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회원마당: 이 달의 역사] 한국(조선) 전쟁(2)―국민보도연맹 학살과 국가보안법

오해영 | 회원

 

 

 

우리는 지난 호에서 한국(조선) 전쟁을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 대 조선 인민의 계급 전쟁으로 규정하고, 시간 순으로 전선을 따라가며 그 전개 과정 및 결과를 살펴보았다. 이승만 정권은 전쟁을 통해 이남의 혁명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후 철저한 반공주의, 미국의 경제 원조, 주한미군을 백그라운드 삼아 정권을 유지ㆍ강화해 갔다. 그의 정권이 유지되는 동안은 물론이거니와 그가 물러난 후에 들어선 다른 권력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지금까지도 아주 유효하게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논리로 작용하고 있다. 주한미군은 아직도 실체로서 이 땅에 주둔하고 있고, 반공주의는 국가보안법으로 여전히 건재하며, 현재 재벌 중심의 독점자본주의 경제 구조 형성의 바탕이 미국의 경제 원조였다는 것쯤은 모두 알고 있으리라.

이 모든 문제를 이번 호에서 다 다루고 싶었지만 나의 역량이 부족하므로 원조 경제와 주한미군 문제는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넘기고, 그중 반공 이데올로기가 한국(조선) 전쟁을 거쳐 어떻게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게 되었고 지금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살아남아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벌써부터 겁이 난다. 이 근원적이고 무거운 주제를 내가 제대로 다룰 자신이 없어서이다. 나는 학자도 아니거니와 이 분야에 대해 오래 공부한 사람도 아니다. 단지, 이 글을 쓰기 위해 이 책, 저 책을 들추며 한국(조선) 전쟁에 대한 방대한 자료 중 극히 일부만을 찾아 발췌하여 요약하며 내 생각을 더할 뿐이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 주시길 부탁드린다.

 

이승만의 반공 통치. 생각을 처벌하는 법을 만들다

미군정의 도움으로 무리하게 대한민국 단독정부(1948. 8. 15.)를 세운 이승만 정권은 대중적 기반이 약했다. 따라서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반공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이런 이해가 미군정과 맞아떨어졌다. 특히, 식민지 시대부터 꾸준히 민족 해방 운동을 벌이며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던 사회주의 세력인 남로당에 대한 탄압이 해방 직후부터 진행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유격 투쟁1)을 하는 남로당과 민중들을 대상으로 이승만 정부는 대대적이고 끈질긴 토벌 작전을 벌여 1950년에 이르면 일부 소규모 유격대만 남은 상황이 된다. 그리고 1948년 12월 1일, 드디어 좌익 세력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들, 그리고 민중들을 효과적으로 탄압할 수 있는 합법적인 무기인 국가보안법을 제정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국가보안법은 입증 가능한 행위가 아닌 의도를 추정해 처벌하는 것이 가능한 법으로, 당시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 제정 1년 만인 1949년 11만8621명을 검거ㆍ투옥했고, 132개 정당과 사회단체를 해산시켰으며, 8000-9000명의 군인을 입건하거나 구속ㆍ숙청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정적들을 제거하였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단심제로 사형까지 가능하도록 1949년 12월 19일 국가보안법을 개정하였으나 인권유린법이란 비난으로 결국 시행하지 못한다. 이승만의 이 꿈은 한국(조선) 전쟁이 발발하는 1950년 6월 25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1호 비상조치령2)의 시행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전쟁 기간 동안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이 비상조치령에 의해 1심 판결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죽어 갔다.

한편, 국가보안법의 시행으로 전향 가능성이 있는 자에 대한 선고 유예 및 교화 작업인 보도 구금과 보호 구금소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곧 한국(조선) 전쟁 발발 초기에 일어난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의 원흉이 된다.

 

민간인 학살의 시작.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

일제 강점기 때 친일 전향 단체였던 대화숙을 본떠서 만든 조직체 국민보도연맹3)대한민국 정부 절대 지지, 북한 정권 절대 반대, 인류의 자유와 민족성을 무시하는 공산주의 사상 배격ㆍ분쇄, 남로당, 조선 노동당 파괴 정책 폭로ㆍ분쇄, 민족 진영 각 정당ㆍ사회단체와 협력해 총력을 결집한다는 내용 등을 내세워 철저한 반공주의를 강령으로 삼았다.

가입자 수는 1949년 말 기준 30만 명에 달했다. 애초에 좌파 낙인이 찍힌 사람들을 의무적인 가입 대상으로 하였으나, 실제로는 공무원들의 실적주의로 가입을 강요받은 경우가 많았으며 지역별 할당제였기 때문에 사상범이 아닌 경우도 가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평범한 농부들에게 고무신을 나눠 주거나 비료를 주는 조건으로, 가족 중 월북자나 남로당원이 있다는 이유로, 정치인들 중에서는 남북 협상에 참가한 중도파나 우파 정당(한국독립당), 미군 철수를 주장한 소장파 국회의원들도 반강제적으로 가입되는 경우도 많았다.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소집되어 기합이나 체벌을 받아 가며 반공 교육을 받아야 했다. 교육에 불참하거나 달아나면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입기 때문에 꼼짝없이 당해야만 했다.

