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정세] 부정해야 할 우리의 적은 둘이면서도 하나―한국으로부터의 호소에 촉발되어

 

 

도마츠 가츠노리(土松克典)

 | 활동가집단 사상운동(活動家集團思想運動) 회원

번역: 편집부

 

 

* 이 글은, <활동가집단 사상운동>이 매월 1일 발행하는 정치신문, ≪사상운동≫ 제1044호(2019년 9월 1일)에 게재된 글입니다.

 

 

예컨대

김(金)이여, 박(朴)이여, 최(崔)여,

하는 식으로 불러 주오

한국의 주물공 여러분들이여

그쪽 8월의 공장은

형편이 어떠한가

일본의 주물공이

한국에 지지 말라고

다그침을 받을 때

그대들도 또

일본을 뒤쫓아 가

일본을 추월하라고

더 매몰차게 당하고 있는가

그대들의 강건한 육체는 더욱 강건해졌는가

그대들의 쓰라린 사상은 어떻게 더 쓰라려 가고 있는가

 

서로 경쟁시켜 벌려고 한다

속여 가면서 벌려고 한다

권력을 악용하는 놈

그에 기생하는 놈

오적(五賊)이 횡행하는

세상에

우리들도 살고 있다.

 

부정해야 할

우리들의 적은

둘이면서도 하나

 

땀투성이 손을

그대들의 하늘을 향해

내어뻗는다

 

(시 8월, 제3련과 제4련 / 우에다 히사시(うえだひさし) 시집 ≪鋳物工場から≫ 수록.)

 

 

일한 간의 알력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들과 오랜 기간 교류를 지속해 온 한국의 노동사회과학연구소가 발행하는 월간지 ≪정세와 노동≫ 제153호(2019년 7ㆍ8월호)의 권두에 김해인 편집출판위원장(이하, 김해인 위원장)의 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위하여가 게재되었다. 아래의 글은 김해인 위원장의 이 글에 촉발되어, 일본의 오늘날의 상황을 보면서 쓴 것이다.

 

 

8월 수상 관저 앞에서

 

이야기는 8월 상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경제 보복 조치를 발표한 가운데, 8월 8일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이하, 한통련)이 호소한, 일본 수상 관저 앞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거기에는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가 내건 각양각색의 깃발이나, 최근 한국의 아베(安倍) 규탄 집회에서 잘 볼 수 있는 NO 아베! 플래카드를 손에 든 200명 가까운 노동자ㆍ시민이 모였다. 한통련 손형근(孫亨根) 의장의 주최자 인사말에 일본 측 우호 단체의 인사말이 이어졌고, 그 사이사이에 한통련 멤버들의 꽹과리와 북에 어우러진 항의 구호가 반복되었고, 마지막으로 일본 정부에 대한 한통련의 항의문이 낭독되었다. (한통련이 주최ㆍ호소한 이 일본 수상 관저 앞 시위에 관해서, 그날 현지 취재하고 있던 한국의 미디어는 대개 주최자를 일본의 시민단체라고 의도적으로 왜곡하여 보도하고 있었다. 그것은, 문재인 정권하에서도 한통련이 여전히 반국가단체라는 규정에서 풀리지 못하고, 의장의 입국이 허가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미디어 측이 알고 있어서, 그러한 문재인 정권을 미디어 측이 촌탁(忖度)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보도 자세는 큰 잘못임을 지적해 둔다.)

저도 그곳에 참가하는 중에, 우호 단체의 발언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그것은, 이 플래카드를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처럼, 한국 사람들은 결코 반일이 아닙니다. NO 아베!인 것입니다. 그 점에서는 우리들 일본의 민주적인 사람들과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람들은 전적으로 공통적이지 않을까요?라고, 참가자들에게 묻는 것이었다. 그러자 참가자들로부터는 즉시 맞습니다!라는 함성과 박수가 일어나며, 항의 시위는 진행되었다. 발언한 우호 단체 대표로서는, 일본과 한국의 사람들이 협동하여 NO 아베!로 일치해서 제악(諸惡)의 근원=아베를 타도하자!는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라고 저는 생각한다. 우리 일본의 노동자계급ㆍ인민은, 한국 사람들은 결코 반일이 아닙니다. NO 아베!인 것입니다라는 발언에 찬동하여, 즉시 맞습니다!라는 함성을 질러도 좋은 것인가?

확실히 매주 토요일에 서울의 광화문 광장에서 벌어지는 아베 규탄 집회에 참가하는 한국 인민이 손수 만든 플래카드에는 아베 NO! 일본 사람 YES!라는 표현도 보인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라고 저는 생각하는 것이다. 왜인가?

한국 사람들은 결코 반일이 아닙니다. NO 아베!인 것입니다라는 인식하에 행동하면, 역사적으로 억압 민족으로서의 일본 인민 속에 지금도 뿌리박고 있는 식민지주의 의식은 극복되는 것인가?

제악의 근원=아베를 정권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면, (그것조차 가능하지 않은 일본의 운동 상황이지만,) 그것으로 문제는 해결되는 것인가?

저에게 이 발언이 마음에 걸렸던 것은,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지나쳐 버릴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어떤 서명 운동에서 생각하다

 

이 시위 2주일 전인 7월 25일, 인터넷 공간에 일한관계 악화를 우려하는 유지(有志) 78인에 의한 한국은 인가라는 성명이 발표되고, 이에 찬동하는 사람을 모으는 온라인 서명 운동이 호소되어, 8월 15일의 제1차 마감에 찬동자는 8,404명에 달하고 있다(온라인 서명 운동은 8월 31일까지 계속). 그 공표되어 있는 호소인ㆍ찬동자 명단을 보면, 평소 우리의 활동에 이해를 표하고 협력해 주고 있는 분들의 이름도 여기저기 발견된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서도, 그러나, 라고 생각한다.

