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회원마당] 미 제국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침탈사 훑어보기(상)

 

 

 

김형균 | 회원, 철도노동자

 

 

[차례]

I. 미 제국에 대한 한국 인민의 인식

1. 해방 후

2. 80년 광주 민중 항쟁

 

II. 미 제국의 탄생과 성장

1. 네이티브 아메리칸(인디언)의 무덤 위에 세워진 미합중국

2. 독립(반역) 전쟁의 진실(1776-1789)

3. 독립 후 영토 확장, 서부 개척 시대(1803-1848)

4. 남북 내전(1861-1865)

5. 대륙 횡단 철도(서부 개척) 건설과 원주민의 봉기

6. 제국주의 시대, 해외로 팽창(1800년대 중반 이후)

7. 제1차 세계 대전

8. 제2차 세계 대전

9.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과 미 제국의 세계 지배

 

III. 미 제국의 중남미 침탈사

쿠바, 멕시코, 칠레, 아르헨티나, 니카라과, 과테말라, 파나마, 엘살바도르,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브라질, (볼리비아, 페루, 파라과이, 우루과이, 아이티, 온두라스)

ㆍㆍㆍ <이상 이번 호에 게재된 부분>

 

IV. 미 제국의 중동ㆍ아프리카 침탈사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이란, 팔레스타인, 리비아, 콩고, 르완다, 수단, 소말리아, 앙골라

 

V. 미 제국의 동남아ㆍ태평양 침탈사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서뉴기니, 하와이ㆍ괌,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한국)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어느 노조에서 미국에 대해 강의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용감하게(?!) 수락하면서, 부랴부랴 몇 권의 책을 구입하여 공부하면서 강의를 준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독자들에게 유익하겠다는 생각에 결국 원고로 작성하게 되었다. 이 글 중에서 침탈사를 요약하는 내용의 대부분은 황성환 님이 지은 ≪아메리카 제국의 몰락≫을 발췌 수준에서 요약한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미 제국이 전 세계 인민의 피를 먹고 자랐다는 역사적 사실을 실증적으로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미 제국의 탄생과 확장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저들이 어떻게 전 세계 약소국 인민들을 침탈하고 지배해 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미국이 개입한 모든 전쟁은 그 명분과 구실이야 어쨌든 간에 모두가 영토 확장과 식민지 확보, 자원 수탈, 소비 시장 확대, 세계 지배 등을 위한 침략 전쟁이었다. 그래서 한국을 포함해 제3 세계로 표현되는 각국의 현대사를 들여다보려면, 미 제국의 개입을 빼놓고는 이해할 수가 없다. 당연하게도 한(조선)반도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주요한 사건의 배후에는 늘 미 제국이 있었다.

제국주의의 침탈의 역사 과정에는 제국주의 시대의 4대 모순, 즉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간의, 제국주의 국가 간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진영 간의, 제국주의와 식민지 혹은 신식민지 인민 사이의 대립과 투쟁이 얽혀 있다. 그리고 정치경제학적 법칙이 면면히 관철되는 과정임을 염두에 두는 것도 좋겠다.

 

 

I. 미 제국에 대한 한국 인민의 인식

 

1. 해방 후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1년이 지난 1946년 8월, 미 군정청 여론국이 전국 8,453명을 대상으로 3가지 항목을 열거하여 어떤 체제를 선호하는지 설문 조사를 했다. 선택지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모릅니다였다. 답변의 결과는 자본주의(1,189명, 14%), 사회주의(6,037명, 70%), 공산주의(574명, 7%), 모릅니다(653명, 8%)였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선 인민들은 자본주의 사회 체제에 대해서는 14%만 지지하여 자본주의를 거부했다. 해방된 조선이 새롭게 건설할 자주독립 국가는 사회주의 사회 체제를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 1946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

 

해방을 맞이한 당시의 조선 인민은 145개의 건국준비위원회를 건설했고, 지방 수준에서는 인민위원회로 신속하게 전환하였다. 1945년 9월 6일에 인민대표 1,000여 명이 서울에 모여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그러나 9월 8일 인천에 상륙한 미군은 점령군으로서 군정을 실시하며, 인민공화국을 부정하고, 결국 무력으로 분쇄한다. 조선의 인민들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지켜내기 위해, 10월 인민 항쟁(대구 항쟁), 제주 4ㆍ3 항쟁, 여순 봉기, 그리고 이남 거의 모든 산악 지역에서의 게릴라 투쟁으로 미군정과 맞섰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선에서 노동자ㆍ인민들은 스스로의 지향과 이념을 바탕으로 한 자주독립 국가를 세우려다, 또 그것을 지키려다가, 미 제국과 그들과 동맹 세력인 이승만 일당을 비롯한 지배계급에 의해 무자비한 탄압과 살육을 당해야 했으니, 인민들에게 미 제국은 철천지원수일 뿐이었다.

 

2. 80년 광주 민중 항쟁 이후

하지만 미 제국을 철천지원수로 여기던 인민들의 인식은 180도 바뀌었다. 1980년대 한국에서의 미국 이미지의 변화1)라는 보고서에 의하면, ▲60년대, 여론 조사 결과 국민 68%가 미국을 가장 좋아하는 나라로 답했고, 싫다는 반응은 1%에 불과했다. ▲70년대, 공개적으로 미국을 반대하거나 비난하지 않아,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반미가 없는 나라였다.

1980년 광주 민중 항쟁 당시 미국 정부는 오키나와에 있는 조기 경보기 2대와 필리핀에 정박 중인 항공 모함 코럴시호를 한국 근해에 긴급 출동시켰다. 금남로와 도청 앞 분수대에 모여든 수만 명의 시민들은, 우리의 우방인 미국은 계엄군의 학살 만행을 결코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부산 앞바다에는 미 7함대 소속 항공 모함이 도착했다며 환호했다. 이는 1980년의 한국 인민들의 미국에 대한 인식을 극적으로 표현해 준다. 미국을 우리의 우방, 민주주의의 수호자, 정의의 사도로 여겼던 것이, 당시의 인식이었음을….

일제로부터 해방된 직후에 왕성했던 노동자ㆍ인민들의 사회의식, 특히 미 제국에 대한 인식은, 완전히 포맷된 상태였다. 해방 후 미군정기, 48년 이후 이승만 독재, 그리고 한국(조선) 전쟁을 거치면서, 이남의 변혁 세력은 절멸되었고, 정치ㆍ사상의 자유는 국가보안법과 국가 폭력 앞에서 질식당해 왔다. 미 제국의 신식민지이자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의 주류가 주도하는 이데올로기가 이 사회의 지배적인 사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인민의 미 제국에 대한 인식은, 80년 광주 민중 항쟁을 거치면서 다시 진실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80년 12월 광주 미문화원, 82년 4월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으로 미 제국에 대한 불만이 폭발했다. 82년 4월 20일에는 한국사회선교협의회가 최초로 공개적인 반미 성명을 발표했다. 87년에는 학생 시위 때 미제 타도, 주한미군 철수 등의 주장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88년 쇠고기 수입과 양담배 시장 개방 등 미국의 수입 개방 압력 문제가 대두되면서, 한미 관계의 문제는 안보ㆍ군사ㆍ정치적 문제에서 경제 문제로도 옮아가게 되었으며, 반미 제국주의 문제는 통일 문제와도 결합되어, 미군의 한국 주둔이 한(조선)반도의 분단을 고착화시키고 있다는 인식하에서, 미 제국을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가로막는 적대적인 존재로 보게 되었다.2)

한편, 한국의 사회 성격 혹은 사회 구성체를 둘러싼 논쟁 등, 한국 사회에 대한 사회과학적 탐구가 심화되면서, 변혁적 노동 운동이 다시 살아났다. 한국이 미 제국의 (신)식민지라는 사실은 변혁 운동 진영 내에서는 일반적인 인식이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91년 쏘련 해체를 목도한 운동가들은 변혁적 전망을 상실한 채 썰물처럼 계급 투쟁 전선을 이탈해 갔다. 광주 민중 항쟁이라는 피로 쓴 경험을 통해서 싹을 틔운 한국의 변혁적 노동 운동은,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사상ㆍ이론의 발전을 도모하지 못한 채, 이데올로기적 혼돈 속에서 표류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한국의 변혁 운동은 통칭하여 NL과 PD로 분열이 고착화되었고, 소부르주아적 민족주의와 협소한 경제주의, 종파적 패거리주의가 횡횡하게 되었다.

 

 

II. 미 제국의 탄생과 성장

 

미 제국은 세계 최대의 경제 대국이자 군사 강국이다. 2019년 IMF 통계에 따르면, 미국의 GDP는 약 21.6조 달러이고, 2018년 기준 전 세계 GDP의 25%(국제연합 통계)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 미 국방부가 의회에 제출한 내년도 국방 예산은 7,500억 달러(825조 원)에 이른다(2019년 3월 25일자 ≪주간조선≫ 기사). 이는 전 세계 국가들의 국방 예산 전체의 3분의 1이 훨씬 넘는 수치다. 국방기술품질원이 세계 주요 국가들의 방산시장 현황을 분석하여 발행한 ≪2018년 세계방산시장 연감≫에 따르면, 2017년도 기준으로 전 세계 국가들의 국방비 지출 규모는 1조7,390억 달러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떻게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 될 수 있었을까?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근면ㆍ성실한 청교도 윤리 때문일까? 그 해답은 미국의 탄생과 성장 배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1. 네이티브 아메리칸(인디언)의 무덤 위에 세워진 미합중국

1) 1492년 10월 이른바 신대륙 발견

미국의 탄생은 1492년 10월 12일 황금을 약탈하기 위해 아메리카 대륙 중남부에 위치한 바하마 군도에 상륙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서 시작된다. 원주민이 살고 있던 이 땅을 신대륙이라고 부른 것은 일방적인 백인 정복자의 관점이다.

백인이 침략하기 3,000년 전 아메리카 대륙에는 지금의 유칸 반도에 마야(Maya) 문명 등 토착 문명, 멕시코를 중심으로 약 2,500년 전에 번성한 사포텍(Zapotrc) 문명, 10-12세기경 멕시코 중부 지역에서 번성한 톨텍(Toltec) 문명, 12세기경 볼리비아 티티카카 호수 주변에 출현하여 스페인에 정복당할 때까지 존속한 잉카(Inca) 문명, 안데스 산맥 주변인 페루와 볼리비아 인근에서 번성한 아이마라(Aymara) 문명, 멕시코 호수를 중심으로 번성한 아즈텍(Aztec) 문명 등이 있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사회생활과 의식 세계를 연구한 미국의 문화 인류학자 루이스 모건은 원주민 이로쿼이족(Iroquois)에 관한 연구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족의 구성원들은 각기 자유인의 신분으로서, 성문화된 규율은 없으나 족장이나 추장도 우월한 지위에 있지 않았고, 자유ㆍ평등ㆍ박애가 생활의 윤리였다.

