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붉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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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진|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

 

공산주의와 여성주의 모두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붉은 사랑》에 대해서는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콜론타이의 소설 가운데 사랑에 대한 그녀의 사상을 가장 잘 담아낸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한국에서도 이 책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랑을 모색하던 지식인들 사이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중 일부는 실제로 《붉은 사랑》을 인용하며 자유로운 연애를 실천하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소설을 읽어보면 이러한 반응이 다소 의아하게 여겨질 정도로 답답한 이야기다. 이야기는 두 사람의 사랑보다는 이별의 과정을 집중적으로 다루며, 그것도 깨끗하고 아름다운 이별이 아니라 질투와 혼란과 미련으로 점철된, 남편의 변절과 혼외관계로 인한 결혼의 파국을 그리고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 소설의 줄거리는 그냥 통속적인 ‘막장드라마’로 보이기도 한다. 콜론타이가 무엇보다 자유연애론으로 잘 알려진 인물임을 생각하면, 이 소설이 콜론타이의 대표작이라는 것이 더더욱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대체 이 소설의 어떤 점이 그렇게 특별한 것일까?

변심한 남자와 고민 끝에 그를 떠나는 여자라는 구도 자체는 신선한 것도 특이한 것도 아니지만, 이를 바라보고 풀어내는 콜론타이의 시각에는 그녀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통찰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사랑에 관한 것이지만, 또한 삶에 관한 것이자 관계에 관한 것이고, 계급에 관한 것이고, 사회와 정치에 관한 것이며, 그러면서 역사와 그것을 살아가는 인간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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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사랑》에서 콜론타이는 사랑에 대해 어떤 깨달음을 드러내고 있을까? 우선, 이 소설은 사람과 사랑이 분리될 수 없음을, 즉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와 어떤 사랑을 하느냐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말한다. 소설의 주인공 바샤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할 때조차 이를 간과할 정도로) 연인인 블라지미르를 신뢰하고 존중하며, 의심이 되고 화가 날 때도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이성과 절도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이는 평소 모범적인 공산당원으로서 바샤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연인이 잘못 가고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날을 세우고 비판하며, 심지어 블라디미르와 하역 인부들이 대립할 때 연인에 대한 걱정보다는 인부들의 분노에 대한 공감이 먼저 솟아올라 인부들의 투쟁을 도와주기까지 하는데, 이러한 행동은 어머니가 볼셰비키 활동을 이유로 자꾸 욕을 하자 어머니와 의절하고 집을 나와버릴 정도로 신념에 철저한 바샤의 가치관을 고려하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블라지미르의 행동 역시 그의 평소 사람됨과 무관하지 않다. 충실한 공산주의자였을 때조차 블라지미르는 다른 사람의 눈총을 살 정도로 자기과시를 하거나 감정에 치우쳐 실언을 하는 등 자기규율이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데 (사실 그는 개인적인 욕망과 감정에 대한 어떠한 규율도 억압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는 그가 근본적으로 자기절제력이 부족한 인물임을 드러내준다. 두 여자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자기 고민과 괴로움에만 몰입하여 바샤의 마음을 헤아려주지도, 니나의 상황을 배려해주지도 않으며 바샤에게 일방적으로 화풀이만 하는 모습은 이런 미성숙한 성격의 사람이 극단적인 스트레스 상황에 놓였을 때 쉽게 보일 수 있는 반응이다. 미국의 ‘비단 스타킹을 신은 숙녀들’에 대한 블라지미르의 수다는 그가 소비주의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암시하며, 그녀들과의 일을 자랑하면서도 그녀들을 경멸하고 ‘순결한 소녀’를 운운하는 발언에서는 교묘한 성차별주의가 엿보인다. 그가 겉치레가 화려하고 외모가 아름다운 니나에게 빠져들고, 니나가 그와 첫 관계를 했다는 이유로 자신이 니나에게 구속되어 있다고 느끼게 되는 전개는 소설의 초반부에서 이미 그 단초가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진취성이 없고 누군가에게 보살핌받는 것에만 익숙한 니나의 성격과 그녀가 연애에서 보이는 수동적인 태도와 바샤에게 일말의 미안함도 보이지 않는 이기심(이는 바샤가 니나의 입장까지 헤아리고 배려하는 것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역시 어렵지 않게 연관지을 수 있다. 사랑에 임하는 자세,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 연애 관계에서 부딪히는 여러 상황들에 대응하는 방식은 결국 평소의 사람됨에서 나온다. 책임 있고 성숙한 사람만이 책임 있고 성숙한 연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붉은 사랑》은 사랑이 두 사람의 관계와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한다. 단순히 연모하는 마음만으로는 조화로운 관계를 담보할 수 없으며, 사는 세계가 너무 다르고 공감대가 없는 관계에서는 사실 이러한 마음이 유지되기도 어렵다. 바샤는 이야기의 결말부에서 페도세예프 부부와 도라의 갈등을 보면서 이 사실을 깨닫고, 그로 인해 드디어 블라지미르와의 이별을 완전히 납득하고 수용할 수 있게 된다. 페도세예프 가의 남편이, 서로의 성격과 삶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서로 공감하지도 못하는 부부 관계를 억지로 유지하는 것보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상대와 새롭게 결합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고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생활양식 면에서나 가치관 면에서나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게 되어버린 바샤와 블라지미르에게도 갈라서는 것이 나은 길임을 깨닫고 홀가분해지는 것이다.