이 성명에서 제기되어 있는 내용은,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일본 방문 때에 당시의 수상 오부찌(小渕)와 김대중 대통령 사이에서 교환된 일한 파트너쉽 선언의 토대로 되돌아가 일한 관계를 재구축하자고 호소한 것이다. 이 일한 파트너쉽 선언은 당시에 일본의 매스컴에서 1965년의 일한 기본 조약에 이은 일한의 제2의 문서라고도 평가되었다(≪日本經濟新聞≫, 1998년 10월 8일자). 그 선언의 발표에 앞서, 김대중 대통령의 정책 브레인으로서 정책자문기획위원장을 맡았던 최장집(崔章集) 고려대 교수(정치학)는 당시에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65년의 한일 조약냉전 절정기의 반공 방파제의 산물이며, 냉전의 해체, 글로벌화 시대의 도래, 동아시아의 경제 위기라고 하는 격변을 맞아 새로운 한일 파트너쉽이 필요해졌다. 하지만, 그동안의 한일 관계는 비상히 경직된 관계를 계속해 왔다. 새로운 한일 관계의 수립은 지금까지의 국가 일변도라는 접근 방법을 넘어 국가와 시민사회의 두 방향에서 접근할 때 가능해진다. 양국 시민사회 간의 유연한 관계의 증진은 국가 간의 경직된 관계를 보완한다. 국가 수준에서의 양국 관계는, 과거 문제의 처리 때문에, 다양한 영역에서 상호 의존적인 선린 관계를 쌓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 사이에 시민사회 수준에서의 신속한 교류의 활성화는, 더디게 발전하는 국가 수준에서의 관계에 커다란 압력 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라고(한국 신문 ≪중앙일보≫, 1998년 9월 14일자. [원문은, [중앙시평] 새로운 한일관계의 조건, <https://news.joins.com/article/3698045>에서 볼 수 있다: 역자]).

일한 간의 시민 교류가 경직된 국가 관계를 보완한다고 하는 기본틀(Schema)이다. 그것은 일본과 한국의 시민활동가들이 얼른 덤벼들 만한 구상이다. 그리고 그 귀결은 일한 관계에서의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길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미래 지향의 일한 관계라고 불렀다(≪思想運動≫, 1998년 10월 15일자 졸고 참조). 사실, 성명(聲明) 한국은 인가에서도 자유 무역의 원칙으로 되돌아갈 것을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일한 관계에서의 자본주의적 근대화가 목표로 했던 것이 2002년의 일한 투자 협정의 체결이었고, 2004년 이래 좌절되어 있긴 하지만 그 체결을 목표로 했던 일한 FTA, 나아가 군사 면에서 2016년에 체결한 GSOMIA가 아니었던가?

우리는, 1997년에 한국 경제가 빠졌던 디폴트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 IMF로부터 수차에 걸친 구제 금융을 받아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길을 더듬어 왔던 경과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도태되는 기업으로부터 한국의 노동자와 인민이 하룻밤 새에 가두로 내던져지는 처참한 상태에 놓이고, 노동력의 유연화라는 이름하에 구조화되는 비정규 노동자나 해외로부터 유입되어 오는 이주 노동자의 실상도 보아 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연장선상에서 전개되려고 하는 일한 투자 협정이나 일한 FTA 등, 일한 관계에서의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길에 전력을 다해 저항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이번 한국 정부로부터의 GSOMIA 종료 성명에 대해서 외상(外相) 고노(河野)는, 현하의 지역 안전 보장 환경을 완전히 잘못 본 대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고, 극히 유감 따위의 허튼소리를 했지만, 우리 일한의 노동자계급과 인민에게 있어서 GSOMIA 따위는 파기되어야 마땅하며, 조선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저해 요인일 수밖에 없는 폭력 조치였었다. 그러한 생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조선)의 노동자계급ㆍ인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깊이 생각하는 자세로써

 

그런데 그 후 이 일한 파트너쉽 선언도, 2001년에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新しい歷史敎科書をつくる會)이 집필한 부소사(扶桑社) 판 ≪새로운 역사교과서(新しい歷史敎科書)≫가 채택됨으로써, 한국 국회에서 일한 관계의 전면 재검토와 그 선언의 폐기가 만장일치로 채택되어 좌절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1998년 10월 15일 날이 밝기 전, 치바(千葉) 조선회관에 흉한(兇漢)이 침입, 숙직하고 있던 조선총련(朝鮮總聯) 치바지부의 라훈(羅勳) 부위원장을 마구 찌르고, 야구 방망이로 머리와 가슴을 구타, 목을 조른 후에 휘발성 기름을 뿌려 불살라 죽인 잔학한 테러 방화 살인 사건이 일어난 사실이다. 이 테러 방화 살인 사건은, 같은 해 8월 31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인공위성을 발사(중국과 러시아가 인공위성임을 공인, 뒤늦게 미국도 추인)한 것을 일본 정부만이 미사일 발사라고 강변하고, 그것을 매스컴이 선동적으로 부채질하는 가운데 일어난 흉악한 범행이었다. 그리고 이 흉악한 범행은 일한 파트너쉽 선언이 교환된 지 겨우 1주일 후의 일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한국은 조선과는 다르기 때문에라고 단정해 버릴까?

1923년의 간또 대지진[關東大震災]에서의 조선인 대학살에서 명백한 것처럼, 일본 내셔날리즘은 일이 생기면 그 칼날을 조선 인민에게 돌려 온 역사의 교훈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이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도 아베 정권하에서 배양되고 충동되고 있다는 것은 작년 2월 23일 미명에 일어난 2명의 우익활동가에 의한 조선총련 본부 총격 사건을 보아도 명백하다.

이렇게 보게 되면, 일본 노동자계급ㆍ인민의 역사 인식, 식민지주의 의식을 어떠한 방향에서 극복해 갈 것인가가 지금 우리의 문제로 되어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멈춰 서서, ①일본과 조선반도의 지배ㆍ피지배의 역사를 생각할 것, ②일본과 한국과 아메리카합중국을 맺는 자본주의 체제의 형성 과정과 현재를 생각할 것, 나아가서는 ③조선반도의 분단 상황에 종지부를 찍고, 어떻게 하면 남북조선의 자주적 통일을 성취하는 사업의 촉진을 위해서 일본 노동자계급ㆍ인민으로서 기여할 것인가, 이러한 것들을 깊이 생각하여 행동할 것, 행동하면서 깊이 생각할 것, 지금, 우리 일본의 노동자계급ㆍ인민에게 요구되는 자세인 것이다. 실로 노동사회과학연구소의 기관지 ≪정세와 노동≫의 캐치프레이즈(catch phrase)가 생각하며 투쟁하는 노동자의이듯이!