콜럼버스 이전,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흩어져 살던 원주민의 수를 정확히 알 수는 없고, 학자들에 따라 다양한 추정치가 있으나, 최대 1억 명, 북미 대륙에만도 약 3천만 명이 살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1900년 당시 미국에 거주하던 원주민은 1백만 명도 채 되지 않았다. 현재에도 미국에 살고 있는 원주민은 알래스카와 하와이를 포함해도 전체 인구의 1.2%라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미국 본토에 살고 있는 원주민은 대략 1백만 명 내외다.

북미 대륙에서 1만 년 이상 살아온, 크리크족, 수우족, 샤이엔족, 아라파호족, 코만치족, 푸에블로족, 나바호족, 아파치족, 체로키족 등 약 3천만 명 이상의 원주민은 19세기 말에 이르러 불과 1백만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백인들과 같이 들어온 천연두 등 전염병은 면역력이 없었던 원주민들에게 치명적이었다. 출산율과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을 감안하더라도, 당시 신대륙 개척이라는 미명 아래 자행된 백인들의 학살 만행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2) 17세기 초부터 본격적인 백인 이주, 원주민 인종 청소

17세기 초, 버지니아와 캐롤라이나에는 영국인(뉴잉글랜드)이, 루이지애나는 프랑스인(프랑스령 루이지애나)이, 뉴욕과 뉴저지에는 네덜란드인(뉴네덜란드)이, 델라웨어에는 스웨덴인(뉴스웨덴)이, 플로리다에는 스페인인(누에바 에스파냐)이 각각 식민지를 구축했다.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 서구인에 의한 남북 아메리카의 탐험과 개척, 원주민(네이티브 아메리칸)에 대한 학살과 영토 약탈이 시작되었다.

17세기 초 영국은 사회의 골칫거리인 도시 빈민과 알코올 중독자 등 우범자와 당시 이단으로 여겼던 극소수의 프로테스탄트를 국외로 추방하는 목적으로 아메리카에 이주시켰다. 이들이 점차 담배 경작 등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20년 동안 수만 명의 백인이 신천지로 몰려들었다. 17세기 중반 이후 영국은 자원 확보와 소비 시장 확대 등 제국주의 정책을 노골화했고, 유럽의 국가들도 그 경쟁에 뛰어들었다. 북미 대륙에 정착한 이주민 수는 1700년 약 25만 명, 1760년 150만 명에 이르렀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인 1790년에는 약 400만 명으로, 그리고 1830년에는 무려 1,300만 명으로 백인이 늘어난 만큼, 포악한 학살로 인해 원주민 수는 급감했다.

콜럼버스의 상륙을 기념하는 콜럼버스의 날은 인디언 학살의 상징일로 원주민들이 시위를 결행하는 날이다. 미국 인디언들은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의 추수 감사절에는 대규모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미국은 원주민 학살만이 아니라 강제 이주(1830년대부터), 원주민 정체성 말살 정책 등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왔다. 1622년 메이플라워호 이민자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해 버지니아 원주민이 집단 무장 저항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저항들이 북미 대륙 전역에서 250년 동안 이어져 왔다.

 

2. 독립(반역) 전쟁의 진실(1776-1789)

1) 독립 전쟁의 배경

제국주의 정책을 노골화하면서 영국은 1664년 네덜란드로부터 뉴욕을 빼앗고, 1690년에는 뉴욕 지배권을 놓고 프랑스와 충돌했다. 1702년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했고 1763년 플로리다 지역을 두고 스페인과도 전쟁을 벌였다. 북미 대륙에서 힘의 우위를 확보하게 된 1760년대까지 영국은 계속해서 주변 유럽 제국들과 충돌했다.

유럽 제국과 원주민과의 전쟁을 통해 지배 영역을 확대한 영국 본국 정부에게, 13개 북미의 광활한 식민지를 운영하기 위한 재정 수요가 늘어났고, 이주민들에 대한 통치 질서를 바로 세울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식민지의 자치 입법권 및 사법권을 본국 정부에 귀속시키고(1686년 제임스 2세의 칙령), 식민지로 반입되는 설탕, 커피, 포도주, 견직물 등에 대한 관세를 인상하는 설탕법을 제정하고(1764년), 다음 해에 인지세법과 영국군 주둔 비용 조달을 위한 숙영법을 제정하였다.

 

2) 본국에 대한 반역 전쟁과 미합중국의 성립

미국의 독립 전쟁은, 본질적으로는 이주한 기득권 세력들이 이권 때문에 본국인 영국에 대해 일으킨 반역 전쟁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영국 이주민들의 반역 움직임은 영국 본국의 설탕법 제정으로 시작되었다. 이주민들은 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이라는 모국에 대한 비밀 반란 테러 단체를 만들어, 영국 관료에게 테러를 가하면서 저항하기 시작했다. 1766년 영국 왕이 인지세법 폐지를 선언했지만, 숙영법 폐지를 주장하는 이주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이에 영국 정부는 결국 숙영법도 폐지하고 차(Tea)에 대한 관세만 존속시켰다.

하지만 이주민 지배계급은 차에 대한 영국 정부의 독점권을 거부하고, 1773년에 보스턴 항구를 습격하여 이른바 보스턴 티 파티(Boston Tea Party) 사건을 일으켰다. 이에 영국 정부는 1774년 보스턴 항구법, 매사추세츠 통치법 등, 이주민들이 소위 참을 수 없는 법(Intolerable Acts)이라 불렀던 일련의 법률들을 제정하여, 바다에 버려진 차에 대한 배상이 이루어질 때까지 보스턴 항구 폐쇄, 질서 유지군 파견 등을 결정하였다.

1775년 4월 19일 밤, 70여 명의 반란군 무장대가 영국군의 탄약고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1775년 9월 초부터 2개월에 걸쳐 13개 식민지 대표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필라델피아에 모여 대륙회의를 개최하여 주별 군대 동원을 결의했다. 다음 해인 1776년 5월에 2차 총회를 소집하여 존 핸콕을 임시 대통령으로, 조지 워싱턴을 1만7천여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전쟁 초기 이주민들은 패배를 거듭했으나, 영국과 패권 다툼을 벌이던 프랑스(루이 16세)와 스페인, 프로이센 등의 지원을 받게 되었고, 1783년 9월 빠리 평화 협정을 맺음으로써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1783년 독립, 1787년 미합중국 헌법 발표, 1789년 연방 국가 발족).

 

3. 독립 후 영토 확장, 서부 개척 시대(1803-1848)

1)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와 뉴올리언스 구입

1803년,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미시시피 강 유역의 상업을 장악하기 위해 프랑스의 나폴레옹으로부터 루이지애나 지방과 뉴올리언스를 매입했다. 이로 인해 미국의 영토는 두 배로 증가했다. 물론 이는 미국과의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나폴레옹의 정치적인 계산과 영토를 넓히려는 미국의 욕심에 따른 것이다.

 

2) 서부 개척과 인디언 말살 정책

처음에 13개주로 시작했던 미국은 여러 정책들과 밀려오는 이민자들을 기반으로 해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팽창해 나간다. 1803년부터 1848년까지는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라고 불린다. 몰몬교도들, 국외로부터 들어오는 이민자들, 골드러시의 영향으로 금광 채굴에 관심이 있는 이들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서부로 대거 이주하였다. 당시 백인들은 담배 농사에 필요한 새로운 농토를 찾아서 서부로 이동했는데, 이러한 백인들의 서부 이동은 북미 원주민들의 생존권을 위협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인디언 보호 구역 강제 수용(1830년), 세 차례에 걸친 인디언 학살(약 300만 명 학살), 인디언들의 식량 동물인 들소 학살 등 인디언 말살 정책을 통하여 그들의 토지를 강탈하였다. 인디언들은 그들의 생활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 백인들에게 저항했으나, 백인들의 화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3) 세 차례에 걸쳐 멕시코 땅을 빼앗다

미국은 멕시코 땅을 세 차례에 걸쳐서 빼앗았다.

첫 번째는 미국이 1836년 멕시코 땅이었던 텍사스를 내부에 반군을 육성하여 분리 독립 선언하게 했다. 알라모 반군들에게 멕시코 왕국에 반란을 일으키면 지원하겠다고 약속한다. 반군들이 그 말을 믿고 실제 반란을 일으켰지만, 미국이 지원하지 않아서 모두 몰살당하게 된다. 미국은 이를 빌미로 그해 9월에 반군과 함께 멕시코를 침공하여 텍사스를 빼앗았다. 한동안 미 제국은 주변 국가들의 비난을 의식해 텍사스 공화국이라는 괴뢰 정부를 유지하다가 1845년 미국의 28번째 주로 편입했다.

그 이후 미 제국은 더 넓은 땅을 차지하려고 멕시코 영토의 일부를 3천만 달러 선에서 매입하려 했으나 멕시코로부터 거절당한다. 이때에도 멕시코 침탈 공작을 벌이고 결국 침공하여 거대한 땅을 빼앗는다. 침략 명분 만들기를 보면, 리오그란데강 국경에 일부러 소수를 보내서 죽게 한 후 이를 명분으로 침공했다. 1846년 5월에 시작된 미 제국의 침략 전쟁은, 1848년 2월 멕시코 땅 3분의 1이 넘는 현재의 텍사스, 콜로라도, 애리조나, 뉴멕시코, 와이오밍,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주를 차지한 이후에 끝났다.

1853년에는 지금의 애리조나와 뉴멕시코 일부 지역을 더 차지하려고 갖은 협박과 계략을 써서 2천만 달러라는 헐값으로 그 지역을 구입했다. 이것은 구입의 형식을 띠었지만 사실은 멕시코로부터의 3차 영토 강탈이었다. 이렇게 미국은 세 차례에 걸쳐 멕시코 영토를 탈취했던 것이다.

