히 분리되어 고립되거나, 관리 대상, 억압 대상이 된다. 그러나 사회주의에서는 노동자 민중의 지역 조직(쏘비에트나 인민위원회) 체계가 직접적으로 국가 행정 조직이 되며, 생산 조직(노동조합, 협동조합), 소비 조직(협동조합)이 정치 조직(당)이라는 조직적 혈관에 의해, 행정적 권력 조직과 연결된다. 이렇게 해서, 개체, 부분, 전체는 하나로 통일되며, 동시에 각자 분리된다.

 

자유주의의 역사적 경로는 사회주의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고전적 자유주의의 부정으로 전체주의가 대두되었다. 고전적 자유주의와 전체주의의 통일이 새로운(new) 자유주의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자유주의에 대한 반발로 신(neo)자유주의가 나타났다. 이제 신자유주의는 현실에 의해 부정되었다. 이런 자유주의의 악순환은 결국 개인주의와 전체주의의 순환적 과정이다. 자유주의의 이런 악순환은 변증법적 총체주의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노사과연

 

 

[참고 자료]

단행본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개정신판), 돌베개, 2017.

로이 바스카, ≪비판적 실재론과 해방의 사회과학≫, 이기홍 역, 후마니타스, 2007.

조하나 보크만, ≪신자유주의의 좌파적 기원≫, 홍기빈 역, 글항아리, 2015.

패트릭 J. 드닌, ≪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 이재만 역, 책과함께, 2019.

에드워드 윌슨, ≪지구의 정복자≫, 이한음 역ㆍ최재천 감수 해설, 사이언스북스, 2013.

김창인ㆍ이현범ㆍ전병찬, ≪청년, 리버럴과 싸우다≫, 시대의창, 2018.

나카마사 마사키, ≪현대 미국 사상―자유주의의 모험≫, 송태욱 역, 을유문화사, 2012.

새뮤얼 보울스ㆍ허버트 긴티스, ≪협력하는 종≫, 최정규ㆍ전용범ㆍ김영용 역, 한국경제신문, 2016.

김만권, ≪호모 저스티스≫, 여문책, 2016.

윌리 톰슨, ≪20세기 이데올로기≫, 전경훈 역, 산처럼, 2017.

 

논문

최미향, Renato Cristi의 Carl Schmitt 해석: 권위주의적 자유주의≫, 인하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공법 전공(석사 논문), 2003.

신재길, 헤겔과 맑스주의 국가론의 철학적 방법론적 기초에 대하여, ≪정세와 노동≫ 제148호(2019년 2월).

신재길, 헤게모니 이행기에 전쟁은 필연적인가?―전쟁의 원인, 경제와 전쟁의 순환구조 그리고 미중대결, ≪정세와 노동≫ 제145호(2018년 8/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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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길 교육위원장

2개의 댓글

  • 결단주의자인 칼 슈미트의 이론에 대해 조금 잘못 이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칼 슈미트는 분명히 나치의 직접 행동에 영향을 줬으며, 우익 법학자(볼셰비키에도 반대한)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자신이 자유주의 논리나 우익의 보수주의 논리에 얽매인 법학자는 아니었습니다. 가령, 자유주의 사회하에서 ‘법치’라는 틀은 ‘여러 상대가 공존하는 정치공간’에서 첨예한 대결을 통해 나타나는 규범에 지나지 않으며, 이러한 규범을 절대화한 것이 자유주의이고, 그렇기에 자유주의는 허황된 논리라는 것이 칼 슈미트의 지적이었습니다. 상시화 된 적대 관계는 예외상태를 낳게 되고 결국 법의 공간이라 생각되는 것도 결과적으로 정치의 공간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순수한 법치는 없다는 게 칼 슈미트의 결단주의 이론의 골자죠.

  • 칼 슈미트는 자유주의 내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법적 문제’들이 사실은 정치적 투쟁의 연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옳게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1)그 투쟁의 발생 지점을, 법으로는 전혀 해결할 수 없는 정치 공간인 ‘예외 상태’라는 공간 안에서만 찾고 있으며, (2)동지와 적이라는 두 세력 구도를 오로지 가시적으로 보이는 거대한 두 세력의 싸움(의회 내)으로 치환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오류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3)그는 투쟁이 모순을 최소화하는 방향성을 갖고 있다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오히려 (4)예외 상태하에서 정치세력이 결단을 통해 규범(법치주의자들이 법을 규범의 상징으로 여기고, 규범을 중시하는 것처럼 슈미트도 평화로운 상태인 ‘규범’을 투쟁의 목표로 상정했습니다)을 회복하는 것에 무게를 뒀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5)그 규범 자체를 파괴하고, 그것을 원천무효하려는 세력이 볼셰비키라고 했죠. 아마 (4)와 (5)의 지점에서 그가 ‘파시즘의 법학자’라고 불리는 원인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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