저는 이러한 태도를 계속 견지하는 것이야말로 김해인 위원장의 호소에 응답할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해인 위원장의 지적

 

그리하여, 김해인 위원장의 호소를 듣고 생각한 것을 아래에 몇 가지 써 두고 싶다.

김해인 위원장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실천하는 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지적을 하고 있다(이하, < > 속은 김해인 위원장의 문장의 인용).

 

일한 조약 반대 운동에 희박했던 관점

• 우선, <어떤 자본주의(제국주의) 국가도 과거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에 대해, 진정성 있는 반성과 사죄, 배상을 한 예는 없습니다. (중략)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국, 프랑스, 이딸리아, 벨기에 등 모든 국가들이 그러합니다. 저들이 과거 식민지들에게 일정액을 주었다면, 그것은 사죄의 의미, 배상의 의미가 아니라, 경제 지원 등을 명목으로, 그 지역에서 자신들의 정치적ㆍ경제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일한 기본 조약과 청구권 협정 등 관련 협정에 대한 김해인 위원장의 기본 시각이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한 기본 조약은, 쏘련ㆍ중국ㆍ조선 등 동아시아에서의 사회주의권의 신장에 대한 반공 방파제 형성의 필요를 느낀 아메리카 제국주의의 알선에 의해, 1951년의 예비회담으로부터 시작되어 1965년의 조인까지 7차에 걸친 회담, 햇수로 15년의 세월을 요하여 체결된 것이다.

체결 당시 일본의 운동 측에서의 일한 기본 조약에 대한 인식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그것은, 1965년 12월에 일조(日朝) 양국 인민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와 남조선의 박정희 정권 사이에 일본국과 대한민국 사이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일한 기본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것은 한국 정부를 조선에 있는 유일한 합법적 정부로 인정하고, 미ㆍ일ㆍ한 3국의 군사적 일체화에 박차를 가함과 함께, 일본 독점자본의 남조선을 위시한 대만ㆍ동남아시아 지역들로의 경제 진출을 활발화시킨 획기(劃期)였다(鹽田壓兵衛ㆍ長谷川正安ㆍ藤原彰 編, ≪戰後史資料集≫, 新日本出版社, 1984)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인식이었다. 여기에서 명백한 것처럼, 당시 일본의 일한 조약 반대 운동에는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아메리카 제국주의에 의한 반공 방파제 만들기의 일환이라는 인식은 있어도,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자국 정부에 대한 책임 추궁이라는 관점은 희박했던 것은 아닐까? 결국, 추진하는 일본 정부는 물론, 반대하는 일본의 운동 측에도 전쟁 책임 추궁이라는 관점은 희박했다. 일한 조약 반대 투쟁 속에서, 朴にやるなら僕にくれ(박에게 주려면, 나에게 줘)(일본에서는 도, 똑같이 ぼく(보꾸)라고 발음한다. [그리고 여기서 은 박정희, 혹은 한국을 의미한다: 역자])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렸다는 이야기는 현재까지도 계속 화제로 되어 있다.

그러한 일본 측의 상황도 있어서인지, 일한 청구권 협정 제1조에 기입된 무상(無償) 3억 달러의 공여와 유상(有償) 2억 달러의 대부는, 일본국의 생산물 및 일본인의 노무[役務]에 의해서 이루어지도록 기록되어 있고, 그들 자금은 생산물이나 노무를 제공한 일본의 재계(財界)로 환류하는 구조였고, 결코 배상(賠償) 따위는 아니었다. 사실, 이 독립 축하금(일한 기본 조약과 관련 협정의 일본 측 조인자의 한 사람인 외상 시나 에츠사부로(椎名悦三郎)의 말)이라고 하는 경제 협력 방식의 무상ㆍ유상 공여는, 당시 박정희 정권하에서 베트남 파병의 대가로 아메리카 제국주의로부터 들어오는 외자와 더불어, 60년대부터 70년대의 한국의 자본주의적 발전의 밑천이 되었다.

지금도 일본 정부는, 이 일한 청구권 협정의 제2조 제1항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 또는 제2조 제3항 서명일 이전에 생긴 모든 청구권에 관해서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다라는 문언(文言)을 방패로 삼아, 新日鐵住金(신닛테츠스미킨)과 三菱重工業(미츠비시쥬코규)에 대한 작년의, 전시 강제 동원 피해자에 대한 개인 배상을 명한 한국 대법원 판결을 비판하고 있다. 작년 10월 30일에 新日鐵住金의 배상을 명한 한국 대법원의 판결이 나온 후, 외무성은 11월 19일자로 자신의 홈페이지 속의 대한민국이라는 페이지에 있는 구(舊)조선반도 출신 노동자 문제라는 코너에 개황(槪況) 보고서(fact sheet) 구(舊)조선반도 출신 노동자 문제란?을 마련했다. 무릇 이 구(舊)조선반도 출신 노동자라고 하는 말 자체가, 조선을 식민지 지배했던 그 강제성을 인정하지 않는, 마치 자유 의지로 일본 땅으로 돈벌이하러 온 것과 같은 표현으로, 남북조선 인민에게는 결코 용인될 수 없는 표현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들 판결은, 1965년의 일한 청구권 협정에 명백히 반(反)하고 있습니다. 일한 관계의 법적 기반을 뒤엎을 뿐 아니라, 전후(戰後) 국제 질서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기도 합니다라고, 뻔뻔스레 설교를 늘어놓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일본 정부의 거짓말과 속임수가 숨어 있다.