 

4. 남북 내전(1861-1865)

1) 내전의 배경

미국의 북부는 자본주의 공업이, 남부는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노예 노동에 기초한 농업이 발전했다. 남부와 북부 지배 세력 간에 주도권 싸움이 벌어졌다. 공화당이 연방 권력을 잡고 자국 공산품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관세를 올리는 보호 무역주의 정책을 밀어붙였다. 통관 관세를 최고 80센트까지 올리는 정책인데, 이렇게 되면 외국 공산품이 못 들어오니까 국내 공업은 발달할 수 있지만, 농산물의 수출은 영국의 관세 장벽 때문에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 남부의 대지주들에 기반을 둔 여러 주 정부들은 연방 정부의 보호 무역 정책에 맞서 저항하기 시작했다.

 

2) 노예 해방 선언, 전쟁 전술이자 노동력 확보 정책

1861년 미국 남부의 총 11개 주가 연방에서 탈퇴하고, 4월에 남부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항의 섬터 요새를 포격하는 것으로 시작된 남북 전쟁은, 1865년까지 4년 동안 지속되었다. 전쟁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자 1863년 1월 링컨은, 흑인 노예 해방 선언을 전술로 채택하게 된다. 북군이 수세에 몰리는 상황에서 노예 해방을 선언하자 전세가 역전되었다. 전선에 동원되었던 남부의 흑인 노예들이 전선을 이탈했기 때문이다.

노예 해방 선언은 내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북군의 전술로써 사용되었고 또 주효했다. 그런데 노예 해방을 선언하게 된 보다 근본적인 경제적 배경은, 노예 노동에 기초한 남부의 농업과 달리 자본주의적 공업이 발전한 북부에서는 자유로운 노동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의 남북 내전은 북부의 공업이 남부의 농업에 대하여 거둔 승리라고 할 수 있다.

 

5. 대륙 횡단 철도(서부 개척) 건설과 원주민의 봉기

1) 남북 내전 중에도 계속된 대륙 횡단 철도 건설

미국 최초의 대륙 횡단 철도는 1869년 5월 완공되었다. 새크라멘토와 오마하 사이를 잇는 총연장 1,756마일(2,827km)이 넘는 이 철도는, 연합 태평양 철도(Union Pacific Railroad)와 중태평양 철도(Central Pacific Railroad) 두 회사가 6년 만에 놓은 것이었다. (그 이후에도 1883년에는 캔자스주 애치슨에서 로스엔젤레스 사이, 1883년에 시카고와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세인트폴 사이, 1909년에는 시카고와 밀워키, 세인트폴 철도, 태평양 철도 등의 부설이 이어졌다.)

링컨 대통령은 남북 전쟁 중에도 동서 교통 기관이 되는 대륙 횡단 철도 건설을 진행했다. 한편 횡단 철도의 완성으로 서부와 물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다시 한 번 서부 개척 시대가 왔다. 광대한 서부에서는 방목이 활발히 이루어지게 되었다. 소를 모는 생활을 하는 카우보이는 서부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농업은 적은 인구로 효율적으로 생산하기 위해 기계화가 진행되어, 대규모 농업을 할 수 있었다. 철도, 도로망 등의 확장에 힘입은 국내 시장의 확대는 공업을 비약적으로 발달시켰다. 미국의 영토는 서쪽으로 태평양까지 뻗어 나갔고, 1868년에는 북부 알래스카를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유상으로 구입했다.

그 과정에서 평원의 인디언들은 생활의 터전을 빼앗기고, 보류지에서 굶주리게 되었다. 서부 인구는 더욱 증가했고, 급속도로 생활권을 빼앗긴 인디언은 1860년대에서 1870년대에 걸쳐 각 부족이 일제히 봉기했다. 이것이 미국-인디언 전쟁인데, 미합중국 군대와 인디언들 간에 20년 이상 싸움이 계속되었다. 인디언 지도자들은 전투에서 죽거나 독살되었고, 부족 공동체도 무너지고 인구도 감소하였다. 또한 토지 약탈법인 도스법으로 인디언 사회는 근본적으로 파괴되었고, 그들의 땅 대부분은 백인 농부에게 넘어갔다.

미합중국 정부는 1778년부터 1868년까지 100년 미만 시기에 인디언으로부터 1억1000만 에이커(44만5200km2)의 토지를 몰수하고 768만km2의 땅을 압수했다. 서부 최대의 반항 세력이었던 수족도, 남서부의 아파치족도 결국 투항하게 된다. 1890년 수족 수백 명을 학살한 운디드니 학살을 계기로 미국 정부는 개척에 방해가 되어 온 인디언 소탕 작전을 종료한다고 선언했다.

 

6. 제국주의 시대, 해외로 팽창(1800년대 중반 이후)

1) 미국의 독점자본주의화와 제국주의화

남북 내전 후부터 19세기 중엽까지 미국은, 산업 혁명으로 자본주의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급속히 독점화되었다. 공업 도시들이 발달했고, 빈부 격차가 늘어났으며, 슬럼가나 범죄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노동 운동은 강화되었다.

풍부한 석유 자원을 가진 미국의 공업력은 영국을 제치고 세계 최고가 되었다. 강력한 기업 연합체와 독점 기업이 성장하여, 엑셀, 앤드류 카네기, 존 모건, 존 D. 록펠러는 일약 거대 기업을 일구었고,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후 미국 경제는 이들 재벌들에 의해 운영되게 된다.

서부 개척 시대(대륙 횡단 철도 건설 등)가 끝나자, 미합중국은 국경을 더욱 해외로 넓히기 시작했다. 1889년에 전미회의(Pan-American Conference)가 개최되었으며, 이 힘이 미국의 라틴 아메리카 진출을 촉구했다.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은 유일하게 곤봉 외교 및 달러 외교에 기초한 경제적 진출을 겨냥하고 있었다. 하와이 왕국을 조금씩 합병하여 세력을 태평양까지 확대하고, 스페인과 전쟁을 일으켜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괌 등을 식민지화했다. 카리브해 지역을 세력권으로 하는 카리브해 정책을 추진해 이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날 때마다 군사적으로 개입했다(곤봉 외교). 또한 국내 동서 물류의 안정을 위한 해상 교통로의 확보를 목적으로 파나마 운하 건설권을 인수해, 장기간의 공사 기간 동안 2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며, 심지어 공병까지 투입해 운하를 완성시켰다.

 

2) 1890년, 영국 영향권에 있던 하와이 탈취

하와이는 1782년 즉위한 카메하메하 1세 이후 왕조 체계를 유지하던 독립 국가였다(하와이 왕국). 하와이 합병은 텍사스 합병과 거의 유사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민을 간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미국과 합병 운동이 일어난다. 그 다음 단계로 미국인들이 중심이 된 공화국을 세우고, 이 공화국이 미국에 자신들을 합병해 달라고 요청하면 미국이 이를 받아들여 주는 식이다.

본진이 점령하기 전에 사전 공작팀을 먼저 보내는데, 주로 선교사들이다. 해외에 파송되는 목사나 신부 등은 제국주의 첨병으로서 역할을 한다. (미국 정보 문서를 보면, 해외에 파송되는 신부, 목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여러분은 선교사 이전에 정치가입니다.)

1890년 미국의 관세법 개정으로 제당업이 타격을 받자 하와이에 와 있던 미국인들이 중심이 되어 미국과 합병 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891년에 즉위한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이 미국 농장주들의 면세 혜택을 폐지하는 헌법 개정을 시도하자, 1893년 하와이 혁명이 일어났고, 1894년 하와이는 공화국이 되었다. 결국 1897년 6월 16일 매킨리 미국 대통령과 하와이 공화국이 합병 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미국의 50번째 주로 편입되었다(일본의 진주만 공습 당시에, 하와이는 미국 땅이 아니라 미국령이었다).

 

3) 필리핀, 괌ㆍ푸에르토리코를 미 제국의 식민지화

스페인 식민지였던 필리핀을 미 제국이 삼켜 버리는데,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자.

미 제국은 1896-97년 반스페인 봉기의 실패로, 1897년 12월부터 홍콩에 망명해 있던 필리핀 독립운동의 지도자 에밀리오 아기날도에게, 미국이 필리핀의 독립에 전면 협력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며, 그가 미군이 필리핀에 상륙할 때 안내를 하는 등 미국의 대(對)스페인 전쟁에 협조하기를 요청하였다. 아기날도는 이를 받아들였고, 1898년 5월 미국 함대와 함께 필리핀으로 귀국하여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운동을 재개하였다. 같은 해 8월 13일 미군과 함께 마닐라에 있던 스페인 총독부를 함락시키고, 스페인과의 전투를 끝냈다.

1896년 이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위해 싸운 필리핀 사람들은, 아기날도 아래 1898년 6월 12일에 독립을 선언하고, 스페인에 대항해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해 12월, 미국은 미국-스페인 전쟁의 강화 조약인 빠리 조약을 체결하며, 스페인으로부터 2,000만 달러에 필리핀을 매입하여 자국의 식민지로 삼으려 했다. 1899년 1월 23일 아기날도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고 그는 의회를 조직했는데, 8월 14일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하기 위해 1만1000명의 지상군을 보냈다.

필리핀 인민들은 처음에 미군이 해방군인 줄 알고 환영했으나, 점령군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는 해방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 전쟁은 공식적으로 1902년 7월 4일에 끝났으며, 100만 명이 넘는 필리핀인들이 죽었다. 필리핀-미국 전쟁의 패배로,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지에서 다시 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898년 4월-8월, 필리핀과 쿠바에서 벌어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한 미 제국은, 중미의 많은 나라에서 스페인 세력을 몰아내고 이들을 경제 식민지(바나나 공화국)로 삼았다. 그리고 쿠바를 보호국으로, 푸에르토리코, 괌 등을 식민지화했다.

 

4) 1898년, 스페인령 쿠바를 식민지화

1848년 멕시코에 시비를 걸어 영토의 3분의 1 이상을 빼앗은 제11대 대통령 포크(James Knox Polk)는, 무장 게릴라를 쿠바에 침투시키는 등 공작을 벌였으나 스페인의 대응으로 실패했다. 이후 미 제국은 또다시 쿠바 탈취 공작을 벌였는데 그 전술이 남북 전쟁 때 효과를 본 노예 해방 선동이었다. 미국은 쿠바 주민들(흑인 노예가 대부분임)에게 독립 전쟁을 지원해 주겠다며 부추겨, 소요를 일으키게 한다.