한국(조선)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승만은 보도연맹원이 조선 인민군에 협조할 것을 우려해 아직 점령되지 않은 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을 무차별 검속하고 학살하였다. 학살 주체4)는 육군특무대(CIC)와 헌병들로 이들은 보도연맹원들을 산골짜기, 우물, 갱도 등에 모아다가 한꺼번에 총살하였다.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한 보도연맹원들도 있고, 유가족도 살아 있었지만 아무도 이에 대해 말을 꺼내진 못했다. 그들이 보도연맹 사건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곧 자신도 빨갱이로 몰려 감옥에 끌려가거나 국가 권력에 의해 살해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보도연맹 학살 사건은 철저히 은폐됐고 오랜 기간 동안 금기시되어 왔다. 따라서 학살된 보도연맹원의 수는 당연히도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조사 주체에 따라서도 그 수가 크게 차이가 나지만 대략 20만 명에서 50만 명 사이로 추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2009년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는 보도연맹원의 체포와 사살 명령을 내린 주체에 대해서는 오랜 시간이 지나 확인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5) 그러나, 학살이 특정 지역에서만이 아니라 한강 이남 전국의 모든 시ㆍ군 단위에서 대량으로 일어난 점, 특히 전투가 없었던 지역에서 일어난 학살의 경우 희생 일정이 대체로 비슷했던 점 등을 보았을 때, 최고 통수권자의 명령에 의해 계획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봐야 마땅하다 하겠다.

 

전쟁 속에 스러져 간 민중들.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보도연맹원 학살은 한국(조선) 전쟁 시기 전선의 이동에 따라 소위 톱질 학살이라 불리는 모든 민간인 학살의 출발점이 되어 이 땅의 민중들을 극심한 공포와 트라우마로 몰아넣게 된다. 시작은 이렇다. 전투가 없는 곳에서는 국군 및 경찰, 우익 세력들은 적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유로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하며 후퇴한다. 그리고 조선 인민군이 내려와 점령하여 보도연맹원 학살에 대한 보복 학살이 일어난다. 이후 점령지를 수복한 국군과 경찰은 인민군을 도왔을 것이라며 부역죄를 씌워 또다시 마을 사람들을 살해한다. 전선이 형성되어 전투가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피난민들을 적의 방패가 될 것이라며 또 학살한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전쟁 속에서 장기판의 말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희생되었다. 그리고 여태껏 우리가 알고 있던 사실과는 다르게 인민군에 의한 학살보다 국군과 경찰, 그리고 미군에 의한 학살이 월등한 규모로 많았다. 그럼에도 인민군과 좌익의 잔혹한 만행에 대한 근거 없는 강조는 모든 의혹을 덮어 왔으며 이견을 허락하지 않았다. 학살 사건의 책임자 처벌은 아직까지도 우리의 숙제로 남아 있다. 당시 최고 통수권자였던 이승만이 물러났으니 그것으로 된 것인가? 그렇다면, 더 이상 거리낄 것 없이 진실을 명명백백히 밝히면 될 것을 도대체 우리 사회의 어떤 두려움이 진실 규명을 가로막고 있는 것일까?

 

민간인 학살. 공산주의에 대한 근원적 공포를 심어 주다

한국(조선) 전쟁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다룬 책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의 저자6)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한국 내의 민주주의, 남북 관계, 한미 관계 등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국 전쟁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적으로 동감이다. 나는 거기에 더하여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증오와 혐오 문화의 뿌리도 한국(조선) 전쟁에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은 우리에게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뼛속 깊이 새겨 주었다. 당시 이승만은 자신의 정적들을 없애고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전쟁을 이용하여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학살당한 민간인들은 과거 사회주의자였다가 전향한 사람, 월북한 가족이 있는 사람,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던 우익 세력, 전쟁 기간 동안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마을 주민 등 그들의 실제 사상에 의해서가 아닌 처한 상황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몰려 죽임을 당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 모든 학살은 모두 나라를 위한 법적 처벌로서 정당한 것으로 포장되었다. 이러니 학살을 직접 보고 들은 전쟁 세대는 당연히 공산주의의 자만 들어도 무섭고, 혹시나 자신이 공산주의자로 몰릴까 두려워 반대로 반공을 더욱 찬양하고 공산주의를 증오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포와 증오는 언론, 문화, 학교 등을 통해 아이부터 어른까지 철저히 반공 교육을 주입하여 전쟁을 겪지 않은 다음 세대에게로 전승ㆍ발전(?)되어 갔다. 공산주의자는 국가에 공인된 온 나라의 적으로 누구든 마음껏 증오할 수 있었고, 그래야만 했다.7) 증오와 적개심을 드러내지 않으면 오히려 옹호자로 오인받아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었다. 이렇게 우리는 반공 교육이라는 이름의 증오 교육을 수십 년간 받아 왔고 차별과 약자에 대한 증오를 당연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학습된 증오(혐오)와 공포심으로 이제는 공산주의자 대신 난민, 저항하는 노동자, 성소수자, 여성(혹은 남성), 싫어하는 정당 등을 무차별 공격한다. 그러다 논리가 바닥나면 빨갱이로 몰면 그만이다. 그 순간부터 그동안의 공방과 이슈들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모두가 종북 프레임이라는 흑백 논리에 갇혀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우리 사회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이견은 용납되지 않으며 한쪽은 선, 다른 한쪽은 공격받아 마땅한 악이다. 굳이, 어느 쪽이 악이다라고 지칭하지 않아도 누구나 짐작 가능하다는 것이 바로 답이 정해져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런 상황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의도가능성만으로도 처벌이 가능한 국가보안법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국가보안법이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절대 자유롭게 논쟁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할 수 없을 것이다.