그것을, 장기간 이 전시 강제 동원 피해자의 소송에 관여해 온 자이마 히데카즈(在間秀和) 변호사는 ≪사상운동≫ 2018년 12월 1일호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要旨)로 지적하고 있다. ― 국가 간의 협정에 의해서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주장[論]은 지금까지 일본 정부 스스로가 반복해서 주장해 온 것이다. 1992년의 중의원(衆議院) 외무위원회에서 당시 외무성 조약국장 야나이 지(柳井俊二)는, 이 협정을 두고 말하자면, 흔히 말하는 외교보호권을 포기했다고 하는 것이어서, 한국의 여러분들에 관해서 말씀드리자면, 한국의 여러분이 우리나라에 대해서 개인으로서 그러한 청구를 제기하는 것까지는 방해하고 있지 않다고 언명하고 있다.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19조에 일본국 및 일본 국민의 모든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하는 조항이 있기 때문에, 예컨대, 1955년에 제소된 원폭(原爆) 피해자 소송에서 일본 정부는 포기한 것은 외교보호권뿐이고, 국민 자신의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는다라며, 국가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 후의 시베리아 억류 소송에서도 일본 정부는, 일쏘 공동 선언을 방패로 삼아, 같은 주장을 반복했다. 결국, 일본 정부는 자기 나라의 국민으로부터 책임을 추궁당하면, 개인의 청구권까지는 포기된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論]으로 책임 회피를 꾀하고, 역으로 한국인이 일본 기업의 책임을 묻는 장면에서는 개인의 청구권도 소멸했다고 말한다. 일한 청구권 협정에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라고 아무리 수식어가 붙어 있더라도, 이 국제법의 기본 원리에 변함은 없다, 라고.

 

조약 교섭에 관여했던 일본 측의 역사 인식

• 다음으로, <이상에서 볼 때, 현재의 일본 정부가 조선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진정성 있는 반성과 사죄, 배상을 할 리가 만무합니다.>라고 그는 지적한다.

이는, 7차에 걸친 일한 기본 조약 교섭 과정에서도 일한 정부 사이에 최후까지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애매모호한 문구[玉虫色の文言]로 결말이 난 것과도 관계가 있다. 구(舊)조약 무효 확인 조항이라고 불리는 일한 기본 조약 제2조는, 1910년 8월 22일 이전에 대일본제국과 대한제국 사이에서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은 이미 무효임이 확인된다고 되어 있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식민지 지배가 정당한 절차를 거쳐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일본 정부 측과, 무력을 배경으로 부당하고 불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한국 정부 측에서 교섭이 평행선을 걸어, 이미(영문으로 already)라고 하는 문구를 삽입함으로써, 일한 기본 조약이 체결된 1965년의 시점에서 무효로 하고, 정당ㆍ합법이었는가, 부당ㆍ불법이었는가는 일한 쌍방의 해석에 맡겼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음으로써, 해결했다고 간주하는 조문화(條文化) 작업의 전형(典型)이라고 요시자와 후미토시(吉澤文寿) 교수(新潟国際情報大学)는 지적한다.

무릇 역대 일본 정부는, 조선 식민지 지배가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견해를 답습해 왔다. 이는, 전시 성노예 피해자에 대한 군(軍) 당국의 관여와 강제성을 인정하여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 고노 내각관방장관(河野 內閣官房長官) 담화(1993년)를 발표할 당시의 미야자와(宮澤) 정권에서도, 식민지 지배나 침략 전쟁을 책임을 인정하여 통절(痛切)한 반성진정한[心からの] 사과를 표명한 전후(戰後) 50년의 무라야마(村山) 수상 담화(1995년)를 발표한 무라야마 정권에서도, 이 자세에는 변화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햇수로 15년에 걸친 일한 기본 조약과 관련 협정의 교섭 과정에서 교섭은 몇 번이고 중단되었는데, 그 원인에 제3차 회담에서의 일본 측 수석대표였던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郎)(외무성 參與)의 발언이나, 제7차 회담에서의 일본 측 수석대표였던 다카스기 신이찌(高杉晋一)(三菱電機 相談役三菱経済研究所 理事長経團連 経済協力委員長)의 발언이 있었음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아래의 발언은, 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 저, ≪검증 일한회담(検証 日韓会談)≫(岩波新書)으로부터의 인용이다.

구보타(久保田)는 어떤 발언을 했는가? ― 일본으로서도 조선의 철도나 항만을 만든다든가, 농지를 조성했고, 대장성(大蔵省)은 당시 여러 해에 걸쳐 2,000만 엔이나 지출했다. 이것들을 반환하라고 주장하면 한국 측의 정치적 청구권과 상쇄하려고 한다고 하는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닌가? / 사견(私見)으로서 말하는 것이지만이라고 전제하고 나서, 당시 일본이 (조선에) 가지 않았다면, 중국이나 러시아인이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 한국 측 대표가 왜 카이로 선언에 조선 인민의 노예 상태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가 하고 따져 물은 것에 대해서, 사견이지만, 그것은 전쟁 중에 흥분한 심리 상태에서 쓰여진 것이고, 나는 노예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1953년 10월 15일, 제3차 일한 회담의 재산 청구권위원회 석상에서.)

다카스기(高杉)는 어떤 발언을 했는가? ― 일본은 조선을 지배했다고 하지만, 우리나라는 좋은 일을 하려고 했다. 산에는 나무가 한 그루도 없다고 하는데, 이것은 조선이 일본에서 떨어져 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20년 더 일본과 같이했다면,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 일본은 조선에 공장이나 가옥, 산림 등을 모두 두고 왔다. 창씨개명도 좋았다. 조선인을 동화시켜 일본인과 같이 대하기 위해서 취해진 조치로서, 착취라든가 억압이라든가 하는 것이 아니다.(1965년 1월에 일한 회담에서 일본 측 주석(主席)대표에 취임한 외무성 기자 클럽에서, 비보도 발언이었던 것을, ≪아카하타(赤旗)≫, 같은 해, 1월 21일자가 폭로.)

나아가, 이 다카스기와 나란히 일한 기본 조약과 관련 협정 체결의 일본 측 조인자인 외상 시나 에츠사부로는, 저서 ≪동화와 정치(童話と政治)≫에서 일본이 메이지(明治) 이래 이렇게 강대한 서구 제국주의로부터 아시아를 지키고, 일본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 대만을 경영하고, 조선을 합방하고, 만주의 5족공화(五族共和)의 꿈을 기탁한 것이 일본 제국주의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영광의 제국주의라고까지 쓰고 있다.