물론 콜론타이가 정치적 입장이나 가치관, 생활 양식이 똑같은 사람들끼리만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콜론타이의 다른 소설인 《세 세대의 세 가지 사랑》에서는 확신에 찬 혁명가인 마리야가 부르주아 남성인 M과 열렬한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이 관계는 본인들도 놀랄 만큼의 강렬한 열정과 모성애에 가까운 마리야의 애정에 힘입어 지탱되는 것이며, 마리야는 M을 깊이 사랑하는 동안에도 그와 삶을 함께할 수 없음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있다. 그들의 사랑은 그들의 계급적 적대관계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겨내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두 사람의 관계를 더 전면적이고 더 깊은 것으로 발전시키는 데 뛰어넘을 수 없는 장애물로 작용하는 것이다. 사랑이 두 사람의 관계의 맥락을 초극한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 서로 모든 면에서 생각과 습관이 일치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서로 존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 관계가 기반에 깔려 있어야 조화롭고 행복한 사랑을 지켜나갈 수 있다.

셋째로, 《붉은 사랑》은 사랑이 계급성과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한다. 콜론타이는 《날개 달린 에로스의 길을 열자》에서 공산주의 사회에서 발달할 평등과 공감, 공동체적 유대에 기초한 새로운 사랑의 방식을, 성차별적이고 소유적인 자본주의 사회의 사랑과 대조함으로써 계급과 사랑을 연결시킨다.

사실 앞서 언급했던 블라지미르나 니나의 사람됨 역시, 한편으로는 그들의 개인적 특성이지만 한편으로는 각각 쁘띠부르주아적 (후에는 관료적) 계급성과 부르주아적인 계급성의 발현이기도 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계급성과 사랑에 관한 콜론타이의 시각이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는 곳은 바샤가 블라지미르의 부름에 답해 블라지미르의 집으로 옮겨간 뒤 집안에서 남편을 ‘내조’하는 아내의 역할을 강요받으며 그런 생활에 대해 갑갑함과 혼란을 느끼는 부분이다. 블라지미르는 ‘사업’을 위해 바샤에게 “품위를 갖춘 식사”를 제때제때 준비해줄 것을 요구하고, 그 외에 당의 과제나 자신의 업무에 대해 바샤와 어떤 상의도 하지 않는다. 바샤에게 허용된 사회생활은 블라지미르의 손님들과 어울리거나 극장에 가는 것 정도다. 이는 부르주아 가정에서는 전형적이고 당연한 역할 분담이지만, 사회에서 자기 위치를 가지고 남성들과 다름없이 공적인 과업을 주도적으로 수행하는 데 익숙해져 있던 바샤에게는, 호사스러운 부르주아 여성의 생활이 권태롭고 무의미하게만 느껴진다. 결국 바샤는 스스로 일거리를 찾아나서기까지 한다.