1898년 1월 25일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미 해병 350명을 태운 전함 메인호를 쿠바 아바나항에 정박시켰다. 정박한 지 3주가 지난 2월 25일 메인호 기관실에 원인 모를 폭발이 일어나 미 해병 266명이 사망하고 50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메인호 함장 식스비(Sigsbee)는 폭발이 함선 내부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상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곧장 스페인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스페인에 선전 포고를 했다.

미 제국은, 쿠바를 무단 침입한 미 해병에게 스페인군이 무력 대응할 것을 기대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의도적으로 자국 군인을 희생시키면서 전쟁 명분을 만들었던 것이다. 자해 공갈로 시작된 미 제국과 스페인 간의 전쟁은 4개월 만에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미군정과 총독 통치 등을 거쳐, 1909년부터 시작된 미 제국의 꼭두각시 정권은, 1959년 1월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혁명군에 의해 붕괴된 바티스타 정권에 이르기까지 50년 동안 이어졌다.

 

7. 제1차 세계 대전

19세기 이후 국제 사회의 각종 분쟁이나 전쟁에 미국이 직ㆍ간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경우는 드물다. 그렇다고 미국 영토를 적에게 공격받거나 또는 공격당할 위험에 처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 당시 하와이는 미국의 영토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미국이 개입한 모든 전쟁은 그 명분과 구실이야 어쨌든 간에 모두가 영토 확장과 식민지 확보, 자원 수탈, 소비 시장 확대, 세계 지배 등을 위한 침략 전쟁이었다. 1차 세계 대전 참전 역시 마찬가지다.

 

1) 1차 세계 대전 발발 계기와 주원인

1차 세계 대전은 독일과 동맹 관계에 있던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했다가 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의 총격을 받고 사망하는 사건을 계기로 발발했다. 1914년 7월부터 1918년 11월까지 계속된 1차 세계 대전의 주원인은, 과거 중동ㆍ아프리카 지역의 맹주로 군림해 온 오스만 제국이 기울자, 이 지역을 차지하려던 영국 등 기존 제국과 이들의 독식을 용인할 수 없는 독일 등 신흥 제국의 식민지 확보 경쟁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당시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협상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한 오스트리아-헝가리 등 동맹국 사이에 작용하고 있던 복잡한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다.

 

2) 미 제국의 전쟁 개입 명분 조작

1915년 5월 1일 뉴욕을 출발하여 리버풀로 향하던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가 독일 잠수함 유보트의 어뢰 공격으로 연쇄 폭발하여, 미국인 128명을 포함해 약 1,200명이 사망ㆍ실종되고, 700여 명만이 구조되는 사건이 발생했다(5월 7일).

영국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던 미 제국은, 참전 명분을 쌓기 위해 이 사건을 민간인 여객선에 대한 독일의 야만적 도발 행위로 규정한 후, 독일의 해상 봉쇄선을 무시한 채 민간인 선박들을 동원하여 군수 물자를 영국에 보내는 등 독일에 대한 노골적인 도발 행위를 계속했다. 이에 독일도 군수 물자를 실은 미국 상선 7척을 격침시켰다. 이를 빌미로 미 제국 국민들의 전쟁 지지 여론을 불러일으킨 윌슨 대통령은, 1917년 4월 독일에 선전 포고함으로써 유럽 국가들 사이의 전쟁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확대되었다.

1차 대전에 미국이 참가한 배경은, 그들의 선전대로 민간인 선박에 대한 독일의 야만적 공격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전쟁 개입 명분을 찾던 미 제국의 음모에서 발단한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1915년 4월 22일 주미 독일 대사는 전쟁 지역 해안을 출입하는 적국(영국)과 그 동맹국 선박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미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통보했다. 특히 민간인 선박을 이용하여 군수 물자를 계속 지원할 경우 이를 군용 선박으로 간주하여 격침시키겠다고 수차례 경고한 바 있다. 둘째, 표면적으로는 중립을 견지해 오던 미국은 독일 해군의 어뢰 공격 위험을 뻔히 알면서도 전쟁 지역으로 선포된 해상에 민간인 선박을 들여보냈다. 셋째, 루시타니아호가 32,500톤급의 대형 증기선이었다는 점을 볼 때, 두 번의 어뢰 공격을 당한 지 불과 18분 만에 침몰했다는 영국과 미국의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사실 루시타니아호가 침몰한 것은 첫 번째 어뢰 공격을 당한 직후 선체 하부에서 일어난 연쇄 폭발 때문이었다(Colin Simpson, The Lusitania, Little Brown&Co, 1972). 배 하단부에 적재된 다량의 폭발물이 독일 어뢰 공력으로 연쇄 폭발했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다. 즉, 이 사건은, 참전 빌미를 만들고자 무고한 승객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미 제국의 전쟁 음모로 벌어진 사건이었던 것이다(The Avalon Project file: re. The 1st world war, Yale Law School).

 

3) 1차 세계 대전 후 미 제국 중심으로 국제 질서 재편

1차 세계 대전으로 독일 제국은 물론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도 해체되고, 대영 제국과 프랑스 제국 역시 과도한 전비로 힘을 잃었다.

반면 전후 국제 질서의 재편을 주도한 미 제국은, 전승국과 패전국 간의 베르사이유 불평등 조약의 체결을 주도하며, 독일 등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리고, 독일이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하도록 했으며, 독일 동부의 주요 지역들을 새롭게 재탄생한 폴란드에 귀속시켰고, 과거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아프리카의 여러 식민지들을, 영국ㆍ프랑스 등에 나누어 주었다.

 

8. 제2차 세계 대전

2차 세계 대전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대량 살육과 파괴를 불러온 참극이었다. 지구촌 대부분 나라들에서 거의 1억 명에 가까운 인원이 참전한 이 전쟁으로, 민간인 4,700만 명을 포함한 7,200만 명이 사망하였다(통계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위키백과≫에서는 사망자를 7,20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음). 이 전쟁을 경과하면서, 미 제국은 세계 유일의 패권국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2차 대전은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 포고함으로써 국제전으로 비화된 전쟁이다. 1933년 독일의 권력을 쥔 히틀러는 전쟁 배상금 지불을 거부하며, 군비를 확충했다. 1938년에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1939년에는 체코도 점령했다. 이에 영국, 프랑스, 쏘련 등은, 독일을 견제하기 위한 대책에 부심했는데,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ㆍ그리스 등과 동맹을, 쏘련도 독일과의 전쟁에 대비해 영국과 군사 동맹을 체결했다. 그러나 정작 미국은 1935년에 중립법을 선포하고 국제 정세를 관망하며,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시점을 기다리고 있었다.

 

1) 미 제국의 참전 공작

방관자 입장을 취하던 미 제국은, 유럽은 물론 중동, 아프리카 국가들까지 점령하며 세력을 팽창하던 독일과 전쟁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참전 명분 찾기에 골몰했다. 미국의 제1차 대전 개입 과정을 경험한 독일이 미국의 간접적 적대 행위에 대해 무대응으로 일관하자, 좀 더 손쉬운 상대인 일본을 공작 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일본은 이미 조선을 합병(1910년)하고 만주에는 괴뢰 정부를 수립(1932년)했으며, 제2차 중일 전쟁을 시작(1937년)으로 중국 전역은 물론, 이른바 대동아 공영이라는 야욕 아래 동남아시아에까지 진출(1940년)하려고 하였다.

미 제국은 일본에 대한 압박 공세를 시작했다. 일본은 석유의 70-80%를 미국에서 수입했는데, 미국은 수출을 중단시킨다. 일본은 석유를 구하기 위해 동남아시아 등을 침공하게 되고, 미국은 이를 빌미로 문제를 삼는 등 일본이 미국과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간다. 그리고 일본을 더욱 압박하여 자국 침공을 유도하고 나섰는데, 그 제물이 바로 하와이 진주만의 해군 기지였다.

진주만 공습을 미리 알았을 뿐 아니라 이를 유도한 쪽이 미국이라는 사실은, 당시 미 해군 정보처 극동담당 팀장이던 맥콜린 소령이 1940년 10월 7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올린 일본의 대미 공격을 유발시키는 8단계 조처라는 문건에서도 확인된다(US National Security Archive). 또한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있기 여러 달 전부터 영국, 네덜란드, 호주, 페루, 쏘련 등의 첩보 기관들도 일본의 공습 계획을 미국에 통보했다. 특히 미국은 진주만 공습이 있기 최소 3개월 전부터 일본의 주요 암호 교신 내용을 해독한 뒤, 일본 정부의 동태는 물론 진주만 공습에 관한 디데이(D-day) 에이치아워(H-hour)까지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1941년 9월 1일부터 12월 7일까지, 미국이 해독한 일본의 암호 문건(JN-25)은 26,581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이 공습하기 열흘 전 일본과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면서 하와이 주둔군에게 경계 태세를 완화하도록 했다. 그 결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일본군은 64명 사망했으나, 미군은 2,403명이 사망하고 1,178명이 부상했다. 또 18척의 전함과 188대의 전폭기가 멸실되고 162대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윈스턴 처칠은, 제2차 세계 대전에 관한 회고록 ≪위대한 동맹(The Grand Alliance)≫에서, 루스벨트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려고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유도하여 자국민 수천 명을 희생시킨 행위는 반역에 해당하는 범죄라고 규정했다(Gordon W. Prang, The Untold Story of Pearl Harbor, Penguin Books, 1982).

 

2) 드레스덴 양민 학살, 히로시마ㆍ나가사키 원폭 투하

1945년 2월 13-15일, 미ㆍ영 연합군은 주로 부녀자와 어린이 등 피난민들이 모여 살던 독일의 오랜 도시 드레스덴에 14시간 동안 7,000여 톤의 폭탄을 퍼붓고, 2일간 추가 폭격을 가하여 10만 명이 넘는 민간인들을 의도적으로 학살하고, 아울러 민가ㆍ병원ㆍ학교 등 도시의 80% 이상을 폐허로 만들었다. 당시 폭격에 참가했던 미군 폭격기 조종사는 일반적으로 공습을 하기 전에는 공격 목표물이 정해지는데, 드레스덴 폭격에는 목표물이 없었다라고 하면서, 눈에 띄는 건물이나 사람을 무차별 폭격하라는 것이 상부의 명령이었다고 말했다(The Guardian, 2004. 2. 7./2. 14.).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것이 과연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수단이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1945년 4월 1일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하고, 7일에는 고이소 구니아키 총리가 사임했다. 일본 정부는 가망 없는 전쟁을 끝내려고 비둘기파인 스즈키 간타로를 총리에 앉힌 뒤, 쏘련의 중재를 통한 종전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새로 들어선 트루먼 행정부(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가 뇌일혈로 급작스럽게 사망하자 부통령이었던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승계함)는 6월 18일 소집된 국가안보회의에서 일본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기로 결정하였다.