이들 발언이나 저술이, 앞에서 지적한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식민지 지배는 정당한 절차를 거쳐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잘못된 역사 인식에 기초한 것임은 역연하다. 일한 기본 협정과 관련 협정에 관여한 인물들의 역사 인식은 이러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 역대 일본 정부에 계승되어, 오늘날의 한국 대법원 판결에, 그리고 아베 정권의 대(對)한 보복 조치로 이어지고 있다고 저는 생각한다. 오늘날 수상 아베가 내뱉고 있는 일한 청구권 협정에 위반하는 등, 국가와 국가의 신뢰 관계를 훼손하는 대응을 한국 측이 계속하고 있다, 우선 국가와 국가의 신뢰 관계를 회복하고, 약속을 지켰으면 하는 기본적인 방침은 금후에도 변함이 없다. 그들이 국가와 국가의 약속을 지키라고 계속 요구하려고 한다(한국 정부로부터 GSOMIA 종료 통고를 받고 나서의 발언)와, 앞에서 지적한 구보타나 다카스기나 시나 등의 언동은 멋지게 일치하고(synchronize) 있지 않은가!

자이마(在間) 변호사는, 앞에서 말한 개인의 청구권을 둘러싼 일본 정부의 계교를 ≪사상운동≫지(紙)에서 폭로한 데에 이어서, 문제는 우선 가해국인 일본 정부의 대응에 있다. 14년간에 걸친 일한 협의에서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극구 부정하고, 배상액의 감액에 부심한다고 하는 일본 정부의 태도, 이로써는 피해자는 아무리 거액의 배상금이 제시되더라도 납득할 수 없다. 일본 측에 가장 부족한 것은 오랜 기간의 식민지 지배를 받으며 시달린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려고 하는 자세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저는 그것을 강하게 지지한 위에서, 아직도 불식되지 않은 일본 정부와 일본 재계의 종주국 의식에 관해서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김복동 할머니의 생활 방식에서 배운다

• 나아가, <한ㆍ일 간의 민족 문제는, 양국 모두에서 지배계급에게 억압ㆍ착취받았던 노동자ㆍ근로인민 대중이 주인되는 세상, 즉 양국이 모두 사회주의 사회로 될 때, 일본 인민들은 진심으로 사과할 수 있고, 한국 인민들은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게 되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라는 지적이다.

이 시각(視角)에 관해서, 저는 동의한다. 따라서 앞에서 저는, 일본 노동자계급ㆍ인민의 역사 인식, 식민지주의 의식을 어떠한 방향에서 극복해 갈 것인가가 지금 우리에게 문제로 되어 있다고 썼지만, 그 방향이란 사회주의 사회를 지향하는 방향으로밖에는 해결할 수 없는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전시 강제 동원 피해자나 전시 성노예 피해자 분들은 모두 고령이고, 사회주의 사회의 실현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

그것은 김복동 할머니(ハルモニ)께서 몸으로 보여 주신 생활 방식에서 배울 필요가 있다. 전시 성노예 피해자로부터 인권활동가로, 하루하루의 투쟁 속에서 김복동 할머니는 번데기가 껍질을 깨고 나비가 되는 것처럼 성장해 가셨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에는 일본 정부에 의한 조선고급학교에 대한 무상화(無償化) 배제(排除)라는 공격에 굴하지 않고 싸우고 있는 생도들을 직접 방문, 격려하시고, 사회의 부조리와 싸우는 모습을 온몸으로 보여 주셨다.

우리도 김복동 할머니께서 인권활동가로서 그 생을 다하신 것처럼, 사회주의의 신념으로써 끝까지 살아갈 것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 땅에서도 마찬가지의 일을 말할 수 있지만, 20년 이상 한국의 동지들과 교류를 계속하고 있자, 일찍이 민주노총에서 전투적으로 투쟁하고 있던 활동가가 전선을 이탈한다든가, 거꾸로 활동가를 공격하는 측에 서서 깃발을 흔들고 있는 이야기를 듣는 일이 있다. 돈이나 생활상의 일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곤란을 이겨 내는 공고(鞏固)한 신념과 긍지를 관철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활동가는 우리의 선배들 중에 실제로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 선배들이 걸어온 길을 우리도 뒤따라가고 싶다. 그 무수한 투쟁의 성과물로서 우리는 사회주의 사회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1950년대 다케이 데루오의 문제 제기

• 마지막으로, <가해자는 일본인이고, 피해자는 조선인인 것이 아니라, 가해자는 지배계급이고, 피해자는 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 노동자ㆍ인민 대중들이었다는 것입니다.>라고 하는 지적이다.

이 문장은 백미(白眉)라고도 해야 할 곳이며, 저도 이 계급적인 것이라는 관점에 동의합니다. 그와 동시에, 역사적으로 억압 민족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일본 노동자계급ㆍ인민이 정치적ㆍ조직적으로 성장하고 있지 못한 상황 속에서 그 배외주의 폭력이 어디로 향하는가 하면, 재일 조선인을 포함한 남북조선 인민을 향하고 있는 것도, 지금까지 써 온 것처럼 사실입니다.

무릇 일본 패전으로부터 3년 후인 1948년 8월 15일에 ≪요미우리신문(読売新聞)≫이 했던, 천황제에 관하여―본사 여론 조사에서는, 당신은 이 일본의 천황이라는 제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설문에, 천황제는 있는 편이 좋다가 90.3%, 천황제는 없어지는 편이 좋다가 4.0%, 모른다가 5.7%라는 결과가 나오고 있다(梅田正己 著, ≪일본 내셔날리즘의 역사(日本ナショナリズムの歴史)≫ 제Ⅲ권, 高文研 刊, pp. 282-283). 결국 9할가량의 일본 인민이 천황제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것도 전전(戰前)이 아니라, 패전으로부터 3년밖에 지나지 않은 1948년이라는 단계에서 이렇게 높은 지지율이었다. 2019년 현재에도 천황제 지지가 8할 내지 9할이기 때문에, 전후부터 현재까지 천황제 지지는 거의 변함이 없다. 그뿐 아니라, 전전부터 전후를 관통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천황제 지지를 압도적 다수의 일본 인민이 표명하고 있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위협으로 느끼고 있는 사람이 8할 이상에 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위협의 배후에는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조선에 대한 멸시가 존재한다.