공산주의자였을 때는 바샤를 동지로서 존경하고 따르던 블라지미르가 관료주의에 빠져 부르주아적인 사치에 맛을 들인 후로는 바샤를 집안의 관리자로 전락시키려 드는 것, 그리고 그가 바샤에게 요구하는 역할이 당시 부르주아 여성의 성역할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바샤는 여전히 변함없이 투철한 계급성의 프롤레타리아트이며, 사회 전체에 대한 시각을 포기하지 않는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격리는 물론 호화로운 생활 전체에 대한 의문을 그치게 하지 못한다. 반면 부르주아 여성으로서의 계급성을 한 번도 포기해본 적이 없는 니나가 그러한 역할을 맡게 된다면 몹시 만족스러워할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콜론타이는 이러한 가정의 모습을 통해 부르주아적 사랑의 모델이 여성에게 얼마나 예속적인지, 그러한 예속을 어떻게 여성에게 내면화시키는지, 또한 이러한 사랑의 방식이 어떻게 사랑을 사회와 분리시켜 ‘사적 영역’이라는 게토 안으로 밀어넣고 여성의 사회적 통찰과 참여를 봉쇄하는지를 꼬집고 있다.

또한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샤는 니나까지도 포괄하는 박애를 추구함으로써 블라지미르에 대한 애착을 승화시키려고 노력하는데, 그루샤는 이에 대해 ‘그들이 아니라 노동자들에 대한 사랑을 가져라’라고 핀잔을 준다. 어느 쪽이든, 이는 연모의 감정을 공동체 성원들에 대한 애정과 헌신으로 전환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콜론타이가 《날개 달린 에로스》에서 역설한 공산주의적 사랑의 구체화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교과서적이고 작위적인 결말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랑의 에너지가 반드시 한 사람에 대한 집착으로 흘러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감정적으로 의지할 기반을 배타적이고 특별한 연애관계가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과 애정에서 찾는 인간상이 그렇게 비현실적이지만은 않다. 아니, 지금과 완전히 다른 원리에 의해 돌아가는 사회를 추구하는 급진주의자라면 이러한 인간상을 상상할 수 있는 정도의 과감함은 마땅히 지녀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넷째로, 《붉은 사랑》은 사랑이 사회와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한다. 모든 인간사가 그렇듯, 사랑 역시 그 사회의 조건들에 의해 틀지워지고, 연애하는 자세 또는 연애에 따르는 상황에 대응하는 방식은 개인에 따라서 달라지기는 하지만 사회적 조건이 허락하는 한도를 벗어날 수 없다. 블라지미르가 부르주아적 성별분업과 순결관념으로 퇴행해버린 것은 단순히 그가 개인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신경제정책에 따른 부르주아적 요소들의 부활과 관료화라는 사회적 경향에 휩쓸렸기 때문이다. 니나가 자신의 무능력과 수동성을 전혀 극복하지 않고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에 안주할 수 있었던 것은 혁명 이후에도 사회의 부르주아적 요소들이 완전히 청산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샤가 남성들과 눈높이를 마주하는 대등한 주체로 설 수 있었으며 블라지미르에게 종속되지 않고 독자적인 시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정치세력과 달리 여성의 정치 참여를 백안시하지 않았던 공산당과 여성에게도 공적인 업무를 개방하는 정치 시스템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또한 블라지미르와 결혼할 수 없다는 이유로 낙태를 선택한 니나와 달리 바샤가 혼자된 몸으로도 당당하게 출산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강인한 성격의 발로이지만, 자식을 부양할 남편이 없어도 사회는 (이 믿음이 실제로 얼마나 현실적인가와는 별개로) 그녀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탁아소를 통해 양육을 책임져줄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다면 훨씬 더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만약 1920년대 소비에트 연방의 역사가 다르게 흘러갔다면 이 인물들의 성향도, 그들의 관계와 행동도 달라졌을 것이다. 신경제정책이 도입되지 않았다면 바샤와 블라지미르의 사랑은 좀더 오래 지속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계속된 궁핍과 물자 부족 때문에 바샤가 일찍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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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샤와 블라지미르가 함께 행복해 했던 기간은 길지 않으며, 그들은 이내 엇갈리기 시작해 결국은 한 쪽의 완전한 변절과 이별로 관계를 끝맺고 만다. 이 과정에서 미숙하고 불완전한 것은 블라지미르나 니나뿐만은 아니다. 강인하고 올곧은 활동가이기는 하지만, 바샤 역시 감정에 휩쓸려 생각이 극단으로 치닫거나 상황을 직시하지 않고 외면하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인다. 블라지미르의 변명 때문에 그의 변절과 관료화를 명확하게 간파하지 못하고, 그의 이기적인 행동에 대해서는 한 번 시원하게 일침을 놓지도 못한다. 블라지미르와 관계를 정리하기로 결심하고도 니나를 질투하며, 이별 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힘들어한다. 바샤가 지나치게 모범적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소설을 찬찬히 읽다 보면 그녀에게도 소심하고 명석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심오한 목적을 위한 고민들이 아니라 그저 인간적인 빈틈이다. 그녀의 심리적 갈등은 블라지미르 때문에 일어났지만, 그 갈등이 빠르게 해결되지 못하고 계속 길어지는 것은 사실 많은 부분 그녀의 성격 때문이다.