7월 11일, 일본은 무조건적인 항복 의사를 미국에 전하면서, 히로히토 천황은 퇴임시키더라도 천황제는 인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쏘련 측에, 일본은 모든 점령지에서 철수할 용의가 있으며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의사가 없으니, 미국을 설득해서 전쟁을 끝내게 해 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The Avalon project file, Yale Law School). 7월 13일, 스즈키 총리는 안도 정무국장을 쏘련 대사에게 보내, 고노에 공작을 특사로 하여 종전을 제안하는 일본 천황의 친서를 전달하겠다고 공식 제안했다(National Security Archive). 7월 18일, 쏘련은 종전 회담을 준비하면서 미국과 영국 정부에도 이 사실을 알렸다(US NSA Docs, 1945. 7. 18./7. 22./7. 26.).

이렇게 분명한 일본의 종전 의지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는 8월 6일 히로시마에, 그리고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여, 20여만 명의 민간인을 살상하고 약 100만 명에게 방사능 피해를 입혔다.

 

9.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과 미 제국의 세계 지배

1) 쏘련을 주적으로!(진영 간의 모순)

2차 세계 대전은 제국주의 질서를 재편하는 결정적인 조건을 제공했다. 패전국 독일과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승전국 프랑스와 영국 등도 극심한 전쟁 피해를 겪음으로써 패권을 상실했다. 그러나 이 전쟁으로 미국은 경제 대공황을 극복하고, 장기 호황 국면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제 미국은 자본주의 진영에서 세계 유일의 제국으로서 확고한 패권을 거머쥐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미 제국은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가장 큰 전쟁 피해를 입은 쏘련을 주적으로 설정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창설하는 등 지역 군사 동맹 체제를 만들어, 쏘련에 대한 봉쇄를 강화했다. 또한 제3 세계 국가들에 대해서는 무력과 달러를 앞세워 신식민지 종속국으로,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해서는 봉쇄와 전복 공작을 끊임없이 자행해 왔다.

 

2) 모든 사건 뒤에는 그들이 있다!

2차 세계 대전 후, 제3 세계 국가들의 현대사는 미 제국을 빼놓고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한국(조선)의 현대사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 독점자본의 이해에 반하는 각국의 모든 자주적인 결정과 정책에는, 그것이 무엇이고 누구이든 간에 온갖 비열한 음모와 테러 공작ㆍ쿠데타 지원ㆍ노골적인 침공을 자행해 왔다. 공개적인 침략 전쟁 외에도 무력과 달러를 앞세워, 각국의 지배계급 내의 친미 우익 세력과 결탁하여 주권 국가들의 자주권을 무자비하게 유린해 왔다.

 

다른 나라에서 정권 교체를 유도한 CIA의 비밀공작

 

연도

국가

내용

1953

이란

모사데크 정권 전복

1954

과테말라

아르벤스 정권 전복,

1963년 아로세미나 정권으로 교체

1961

콩고(당시 자이르)

루뭄바 암살 지원,

1965년 모부투 집권 지원

1963

도미니카 공화국

보슈 정권 전복

1964

브라질

굴라르 정권 전복,

브랑쿠 정권 옹립

1965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정권 전복,

수하르토 집권 지원

1970

캄보디아

시아누크 왕 실각,

론 놀 옹립

1971

볼리비아

후안 토레스 정권 전복,

수아레스 집권 지원

1973

칠레

아옌데 정권 전복,

피노체트 정권 옹립

1980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권 교체,

차모로 정권 옹립

 

 

 

II. 미 제국의 중남미 침탈사

 

1. 쿠바

1) 미 제국의 쿠바 사회주의 정권 전복 공작

미 제국은 1959년 1월 바티스타 독재 정권을 타도하고 출범한 피델 카스트로 혁명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온갖 공작을 자행했다. 1959년 10월 쿠바에 대한 불법 공습을 개시한 이후, 쿠바에서 탈주한 바티스타 정부 관료 등 난민들을 모아 군사 훈련을 시켜, 1961년 4월 15일 육해공군을 동원해 기습 침공을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이 전투로 미군 측에서는, 미군 조종사 4명을 포함하여 1,200명의 포로가 발생했으며, 쿠바 측에서는 특히 미 공군의 네이팜탄 투하로 인해 5,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이후 미 제국의 대(對)쿠바 전략은 노골적인 무력 침략 대신에 비밀공작과 테러로 바뀌었다. 미 제국은, 경제 교란과 민심 이반을 유도해 새로운 꼭두각시 정권을 수립할 목적으로, 몽구스 작전, 사파타 작전, 풀루토 작전, 노드우드 작전 등의 카스트로 암살 공작과 쿠바 정부 전복 공작을 벌였다. 또 카스트로 정부에 불만을 가진 포사다(Posada) 테러단도 육성, 지원했다.

쏘련제 미그기 모형의 폭격기를 만들어 미 국내와 관타나모 해군 기지를 폭파한 뒤, 쿠바가 한 짓이라고 뒤집어씌우고 선전 포고의 구실을 만들려고도 했다. 미 첩보 정찰기를 쿠바 상공에 저공비행시켜 격추를 유도한 뒤 전쟁을 일으키려는 계획도 수립했다(US Security Archive). 이러한 계획은 최종 실행 단계에서 좌절된 것으로 알려졌다.

3차 대전을 피하고자 쿠바에서 미사일 기지를 철수한 쏘련은, 1992년 9월 11일 성명을 통해 만약 미국이 쿠바를 상대로 전쟁을 도발한다면 이는 쏘련에 대한 선전 포고로 간주할 것이며, 따라서 쏘련과 미국의 핵전쟁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이것이 미 제국의 자해 공격을 보류시킨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미 제국은 현재까지도 쿠바에 대한 경제 봉쇄를 비롯한 공작을 계속하고 있다.

 

2. 멕시코

1) 세 차례에 걸쳐 멕시코 영토 탈취

이미 전술한 대로, 1차로 1836년 텍사스 내부의 반군을 육성하여 분리 독립을 선언하게 한 후 반군과 함께 멕시코를 침공하여 텍사스를 빼앗았다. 2차로, 1846년 멕시코를 침공하여 현재의 텍사스, 콜로라도, 애리조나, 뉴멕시코, 와이오밍,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주를 탈취했다. 3차로, 1853년 2천만 달러를 주고 뉴멕시코 일부 지역을 매입했는데, 이는 협박에 따른 것이다.

 

2) 1960년대-1980년대에 미 제국이 주도한 더러운 전쟁

20년 동안 독재 정권 타도 투쟁에 나섰던 학생과 시민 등 1,000여 명이 희생된 후, 2000년 대선에서 야당 정치인 비센테 폭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02년 폭스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들이 재임한 기간 동안 자행된 공권력에 의한 인권 유린 실태를 조사하도록 했다.

4년에 걸친 조사 결과, 고문ㆍ강간ㆍ영구 실종 등 1만5천 건에 달하는 인권 유린 사건 중에 최소 700명 이상이 재판도 없이 고문을 받고 살해된 것으로 밝혀졌다(BBC, 2006. 11. 3.). 폭스 대통령 당선으로 과거사가 파헤쳐졌으나, 단죄되지는 못했다. 이런 고문과 학살은 미 제국이 주도한 더러운 전쟁이 한창이던 1968년부터 1976년 사이에 집중되었다.

 

3. 칠레

1) 아옌데 정권의 전복

1970년 대선에서 미국 정부의 집요한 방해 공작을 받았던 살바도르 아옌데가 민중들의 전폭적 지지로 당선되었다. 아옌데 정권은 미국 기업이 소유하고 있는 구리 광산의 국유화, 경자유전 원칙에 따른 과감한 토지 개혁, 의료ㆍ교육부문에 대한 공공 서비스 확대, 식민 잔재 청산 및 미 제국 등 열강의 간섭과 착취에 맞서는 등,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채택한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제2의 쿠바가 될 것이라며 아옌데 정부 전복을 지시하고, 키신저 안보 보좌관을 중심으로 CIA(중앙정보국), DIA(국방정보국), NSA(국가안보국), FBI(연방수사국)의 간부들이 참여하는 40인 위원회를 조직한다. 1970년 9월 15일, 그들은 푸벨트 작전을 수립하여 아옌데 취임 직후부터 1억 달러 상당의 현금과 고성능 살상 무기 등을 비밀리에 칠레 군부에 공급했다. 10월 16일, 키신저의 명령에 따라 CIA 부국장 헨리 헥셔에게 보낸 전문에는 아옌데 정부를 쿠데타로 전복하는 것이 우리의 확고한 목표다. 이를 진행시키기 위해 최대한 압력을 지속하고… 적절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 이 계획은 철저히 보완되어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이외에도 많은 증거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결국 아옌데 정부는 임기 절반을 남겨 둔 1973년 9월 11일 군사 반란에 의해 붕괴되었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육군 총사령관 피노체트는 1990년까지 칠레를 통치하였다.

 

2) CIA, 민간인 학살 주도

미 제국은 칠레 군부의 민간인 학살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이 사실을 시사하는 문건 가운데 하나는, 쿠데타 4일 뒤인 1973년 9월 15일 오전 12시경 키신저 장관이 닉슨 대통령에게 전화로 보고한 내용이다. 키신저는 칠레의 쿠데타와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해 우리가 한 짓은 아니지만 도와준 것은 사실이다라고 했다(US National Security Archive).

인도네시아 미 정보기관이 수하르토 장군에게 5,000여 명의 살생부를 건넸던 것처럼, 칠레에서도 쿠데타 하루 전인 1973년 9월 10일 좌파 지도자 3,000명을 포함해서 민중 운동가, 학생, 소작농 등 총 2만여 명의 살생부를 쿠데타 세력에게 넘겨주었다(같은 자료). ≪가디언≫은 피노체트 군사 정부 기간 동안 처형된 사람이 3만5천 명에 달한다고 보도했다(The Guardian, 2001. 1. 9.).