결국, 주권자 의식은 희박하고 신민 의식(臣民意識)이 높고, 조선에 대해서는 우호 의식이 희박하고 종주국 의식이 높은 것이 현재의 일본 인민의 실상인 것이다. 나아가 이번의, 한국에 대한 이른바 화이트 국가 배제 조치의 실시에 앞서 일본의 경제산업성(經濟産業省)이 행한 공개 논평(public comment)에는 4만666건의 의견이 달려, 그 가운데 95% 이상이 찬성 의견이었음을 경제산업상(經濟産業相) 세꼬(世耕)는 8월 2일의 기자 회견에서 자랑했다.

김해인 위원장의 계급적인 것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일본 노동자계급ㆍ인민의 의식의 현실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김해인 위원장의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국제적 연대는 자국의 지배계급에 맞서는 투쟁의 힘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국에서는 아무런 힘도 없는데, 말로만 국제적 연대를 외쳐봐야,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말뿐인 연대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라는 경구(警句)를 자기 일로서 받아들인다. 말뿐인 연대가 아닌, 자국의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투쟁력에 기초한 국제 연대를 어떻게 하면 쌓아올릴 수 있을까?

이 과제에 도전하는 실마리로서 일찍이 우리의 선배 다케이 데루오(武井昭夫; 1927년 생)1)는, 1957년의 단계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우리에게 남겨 주시고 있다. 다케이(武井)의 전후(戰後) 세대와 전쟁 책임―우리들 세대의 자기 해명을 위하여에서는, 우리 전후 세대는 왜 이러한 참담한 10년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 세대가 전후의 출발에 대응하여 자신의 전쟁 책임을 별로 구명(究明)하지 못하고, 전세대(前世代)의 사상을 제각기 일방적으로 주어진 사상으로서 받아들인 안이함에서 기인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생략) 전후 세대의 전쟁 책임이 별로 해명되어 있지 않다고 하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생략) 그것은, 이미 말한 것처럼, 자신의 가장 중요한 시기의 정신사(精神史)를 공백으로 팽개쳐 둔 세대가 지난 10년 동안, 전후의 격동한 사회적 현실에 어떻게 대결해 올 수 있었겠는가 하는 반성으로 이어지는 문제일 것이다. (생략) 우리들은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청춘이 더듬어 온 10년간의 전쟁 체험, 10년간의 전후 체험을 남김없이 모두 반추하고 분석함으로써, 금후 우리들이 일치하여 나아갈 길을 우리들 스스로의 손으로 환하게 비추어 내는 작업에 착수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세대가 늙어서 과거를 회고하는 참담함에 빠지지 않고, 오늘의 젊음으로 내일을 개척하기 위해서 지금 그것이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만일 이 시기를 놓치고 타성적으로 내일로 떠내려간다면, 우리는 끝끝내 찢겨진 대로의 세대로서 끊임없는 혼돈 속을 방황하고, 결국은 다음 세대의 사람들에 의해서 엄중히 전후 책임을 추궁당하는 자리에 앉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초출(初出)은 ≪호세이(法政)대학신문≫, 1957년 2월 15일호, ≪武井昭夫批評集 1. 戰後文學とアヴァンギャルド 文學者の戰後責任≫, 未來社, 1975년 간(刊)에 수록.) 또한 다케이는 다음과 같은 문장도 남겨 주시고 있다. 즉, 전후 민주주의의 부정은 어디에 도달하는가에서, 그는 오늘날 만일 세대에 대한 집착에 무언가 의의가 있다면, 한 세대를 통일하는 논리와 의식을 형성할 수 있었을 때, 그것은 다름 아니라 모든 세대를 관통하는 인민의 통일의 회복을 준비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전후 세대, 특히 제2차 대전 후 세대에게 있어서 세대 통일의 계기는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패전에 의해서 외부로부터 주어지고, 전후의 평화 속에서 자라 온 민주주의의 인민적 개조 투쟁에 있다고 생각한다(초출(初出)은 ≪일본독서신문≫, 1960년 1월 18일호, 앞의 ≪武井昭夫批評集 1≫에 수록)라고도 지적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다케이 스스로가 속한 전전(戰前)을 알고 있는 전후 세대와, 그 후를 잇는 제2차 대전 후 세대의 정신 상태가 적혀 있다. 다케이가 조감(鳥瞰)하고 있는 것처럼, 전후 세대의 전쟁 체험이 별로 해명되어 있지 않았다는 자각에 기초하여 우리들의 청춘이 더듬어 온 10년간의 전쟁 체험, 10년간의 전후 체험을 남김없이 모두 반추하고 분석함으로써, 금후 우리들이 일치하여 나아갈 길을 우리들 스스로의 손으로 환하게 비추어 내는 작업에 착수하는 작업과, 그 뒤를 잇는 제2차 대전 후 세대가 담당해야 할 패전에 의해서 외부로부터 주어지고, 전후의 평화 속에서 자라온 민주주의의 인민적 개조 투쟁에 성공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이, 앞에도 적은 것처럼, 제2차 대전 후 세대의 뒤를 잇는 일한 조약 세대가, 일본 군국주의에 의한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자국 정부에 대한 책임 추궁이라는 관점을 확립할 수 없었던 바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전후 세대로부터 제2차 대전 후 세대를 거쳐 일한 조약 세대가 더듬어 온 이러한 노정의 연장선상에 오늘날의 우리가 있다. 그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상황은, 이라고 하면, 실로 다케이가 남긴 문장에 있는, 엄중하게 전후 책임을 추궁당하는 자리에 앉혀져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다케이가 적은 다음 세대의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로 침략ㆍ식민지 지배를 받은 측의 인민으로부터 추궁당하고 있다. 그리고 다케이가 가탁(假託)했던 다음 세대의 사람들은 아직도 피해자 의식만을 비대화시키면서 곤히 잠든 채로 있다. 그러나 절망만은 아니다. 다케이는 뒤따라올 세대에 대해서 하나의 광명이 될 문제도 제기하고 있다. 오늘날 만일 세대에 대한 집착에 무언가 의의가 있다면, 한 세대를 통일하는 논리와 의식을 형성할 수 있었을 때, 그것은 다름 아니라 모든 세대를 관통하는 인민의 통일의 회복을 준비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가 그것이다. 우리는 지금, 한 세대를 통일하는 논리와 의식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답은 부정적이다. 빈둥빈둥하면서 아베 정권에 계속 패배하고 있는 현실 앞에서, 역사는 단지 죽은 어제로부터 오늘, 오늘로부터 내일로의 연속밖에는 아닌 것 같다. 이러한 노예 상태로부터 우리는 탈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생각하는 소재로서 다케이의 이 문제 제기를 포착하고 싶다. 러시아의 혁명적 민주주의자의 세대가, 레닌을 필두로 하는 러시아 10월 사회주의 혁명을 실행한 세대를 준비한 것처럼. 동학 농민 봉기의 세대가, 3ㆍ1 독립운동의 세대를 준비한 것처럼.