결말 역시 완전한 답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바샤는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신뢰로 이별을 극복하려 하지만, 이전에도 그랬듯이 이후에도 아마 이 애정은 공동체의 미숙과 거듭되는 난관 때문에 계속해서 도전받을 것이고, 바샤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무관심과 무책임에 몇 번이고 지치고 환멸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

결국 《붉은 사랑》은 성공적인 사랑 이야기도 아니고, 사랑에 대한 정답을 제시해 주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기에는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나 이 소설이 그리는 시대가 너무 결점투성이다. 콜론타이가 보다 잘 정립된 공동체와 수준 높은 구성원들 속에서 살아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투철한 커플의 이야기를 그렸더라면 콜론타이가 생각하는 사랑의 이상이 더 명료하게 드러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문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불성실한 일이고, 역사와 인간을 모두 오도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사회는 이론적인 모델에 완전히 부합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새로운 시대의 역사에도 구시대의 요소들은 뿌리깊게 잔존하며, 현실은 언제나 이상에 미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인간 또한 결코 완벽해지지 못한다. 뻔하게 알 수 있는 것을 외면하기도 하고, 이기심에 빠져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욕망이나 집착을 놓지 못해 스스로를 괴롭히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인간상은 이상적인 세상에서 그 사회에 조응하며 살아가는 완성된 인간이 아니라, 복잡하고 힘든 세상에서, 불완전한 상태로, 그래도 어떻게든 올바른 길을 찾고 신념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인간이다. 바샤가 이상적인 인물이라면, 그것은 결점이 없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바로 이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그녀는 힘겨운 과정을 거쳐 결국 부패한 것과 단절하고, 나름의 시각으로 자신의 상황을 정리해내고, 상처를 사랑으로 극복하며 자신의 길을 걸어 자신의 사랑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여전히 문제투성이인 사회에 대해 희망을 버리지 않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노력에 다시금 뛰어든다.

‘붉은 사랑’ ― 공산주의자다운, 해방을 추구하는 인간에게 어울리는 사랑은 완성된 사랑의 모델을 실현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자세를 갖춤으로써 개척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붉은 사랑》에서 읽어낼 수 있는 사랑에 대한 가장 진솔한 통찰이다. 공산주의라는 이념과 그것이 요구하는 생활 양식과 몸에 배어 있는 연애 각본 사이의 모순 때문에 혼란스럽고 힘들 때마다 이 소설이 그렇게도 깊은 위안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엇보다도 콜론타이의 이런 시선 때문이 아닐까. <노사과연>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Dec 11th, 2013 | By | Category: 2013년 12월호 제96호, 회원마당 | 조회수: 1,3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