 

3) 미 제국의 약소국 통치 전략

비무장 민간인 학살 만행은 칠레뿐 아니라 1975년 10월부터 미 제국이 주도한 콘도르 작전(Operation Condor)의 주요 무대였던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우루과이, 브라질, 볼리비아 등 중남미를 비롯하여 전 세계에서 자행되었다. 중남미의 군부 독재 지휘관들 대다수가 아메리카 군사 학교에서 이른바 특수 훈련을 받은 자들이다. 시민사회단체의 요구에 따라 1996년 공개된 이 학교의 주요 교본 내용은, 대중을 상대로 한 선동, 통제, 고문, 학살, 증거 조작 및 인멸, 심리전 등이다.

미 제국의 약소국 통치 전술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현지 군부의 다양한 인맥을 구축하여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필요시 주요 인물을 암살하거나 정부를 전복시킨다. 때로는 시정잡배를 훈련시켜 민병대 또는 반군으로 활용한다. 둘째, 군 지휘관, 정치인, 언론인 그리고 국가의 두뇌집단이라 불리는 연구원이나 학자들을 미국에 유학시켜 미국의 가치에 순응하도록 세뇌하여 포섭한다. 셋째, 경제 제재나 금융 봉쇄를 통해 특정국의 경제를 마비시키거나, 이를 통해 국민 스스로 자국 정부를 전복하도록 유도한다. IMF 같은 국제기구를 통한 공작도 병행한다. 넷째, 이도 저도 여의치 않으면, 자국민이나 자국의 투자자 등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또는 테러, 마약, 인권 관련 올가미를 씌워 무력 침공한 뒤 괴뢰 정부를 수립한다.

 

4. 아르헨티나

1) 페론 정부 전복과 민간인 학살

아르헨티나는 1940년대 초까지 미 제국의 지원을 받는 우익 군부가 집권했는데, 1943년 민중의 불만을 등에 업고 좌파 쿠데타 발생했다. 페론 대령은 이 쿠데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노동부 장관과 국방부 장관을 맡았고, 1946년에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페론은 사회적 약자 편에 서는 한편,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는 등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아우르는 방식의 정책을 펴다가, 1955년 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받는 우익 군부 쿠데타로 실각하여 18년간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하였다. 1973년 귀국하여 재선에 성공했으나, 다음 해 사망했다. 그의 부인이자 부통령이었던,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승계했으나, 1976년 미 제국의 지원을 받은 비델라 장군의 쿠데타로 실각했다.

이후 8년간 이어진 군사 정권은, 페론주의자, 노조 지도자, 대학생, 인권 운동가, 의사, 학자 등 최소 3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잔혹하게 고문, 살해했다. 이 모든 것은 칠레 비밀 정보부(DINA) 등 중남미 국가들의 특수 기관과 공조하여 자행된 것이었다(최근 공개된 비밀 해제 문건, 중남미를 휩쓴 미 제국의 더러운 전쟁’”).

 

2) 아르헨티나의 경제 파탄

미 제국은 무고한 아르헨티나 민중 학살만 주도한 것이 아니라 경제도 파탄시켰다. 알폰신의 뒤를 이어 10년(1989-1999) 동안 장기 집권한 카를로스 메넴은 살인적인 인플레를 잡는다는 구실로 IMF가 권하는 적극적인 시장 개방과 기간산업의 사유화를 단행했다. 미 제국의 적극적인 후원과 비호 아래 상수도, 전기, 가스, 정유, 통신, 우체국 등 주요 국영 기업을 사유화하여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실시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소생 불능 상태에 빠졌다. 2001년 아르헨티나 경제는 유사 이래 최악의 파국을 맞았고, 거리에는 군중이 몰려나와 신자유주의 정책 폐기와 친미 정권 타도를 외치며 유혈 저항을 벌였다. 정권은 붕괴되고 2001년 12월 23일 아르헨티나는 국가 부도를 선포했다.

2003년 중도 진보 성향의 키르치네르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탈미 경제 정책은 속도를 냈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외채의 66%를 탕감하기로 IMF와 합의한 뒤, 주요 기간산업을 국유화했다. 탈미 반신자유주의 정책이 성공을 거두자 2007년 그의 부인이자 여성 변호사 출신인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가 인민의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탈미 성향의 크리스티나를 낙선시키려고 비열한 음해 공작을 벌였다(Bloomberg, 2007. 12. 19.).

 

5. 니카라과

니카라과는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뒤 8개월 만에 멕시코 제국에, 23년부터는 중앙아메리카연방에 속했다가, 1838년 완전히 독립하여 지금의 니카라과를 세웠다. 1856년부터 미 제국은 12차례에 걸쳐 니카라과를 침공했다. 1912년 아돌포 디아즈가 대통령이 되면서 국가 주권은 미 제국이 행사하고, 국가의 부는 시티그룹, 코카콜라, 유나이티드 프루트 등 굴지의 미국 기업과 그들의 충견 노릇을 한 친미 세력에게 독점되었다.

 

1) 미 제국, 소모사 정부 지원

니카라과 영웅 아우구스토 산디노 장군은, 미군의 영구 주둔을 위한 브라이언-차모로 조약(1914년)과 1928년 선거 때까지는 미군 주둔을 허용한다는 사카사, 몬카다, 스팀슨(미국 대사) 간의 평화 조약(1927년)에 반대하며, 1927년부터 미 해병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1933년 결국 미군은 니카라과에서 철수했고, 그해 치러진 선거에서 사카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1927년에 미군이 조직한 국가 방위대를 원격 조정했는데, 이 부대의 초대 대장이 바로 악명 높은 소모사이다. 1934년, 미 제국의 사주를 받은 소모사는 산디노를 살해하고, 36년에는 쿠데타를 일으켜 사카사마저 축출했다. 이후 소모사와 그의 장남 루이스 소모사, 차남 소모사 데바일레는, 1979년까지 니카라과를 통치하며, 그 나라를 공포와 빈곤의 지옥으로 만들었다. 1970년대 산디노를 계승하는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의 세력이 강해지자, 저들은 민간인까지 무차별 학살했다.

1979년 7월 소모사 정권이 인민 혁명으로 붕괴되고, 산디니스타 혁명 정부가 출범했다. 혁명 정부는 토지를 소작농에게 재분배하는 등, 부패 척결과 경제 발전을 도모했다.

미 카터 정부는 니카라과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한편, 경제 제재와 노골적인 유혈 테러를 가하기 시작했다. 소모사 잔당을 중심으로 한 반군을 양성하여 산디니스타 정부의 전복에 나섰다. 미 제국의 충견 국가 방위대 병력을 빼돌려 아르헨티나 미군 기지로 보낸 뒤, 살인, 고문, 파괴 등 게릴라 공작 전문가로 훈련시켜, 콘트라 반군으로 조직했다. CIA 등 미 제국이 지원하는 콘트라 반군의 임무는 니카라과의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미 제국이 니카라과에 대한 더러운 전쟁을 본격화한 1980년대 반군에게 목숨을 잃은 사람은 5만여 명에 달했다(Washington Post, 2004. 6. 10.).

 

6. 과테말라

약 300여 년의 스페인 식민지를 벗어난 과테말라는 니카라과 등과 함께 잠시 멕시코 제국에 속했다가 이후 중앙아메리카연방을 거쳐 1840년 독립 국가가 되었다. 이후 대미 종속 형태가 계속되었는데, 미국계 기업 유나이티드 프루트에 바나나와 커피에 대한 독점권과 아카바에 대한 시장 지배권 등이 주어졌다. 그리고 철도, 통신, 전기 등 국가 기간산업의 대부분도 유나이티드 프루트에 양도함으로써 대미 종속 관계가 심화되었다. 인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은 비옥한 땅을 유나이티드 프루트에 빼앗긴 채 저임금 노동자로 전락하거나 궁핍한 삶을 살아야 했다.

1944년 아라나 소령, 아르벤스 대위 등 하급 장교들을 주축으로 군사 혁명이 일어났다. 노동자, 농민, 청년 학생들의 지지를 받는 혁명군은 14년간 독재한 유비코 장군과 그 일당을 숙청하고 최초의 민선을 실시했다. 해외로 추방되었던 아레발로가 85%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45년 3월에 취임한 그는, 사회 제도를 개선하고 인민의 권익을 신장시키기 위해 노조 설립을 지원하는 등 기독교적 사회주의 정책을 추구했다.

아레발로에 이어, 50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51년 3월 15일 취임) 아르벤스는, 미국 자본이 잠식한 국가의 기간산업을 국유화하는 한편, 토지 개혁을 실시했다. 경작 가능한 토지의 42%에 해당하는 1만2,000km2를 보유한 유나이티드 프루트의 토지 가운데, 휴경지를 일정한 금액을 지급하고 수용했다. 그러나 유나이티드 프루트를 대리한 미 국무부는 계산법의 25배가 넘는 거액을 내놓으라며 수용을 거부했다.

 

1) 미 제국의 아르벤스 정부 전복 공작

미국 정부는 아르벤스에게 공산주의라는 낙인을 찍은 뒤, 이를 전복하기 위한 공작에 착수했다. 아르벤스 정부 전복 공작은 1951년 트루먼 대통령이 피비 포춘(PB Fortune)이라는 비밀공작을 승인하면서 시작되었다.

1954년 6월 중순 전면 침공에 앞서 과테말라에 잠입한 아르마스 등 소수 게릴라들은 과테말라 군사령관을 만나 아르벤스의 제거에 협조를 요청했다. 아르마스를 즉각 체포해야 할 군부의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본 아르벤스는, 1954년 6월 하순에 고별 연설을 끝으로 사임했다. 이로써 미 제국은 이란의 모사데크 정부를 전복한 지 1년 만에 아르벤스 정부도 전복한 것이다.

 

2) 군부 독재 36년의 배후

권력을 장악한 아르마스는 국회를 해산하고 반공법을 제정하여 아르벤스에 동조하는 세력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학살했다. 공산주의자 색출을 위한 국방위원회를 구성하고 비밀경찰을 부활시키며, 문맹자의 투표권을 박탈했다. 영세 농가에게 나누어 준 토지도 환수하고, 국유화한 국가 기간산업도 유나이티드 프루트 등 제국주의 자본에 넘겼다.