 

 

마지막으로

 

일본에서는, 아베 정권에 의한 이번 수출 규제 조치라고 하는 대(對)한 보복 공격은, ①지난해 한국 대법원에 의한 전시 강제 동원 피해자=이른바 징용공(徵用工) 재판의 판결에 대한 공격이라는 측면과, ②한국 경제를 약체화시켜 일본 자본이 한국 경제를 삼키려고 하는 침략적 측면, 그리고 ③우여곡절은 있지만 평화를 향해서 나아가려고 하는 조선반도의 정세에 대한 견제라는 세 개의 측면이 있다고 지적되고 있다.

①[첫째]로는, 한국 대법원이 주도면밀한 준비하에 내린 판결이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어떤 궤변을 농하든, 그것을 뒤집을 수 없다. 그러나 일본 정부도 전후(戰後) 일관해서 취해 온, 조선 식민지 지배의 역사에 대한 정당ㆍ합법이라는 자세는 무너뜨리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천황제를 지지하는 두터운 일본 국민이라는, 조선에 대한 종주국 의식의 벽(壁)에 의해서 보강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은 제1차적으로는 일본의 노동자계급과 근로 인민이 맞닥뜨리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제다. 노동사회과학연구소 김해인 위원장의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민족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에 입각하여, 패전 후에도 일본 인민 속에 뿌리 깊게 만연한 식민지 종주국 의식과 대결하고, 노동자계급의 계급 의식ㆍ역사 인식을 단련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②[둘째]로는, 문재인 정권도 대(對)일 대항 조치로서의 수출 규제 조치와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오염수 문제를 내년의 도쿄 올림픽을 시야에 넣고 도마 위에 올리고 있다. 나아가, 아베 정권의 수출 규제 조치에 대항하여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지 않는 자체의 첨단 소재 생산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거국일치를 꾀하는 고용노동부 장관이 민주노총에 대해서 파업 자제를 요청하고 있다는 등의 보도가 나오고 있다. 한국 내셔날리즘에 민주노총도 끌어들이려는 움직임이지만, 민주노총은 이에 굴하지 않고, 파업을 견지하며 싸울 자세를 보여 주고 있다.

한국 정부의 GSOMIA 종료라는 보도를 접한 민주노총은 8월 22일 당일에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 결정에 대한 민주노총의 성명을 발표하며, 다음과 같이 일본 노동자와의 연대를 호소했다.

일본 아베 정권과의 군사 협정 파기를 환영한다.

이번 군사 협정 파기는 대법원의 정당한 강제 징용 배상 판결에 무역 규제 조치로 경제 보복을 자행한 일본 아베 정권에 대한 규탄이자, 광화문 광장을 가득 채운 촛불의 성과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은 1천7백만 촛불 시민과 노동자 힘으로 끌어내린 박근혜 정권이 졸속 처리한 적폐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적폐다. 살을 에는 추위에도 국정농단 세력을 응징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던 노동자ㆍ민중은 역사 왜곡에 더해 경제 침략과 평화 위협을 자행하는 일본 아베 정권을 규탄하며 한여름 폭염에도 다시 촛불을 들었다. 일제 전쟁 범죄와 강제 동원 역사에 대한 사죄와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친일 적폐를 청산하기 위한 준엄한 투쟁이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자본은 일본과의 경제 전쟁을 핑계로 노동자 어깨 위에 유연근로제 확대와 화학물질관리법 완화 운운하며 희생을 강요한다. 갈 길은 아직 멀었고 적폐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독버섯처럼 쌓여 있다. 친일ㆍ친미 사대주의에 기대어 대대로 우리 사회 모든 부(富)를 빨아들이는 재벌 대기업이 그렇고, 이들에게 기생하며 세를 불린 극우보수 세력과 언론이 그렇다.

그러나 우리 노동자ㆍ민중은 패배를 모른다. 나라 안 적폐 정권을 퇴진시키는 역사를 넘어, 동아시아 패권을 노리는 일본 아베 정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단결한 촛불 행진은 남김 없는 적폐 청산과 완전한 사회 대개혁의 그날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민주노총은 이 땅의 민중뿐만 아니라, 일본의 진보적인 노동자ㆍ시민과 함께 연대해 아베 정권의 역사 왜곡과 평화 위협, 노동자 탄압에 맞서 물러섬 없이 연대하고 투쟁할 것이다라고.

한편, 일본에서는 8월 6일에 전국노동조합연락협의회(전노협[全勞協])가 아베 정권의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ㆍ화이트 국가 제외에 항의하고, 일한 노동자ㆍ시민은 연대하여 폭거 저지를 위해 투쟁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또 장기간 민주노총 전북본부와 계속 교류하고 있는 간사이(關西) 지방의 일한민주노동자연대도 8월 21일에 전북본부와 공동으로 일한 노동자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나아가서 민주노총 홈페이지에 의하면, 8월 22일부터 24일까지의 일정으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대표자가 일본을 방문하고, 교토(京都) 우토로 지구의 재일 동포를 방문한 후, 2016년에 교토 단바(丹波)의 망간광산 기념관에 설치한 일제 강제 징용 조선인 노동자상 앞에서 일본인 단체 및 재일 동포와 함께 추도 행사를 개최한 것이 보도되어 있다. 나아가 24일에는 우끼시마마루(浮島丸) 희생자2) 합동 추도 행사에도 참가할 예정이라고 보도되어 있다.