 

국가보안법. 이대로 괜찮은가

누구는 말할 것이다. 이제 새로운 민주 정부가 들어섰고, 트럼프도 군사 분계선을 넘어갔다 오는 이 시대에 더 이상 종북-좌파 몰이는 먹히지 않을 것이라고. 그리고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는 사람들도 없어져 굳이 무리하게 없애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고.

과연 그럴까? 우리는 애초에 그 법이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모체로 만들어졌음을 상기해야만 한다. 일제는 치안유지법을 이용하여 일본 본토에서는 사회주의와 노동 운동을 탄압했고, 식민지 조선에서는 무수히 많은 독립군들을 처벌하였다. 그리고 치안유지법을 본떠 만든 우리의 국가보안법은 이 땅에서 70여 년 동안 최상위 권력자들의 지배 수단으로 이용되며 수많은 간첩 조작 사건을 만들어 자신들의 정적을 제거하거나 민중들을 공포로 몰아넣어 입에 재갈을 물리고 순종하도록 만든 일등 공신이다. 그야말로 국가보안에 위협이 될 사상을 가진 사람을 처벌할 수 있는 법으로, 공산주의뿐만 아니라 어떤 사상, 어떤 활동이든 그것이 국가보안에 해를 끼친다고 판단해 버리면 그걸로 처벌이 되는 법인 것이다. 지배 계급은 절대 자신들의 권력을 민중들과 나누지 않기에 권력 유지의 막강한 도구인 국가보안법도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평화의 무드와 함께 국가보안법이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는 안일한 망상을 버려야 한다. 이 악법을 깨부술 수 있는 주체는 오로지 우리 자신임을 자각하고 끊임없이 싸워야 할 것이다!  노사과연

 

 

[참고 자료]

김동춘,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사계절.

신기철, ≪국민은 적이 아니다≫, 헤르츠나인.

위키백과.

 

 


1) 지리산, 오대산, 태백산, 호남, 영남, 제주도 유격 전구 등등.

2) 한국(조선) 전쟁 시기에는 3심제를 지켜야 하는 국가보안법보다 1심으로 사형까지 시킬 수 있는 비상조치령과 국군경비법이 더 많이 활용되었다. 두 법 모두 현재는 폐지되었으나 국가보안법은 아직도 남아 있다.

3) 외견상 민간단체 성격을 띠었으나, 조직 체제를 보면 총재직은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던 김효석이 맡았고, 고문으로는 신성모 국방장관, 지도위원장에는 이태희 서울지검장 등이 맡았다. 각종 장관들이 국민보도연맹 요직을 맡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민간단체라기보다는 관제단체에 가까웠다.

4) 당시 보도연맹 사건에 관련된 사진 자료 등을 통해 미군도 민간인 집단 학살 현장에 개입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미군이 피난민을 공격했다는 다수의 자료들이 발견되었다.

5) 2007년 <민간인 학살 진실 규명 충북 대책위> 기자 회견에서 전쟁 때 헌병대 간부였던 김00 씨는 “남로당 계열이나 보도연맹 관계자들을 처형하라”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는 증언을 함으로서, 보도연맹 집단 학살에 최고 통수권자 및 헌병대가 깊숙이 개입했다는 사실이 최초로 확인되었다. 그런데도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이와 같이 밝힌 것은 증언을 입증해 줄 문서 자료가 나오지 않아서인 것으로 보여 진다.

6) 김동춘(1959-).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노동 운동과 한국(조선) 전쟁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해 왔으며, 특히 한국(조선) 전쟁기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 활동가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전쟁과 사회≫, ≪분단과 한국사회≫, ≪한국사회 노동자 연구≫ 등의 저서가 있다.

7) 40대 중반인 나에게도 반공 포스터 및 글짓기 등을 통한 반공 교육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다. 그때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북한’ 사람을 늑대로 그리거나 사람의 모습이어도 얼굴은 늘 빨간색으로 그렸다. 지금은 통일 포스터 및 글짓기로 행사명이 바뀌었지만, 이북 지역의 체제(사회주의)나 생활 모습 등 올바른 남북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교육이 부재한 상태에서 명칭만 바꿔 진행되는 통일 행사는 또 다른 반공 교육일 뿐이다. 실제로 상당수의 학생들이 통일되면 같이 가난해진다며 통일을 반대하고, ‘북한’을 빨갱이로 지칭하며 무조건 비방하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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