그동안 미국 정부는 과테말라 민간인 학살에 개입해 온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1997년 5월 과테말라에 대한 비밀 작전(Snow Job) 문건들이 공개됨으로써 개입 사실이 드러났고(New York Times, 1997. 5. 20./5. 30. 등 여러 보도), 미 의회 및 국제사면위원회 등의 조사에 의해 이 같은 사실들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7. 파나마

1) 파나마 운하의 강점

1903년 미국 정부는 콜롬비아 영토인 파나마의 점용권을 확보하기 위해 콜롬비아 정부를 강압하기 시작했다. 공갈 협박에도 콜롬비아 의회가 미 제국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조약(헤이-에란 조약)의 비준을 거부하자, 전함을 보내서 무력시위를 하는 한편, 파나마 지역을 분리시키기 위해 반군도 육성했다. 이는 멕시코 영토를 빼앗으려고 알라모 반군을 양성한 수법과 같은 것이다.

미 제국은 자신이 양성한 반군에게 독립을 선언하도록 하고 괴뢰 정부를 세웠다. 콜롬비아에 속했던 파나마는 운하를 탐내는 미 제국에 의에 1903년 강제 분리되었다. 그리고 1914년 운하가 개통된 이후부터 현재까지 파나마 운하 지역은 헤이-바리야 조약(1903년 11월 18일)을 근거로 미 제국이 배타적 권리를 획득했고, 사실상 미국 영토로 이용되고 있다. 이는 국제적 사기극인 셈이다.

 

2) 토리호스 수반의 파나마 주권 환수

1931년 아르눌포 아리아스는 대중의 지지를 받은 무력 혁명을 통해 아로세메나 정권을 무너뜨리고, 중도 좌파 정부를 수립했다. 다음 해 치러진 대선에서 그의 형 아르모디오 아리아스가 당선되었고, 36년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1940년 대통령에 선출된 아르눌포 아리아스는, 자주적으로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하고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었다. 하지만 1년 만에 쿠데타로 실각하게 된다(재임 기간: 1940년 10월 1일-1941년 10월 9일). 1949년 다시 민선 대통령이 되었으나, 역시 2년을 넘기지 못하고 실각했다(재임 기간: 1949년 11월 24일-1951년 5월 9일). 이 모두가 미 제국의 배후 지원에 힘입은 군사 쿠데타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1968년 다시 선거에 승리하게 되지만, 이번에는 11일 만에 실각하게 된다(1968년 10월 1일-11일).

파나마 운하에 대한 주권 회복을 주장하며 3선의 아리아스를 몰아내고 국가수반(직함은 파나마 혁명 최고 지도자)에 오른 자는 토리호스이다. 토리호스는 토지 개혁을 실시하여 빈곤층을 위한 정책과 함께 운하 반환도 요구했다.

미 제국은 1969년 12월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77년 카터 행정부는 토리호스 국가수반과 파나마 운하 반환 협정을 체결했다. 협정 내용은 1999년 12월 31일까지 파나마 운하의 관리ㆍ운영 등에 관한 모든 권한을 파나마 정부에 반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운하에 대한 사실상의 주권은 여전이 미 제국이 행사하고 있다(Times Meg, 1973. 3. 19./1977. 8. 22.).

레이건이 집권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1981년 7월 말 토리호스는 의문의 비행기 폭발 사고로 사망한다. 정확한 폭발 원인은 규명된 바 없으나, 당시 외신들은 두 달 전에 의문의 비행기 폭발 사고로 사망한 에콰도르의 롤도스 대통령과 같은 이유라고 보도했다.

 

3) 미 제국의 표적이 된 노리에가

1981년 토리호스가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2인자 위치에 있던 노리에가가 전권을 장악했다. 초기에 노리에가는 미 제국의 충견 노릇을 했다. 그러나 1983년 미 제국이 주도한 더러운 전쟁으로 혼란에 빠진 중앙아메리카의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니카라과 문제를 다루기 위해, 콜롬비아, 멕시코, 베네수엘라의 외무장관들이 파나마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결성된 콘타도라 그룹에 파나마도 참가했다. 또 노리에가는 미 제국의 강압으로 운하의 주권 행사가 쉽지 않을 것을 예견하고, 기존의 운하 대신에 연간 수십억 달러의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새로운 운하를 건설하려고 일본 기업과 협상을 벌이던 중이었다. 그리고 암살단을 육성하는 아메리카 군사 학교 이전 시한을 15년 연장해 달라는 미 제국의 요구를 거절했다.

노리에가 제거를 결심한 미 제국은 1989년 5월 대선에서, 파나마 운하 지역 조차권 연장을 들고나온 노리에가의 정적 엔다라 후보에게 CIA를 통해 1,000만 달러 이상을 지원했고, 그를 당선시켰다(San Francisco Examiner, 1989. 4. 23.).

 

4) 미군의 파나마 침공, 노리에가 체포와 민간인 학살

1989년 12월 20일 새벽 1시 미 제국은, 스텔스 폭격기와 함께 2만7,000여 명의 지상군을 투입하여 파나마 국가 수비대 본부와 파나마 시내 빈민 주거 지역을 대대적으로 폭격했다. 노리에가는 열흘 만에 항복했고, 미국으로 압송되어 마약 밀매, 공갈, 돈세탁 혐의로 20년간 복역했다. 2010년 4월 26일 노리에가는 프랑스로 이송되었다가 11월 12일 22년 만에 파나마로 송환되었다. 주권 국가의 대통령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어 버리는 것도 가능한 나라가 미 제국이다.

1989년 12월 28일, ABC TV 뉴스는 공중 폭격과 지상군의 공격으로 최소한 1,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한 중립적인 인권 단체는 민간인 사망자 수가 3,000-5,000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현지인들은 1만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고 주장한다. 공습 직후, 미 제국은 그해 5월 파나마 의회에서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미 정보기관의 하수인이라는 이유로 취임하지 못하고 있던 엔다라를 미군 영내로 불러서 취임 선서를 시키고 대통령으로 선포했다.

 

8. 엘살바도르

1) 미 제국은 우익 군부(세력) 지원을 통해 개입

1979년, 일단의 청년 장교와 정치인들이 주도한 군사 혁명이 일어났다. 이들이 세운 과도 정부는 토지 소유 상한제와 주요 산업의 국유화 등을 공약하며 나름대로 사회 통합을 추진했다. 그러나 혁명 정부의 좌우 통합 노력은 미 제국의 주구 노릇하던 우익 군ㆍ경 등 기득권층의 저항에 부딪혀 오히려 내부 혼란만 초래했다. 집권당의 시장조차 살해하는 등 우익 테러가 기승을 부렸다. 1980년 로메로 주교는 미국 대통령 카터에게 보내는 서한을 통해, 엘살바도르 우익 군부에 대한 미 제국의 군사 지원이 인민 탄압과 민주주의 파괴에 사용되고 있으니 즉시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그러자 엘살바도르 친미 군부는 로메로 주교를 살해했다.

 

2) 민간인 학살의 배후, 미 제국

산발적으로 저항해 오던 민중도 하나로 뭉쳐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을 조직했다. 반면 우익 군부와 민병대는 좌익 게릴라가 출몰하는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New York Times, 1992. 1. 27.). 이와 같은 민간인 학살의 배후는 미 제국이었다(같은 보도). 2004년 10월 TV 대담에 출연한 미국 부통령 딕 체니는 미군에 의한 아프가니스탄 민간인 피해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20여 년 전 엘살바도르에서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가 7만5,000여 명의 엘살바도르인을 죽인 것은 자유를 위한 것이었다. … 이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답하면서, 미군이 엘살바도르 양민 학살에 개입했음을 시인했다(Independent TV Internet, 2004. 10. 6.).

 

9. 콜롬비아

16세기 중반부터 스페인의 식민 통치를 받은 콜롬비아는 19세기 초에 이르러, 베네수엘라, 에콰도르와 함께 독립했다. 그러나 인민들은 기득권층의 수탈에 신음해야 했다. 거의 60년 동안 이어져 오고 있는 콜롬비아 내분은 트루먼 독트린이 선언된 이듬해인 1948년 4월에 시작되었다.

 

1) 유혈 내분의 발단

당시 집권당이던 친미 계열의 보수당 후보에 맞서 사회 개혁을 외치던 자유당 후보 호르헤 엘리에세르 가이탄은 유나이티드 프루트사(현 치키타 브랜즈 인터내셔널) 등 미국계 기업과 소수 기득권층이 독점하고 있던 농경지를 환수하여 원주민에게 돌려주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인디오에게 빼앗은 땅을 원주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주장).

미국 정부는 그를 제거 대상으로 분류하고 여당과 기득권층도 그에게 적대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민중들은 열렬히 그를 지지했다. 그러나 1948년 4월 9일, 그는 선거를 목전에 두고 살해되었다. 지배층에 대한 분노가 이 사건을 계기로 항쟁으로 폭발했다. 그 결과 미 제국의 지원을 받은 우익 군부의 민중 탄압 과정에서 무려 20만 명의 인명이 희생되었다. 우익 군부는 미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대대적인 반정부 게릴라 소탕 작전을 시작했으며, 이에 맞서 1964년 반정부 세력도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과 1966년에 민족해방군(ELN)을 결성하여 투쟁에 나섰다. 이들 반정부 게릴라들의 목표는 토지 개혁을 통해 경제 정의를 세우는 것이다. 이들 게릴라들은 미 제국이 지원하는 콜롬비아 정부군과 제6사단으로 불리는 민병대(AUC)의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로 힘을 많이 잃기는 했지만, 아직도 일부 게릴라는 산간 밀림 지대로 흩어져 계속 저항하고 있다.

 

2) 민간인 학살을 위한 미 제국의 지원

현재 콜롬비아는 중남미 국가들 가운데 미 제국과 가장 가까운 나라이며, 이스라엘과 이집트 다음으로 많은 경제 원조를 받고 있다. 또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나라이기도 하다. 1970년대까지 사회 개혁을 요구하는 노동자와 소작농 등을 대상으로 인종 청소를 벌인 미 제국은 1980년대 이후에는 마약과의 전쟁을 빌미로 이들을 계속 압살했다.

냉전이 종식된 뒤, 평화 정착과 마약 재배를 근절한다는 명분으로 수립된 콜롬비아 계획에 따라, 클린턴 정부는 30여 대의 블랙호크 헬기를 비롯해 13억 달러 상당의 물자와 자금을 콜롬비아 정부에 지원했다. 이후 부시 정부에 이르기까지 7년 동안 콜롬비아 정부에 지원한 금액은 50억 달러에 달한다(AP, 2006. 12. 3.). 그런데 이것은, 경제 개발 지원이 아니라 민간인 학살을 지원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엄청난 물자와 돈을 이곳에 쏟아붓는 것일까? 그것은 콜롬비아가 지닌 정치ㆍ경제적 중요성 때문이다. 약 28억 배럴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콜롬비아는, 미 제국의 일곱 번째 원유 공급국이다. 또한 콜롬비아는 중남미 지배를 위한 미 제국의 교두보이기도 하다.