매년 11월에 거행되는 민주노총 주최 전국 노동자대회에 참가하여 격려를 받은 일본의 노동조합이나 단체들, 개인들이 많다. 또한 매년 5월 1일에 민주노총으로부터 연대의 메시지를 받고 있는 히비야(日比谷) 메이데이 실행위원회도 있다. 현재와 같은 때야말로 일한 노동자 공동의 성명을 발표하여, 전쟁 책임ㆍ식민지 지배 책임에 대해 모른 채하며, 조선반도의 평화를 방해하는 아베 정권에 대하여 항의의 함성을 지르자!

나아가, 일본 정부의 대(對)한 보복 공격을 구실로 한 한국 정부ㆍ자본에 의한 포섭 전략에 말려들지 않고 노동자계급의 독자성을 견지하며 싸우는 민주노총에 격려의 함성을 보내자!

그것은 일한 관계의 자본주의적 길이 아닌, 노동자의 국제주의의 실천이다.

③[셋째]로는, 8월 5일부터 20일까지 한미 합동군사연습 동맹19-2가 강행되었다. 조선반도의 평화를 향한 움직임에 역행하는 이 한미 합동군사연습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강하게 반발하고, 연습 기간 중에 수차례에 걸친 단거리 비행체의 발사 실험을 하여 강한 경고를 발했다. 작년부터 계속되는 남북ㆍ조미 수뇌 회담에서의 합의에 반하는 위험한 한미 합동군사연습이라는 전쟁 도발 책동에 대하여, 일본에서는 아베 정권에 의한 대(對)한 보복 조치의 발동에 눈을 빼앗겨 유효한 항의ㆍ규탄 행동이 조직되지 않았다. 한국 내에서는 어떠했을까?

조선의 위기를 선동하는 것으로 지지율을 유지해 온 아베 정권이, 대(對)조선 제재 공격에 더하여 대(對)한 보복 조치에 나섬으로써 조선반도의 화평(和平)을 향한 움직임에 쐐기를 박으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일한 노동자는 조선 노동자와 함께 전력을 다하여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아메리카 제국주의를 정점으로, 조선반도 북반부를 대상으로 한 일미ㆍ한미 합동군사연습을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에도, 일한 노동자는 조선 노동자와 함께 전력을 다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김해인 위원장은 호소하고 있다. <저들 자본가 지배계급은, 양국 인민들의 민족 감정을 이용하고 있지만, 저들 모두는 제국주의 동맹에 기반한 착취계급이고, 양국의 노동자ㆍ인민 대중은 저들에게 착취당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는 하나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호를 소리 높여 외칩시다.>라고.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 1848년에 ≪공산당 선언≫을 끝맺으면서 채용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170년여. 이 슬로건은 언제나 노동자계급이 나아가야 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길을 밝혀 주어 왔다. 그것은 실로 자국 제국주의를 타도하여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렇지만 그 투쟁을 조직해야 할 정치 지도부의 부재와, 그 길로 나아가는 것을 저지하고 자본주의의 틀 내에 머물려고 하는 다양한 반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운동 속에 혼미를 조성하고 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운동이야말로 압도적인 다수자의 이익을 위한 압도적인 다수자의 자립적 운동(≪공산당 선언≫)이다. 이에 확신을 가지고, 자국 노동자계급의 정치적ㆍ조직적 성장에 기여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정치적 지도부를 형성해 가는 투쟁의 일익을 각자의 땅에서 담당하기 위해서, 활동가집단 사상운동과 노동사회과학연구소는 협동하여, 일본과 한국의 노동자 속에서 계속 활동해 가자!

 

모두(冒頭)에 실은 시는, ≪사회평론≫ 제6호(활동가집단 사상운동 발행, 1976년 10월 간행)에 게재된, 야마구찌현 우베시(山口県宇部市)의 주물공으로 노동자 시인 우에다 히사시(うえだひさし)의 시 8월의 일부분이다. 그렇다. 부정해야 할 우리의 적은 둘이면서도 하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단호히 관철하여 일한 노동자는 조선 노동자와 함께 단결하여 투쟁에 나서자!  노사과연

 

 


 

1) 패전 후 GHQ* 점령하에서, 반제국주의, 학원 민주화, 국제 연대를 내걸고 1948년에 결성된 ‘전일본 학생자치회 총연합’(약칭, 전학련(全学連))의 초대 중앙집행위원장. 제1차 전학련은 철저한 운동의 대중적 형성, 민주제의 관철ㆍ존중, 경세(警世)의 종(鐘)이 될 급진주의적 행동, 인터내셔날한 시약의 획득과 인터내셔날리즘의 실천이라는 4원칙에 서서 싸우면서, 이 시기에 일본의 전국ㆍ전 분야에서 광분하던 레드 퍼지(red purge, 적색분자 숙청)를 유일하게 막아 냈다.

* [역자 주] 제2차 대전에서의 일본의 패전 후에 1945년 10월 2일부터,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발효된 1952년 4월 28일까지 일본을 점령ㆍ지배했던 ‘연합군 최고사령부’. 실제로는 D. 맥아더를 사령관으로 하는 미군 총사령부.

 

2) [역자 주] 우끼시마마루(浮島丸) 사건. 조선인 징용 노동자 및 그 가족 3,725명과 승무원 255명을 싣고 부산항으로 가던, 일본 해군 특설운송함정 우끼시마마루(4,730톤)가 미군이 설치했던 기뢰에 부딪쳐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 20분경에 교토(京都) 마이즈루시(舞鶴市) 사바카(佐波賀) 앞바다에서 침몰한 사건으로, 일본 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조선인 524명과 승무원 25명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 조선인 승선자 수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측되고, 따라서 사망ㆍ실종자도 공식 발표보다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기뢰 충돌에 의한 사고가 아닌 고의적인 폭침이라는 의혹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2002년 조선에서는 ≪살아있는 령혼들≫이라는 영화가 2019년 한국에서는 ≪우키시마호≫라는 영화가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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