 

10.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는 16세기 초부터 300년 동안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아 왔다. 1810년 시몬 볼리바르의 주도 아래 시작된 10여 년의 독립 전쟁에서 스페인을 물리치고 1821년 콜롬비아, 에콰도르와 함께 콜롬비아연방으로 독립했다가, 1830년에 단일 국가가 되었다.

 

1) 미 제국의 공작 목표가 된 베네수엘라

이후 100년 넘게 베네수엘라는 인근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쿠데타와 반쿠데타 등 독재와 혼란이 이어졌는데, 특히 20세기 초에 엄청난 규모의 석유가 발견된 뒤에는 미 제국의 주요 공작 목표가 되었다. 미 제국의 후원을 받은 쿠데타로 집권한 고메스 정권(1908-1935) 동안 베네수엘라의 석유 등 천연자원과 주요 농작물은 미국 기업의 차지가 되었다.

헌법 개정으로 1948년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가예고스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가예고스 정부는 전임자의 개혁 정책을 가속화했으나, 취임한 지 9개월 만(1948년 2월 17일-11월 24일)에 페레스 히메네스가 주도하는 친미 우익 쿠데타에 의해 실각했다. 정권을 장악한 히메네스는 국가 치안대를 조직하여 공포 정치를 실시하는 한편, 무려 80만 헥타르의 토지에 대한 석유 채굴권을 미국 석유 회사에 넘겼다. 노조 및 시민운동 등 저항 세력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탄압하거나 학살했다.

 

2) 미 제국의 차베스 제거 공작

1998년 12월 대선에서, 청년 장교 시절 쿠데타에 연루되어 수감 생활을 하면서 유명해진 차베스가 당선되었다. 볼리바리안 계획으로 명명된 그의 공약은 미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항하여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빈곤, 문맹 등으로 고통받는 민중을 구하기 위해 사회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2002년 4월, 수구 우익의 나팔 소리와 함께 어용노조(CTV) 총파업과 친미 군부 집단의 쿠데타가 발생했다. 차베스를 연금한 군부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임시 대통령을 지명했고, 이에 동조한 대자본가들은 생필품 유통을 봉쇄하며 사회 혼란을 부추겼다(Observer, 2002. 4. 21.). 그러나 이들의 군사 반란은 목숨을 걸고 항거한 장병들의 저항과 전국적 규모의 반쿠데타 시위 때문에 3일 천하로 끝났다.

반정부 쿠데타에 미 제국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은 CIA의 관련 문서로 드러났다(Democracy Now, 2004. 11. 29.). 국가안보국(NSA) 및 해군 정보기관에서 간부를 지낸 메이드슨도 쿠데타 공작에 미 정보기관이 관여했다고 진실을 밝힌 바 있다(The Guardian, 2006. 4. 29.).

아울러 같은 해 10월에도 쿠데타 공작이 있었고, 유럽을 순방한 뒤 귀국하던 차베스에 대한 암살 공작도 있었다. 그리고 2004년 5월에는 미 제국의 지원으로 양성된 콜롬비아 우익 민병대 126명이 수도 카라카스 교외에서 체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 제국은 우익 세력의 대정부 저항을 지원하는 등 차베스를 제거하기 위한 공작을 끊임없이 계속했다. 이는 베네수엘라 정보부가 입수하여 현지 언론에 공개한 것으로, 베네수엘라 주재 CIA 책임자 미들턴이 본부에 보낸 첩보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Huffington Post, 2007. 11. 28.).

 

11. 브라질

브라질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 달리 300여 년 동안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고, 포르투갈에게서 독립한 뒤에도 약 100년 동안 공화정이 아닌 독재 왕정이 지속되었다. 1889년 쿠데타에 의해 왕정은 폐지되었으나, 브라질의 현대사는 총칼을 앞세운 정치군인들의 독무대였다. 우익 군부의 정변과 군사 독재의 배후에는 어김없이 미 제국의 음모와 정치 공작이 있었다.

 

1) 미 제국의 굴라르 정부 전복

1960년 말에 실시된 대선에서 상파울루 시장과 주지사를 지낸 자니우 쿠아드루스가 유권자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취임 직후 그는 사회 양극화 해소, 미 제국 일변도의 외교 노선 탈피, 쏘련 등 사회주의권 국가와도 외교 및 통상 관계 수립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에 대해서 단호했다. 미 제국의 피그만 침공(1961년 4월) 당시 케네디 대통령의 특사인 벨르가 그를 찾아와 미국의 피그만 침공을 지지하면 3억 달러의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으나, 그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미 제국의 쿠바 침공을 비난했다.

그러나 그는 취임한 지 7개월 만에 돌연 사퇴했다. 그는 의회에 제출한 사직서에 외국인을 포함한 극우 세력의 가공할 위협으로 더 이상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다라고 적시했다. 사직서를 낸 뒤 대국민 담화에서, 자신의 돌연 사직은 미국 정부의 벨르 특사, 카봇 대사, 딜론 재무장관의 압박과도 무관치 않으며, 자신의 정책은 극우 세력, 그리고 부정과 부패로부터 나라와 인민을 지키는 것이었다고 술회했다(벨르와 카봇은 1954년 과테말라 아르벤스 정부의 전복을 주도한 자들임).

쿠아드루스가 대통령직을 사퇴한 뒤, 미국 정부와 군부의 강한 거부 의사에도 불구하고, 헌법 절차에 따라 부통령이던 굴라르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그는 정유 산업을 국유화하고, 외국 기업의 유휴 토지를 개발하여 빈곤층에게 공급하며, 다국적 기업의 과다한 이윤 유출을 억제하기 위해 해외 공금에 제한 조치를 취했다. 대외적으로는 비동맹 자주 노선을 지향하며 제3 세계와의 외교ㆍ통상 관계를 증대했다. 미 제국의 쿠바 침공에 뒤이어 미주 기구에 상정된 미국의 대(對)쿠바 봉쇄 조치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미 제국은 굴라르 정부와 쏘련이 유착되었다, 공산주의에서 브라질을 구해야 한다는 등의 상투적 흑색선전을 늘어놓으며 굴라르 정부에 대한 전복 공작에 착수했다. 1962년 치러진 브라질 총선 때 CIA를 통해 굴라르의 정적인 극우 성향의 후보들에게 거금의 선거 자금을 지원했다(전 CIA 간부 필립 아기와 고든 대사의 주장). 그러나 미국은 자신이 지원한 후보가 낙선하자 민선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쿠데타 공작을 벌였다.

미 제국의 주구였던 브라질 군부의 합참의장 브랑쿠가 선택되었다. 고든 대사가 존슨 대통령, 러스크 국무장관, 맥나마라 국방장관, 맥콘 CIA 국장 등과 주고받은 비밀 전문들(2004년 3월에 공개)에서 알 수 있듯이, 존슨 대통령은 쿠데타 실행이 임박하자 굴라르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모든 조처를 취해야 한다고 명령했다(US National Security Archive). 이 명령에 따라 미국 정부는 엉클 샘 작전(Operation Uncle Sam)이라고 명명한 쿠데타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자금, 무기, 연료 등 주요 전략 물자를 비밀리에 브랑쿠 장군에게 지원했다. 또 미국 정부는 쿠데타 이후 군사 원조를 강화하겠다고도 약속했다(US National Security Archive, Washington Post, 1976. 12. 29.).

1964년 쿠데타 직후 우루과이로 망명한 굴라르는 1973년에는 아르헨티나 페론 대통령의 정치고문을 맡아 라틴 아메리카 사회 개혁 활동을 했다. 그러나 미 제국의 지원 아래 페론 정부를 전복한 비델라 군사 정부가 들어선 지 8개월 만인 1976년 12월 돌연 사망했다. 아울러 굴라르와 유사한 성향의 전 대통령(쿠아드루스의 전임 대통령) 올리베이라 역시 브라질 쿠데타 직후 해외로 망명했다가 귀국했으나, 1976년 8월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브라질 인민들은 그 역시 미 제국의 충견에게 암살되었다고 믿고 있다.

 

2) 미 제국의 군사 독재 정권 지원

쿠데타 직후 의회는 폐쇄되고, 노조 활동과 브랑쿠에 대한 비판은 법으로 금지되었다.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대는 무차별 학살당했다. 또한 군부 독재에 저항하는 인사에 대해 무자비한 고문과 살육이 자행되었다. 군사 정부의 폭압 통치를 미 제국이 조종했다는 사실은, 미 공공안보처(OPS)와 미 국제개발처(USAID), 중앙정보국(CIA)의 활동 상황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US National Security Archive).

2002년 10월 대선에서 개혁과 자주를 표방하고 당선된 룰라 대통령은 1960-1980년대에 자행된 친미 군부 집단의 민간인 탄압 실상을 조사하여 공개하라고 관련 부처에 지시했다. 이에 대해 친미 우익 군부가 불쾌감을 표시하자, 국방장관을 해임하기까지 했다(Reuters, 2004. 12. 7.). 그러나 그 역시 우익 군부 인사들을 과감히 청산하지는 못했다.

 

* 이외에도 볼리비아, 페루, 파라과이, 우루과이, 아이티, 온두라스 등 중남미 모든 국가들의 현대사에는 미 제국이 있다. 무력과 달러를 앞세운 미 제국은, 각국의 친미 우익 기득권 세력과 더불어 온갖 공작을 모의ㆍ실행하고, 각국의 내정에 개입해 왔다. 중남미 침탈사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이들 나라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한다. (다음 호에 중동ㆍ아프리카, 동남아ㆍ태평양 침탈사 등이 이어집니다.)  노사과연

 

 

[참고 자료]

황성환, ≪아메리카 제국의 몰락≫ 상ㆍ하권, 민플러스, 2018.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ㆍ2ㆍ3권, 돌베개, 2015.

김재천, ≪CIA 블랙박스≫, 플래닛미디어, 2011.

≪위키백과≫ 등.

 

 


 

1) 전남대 미국문화연구소(소장 김태진), “1980년대 한국에서의 미국 이미지의 변화”, 1988.

 

2)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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