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회원마당: 이 달의 역사] 한국(조선) 전쟁(1)

심미숙 | 편집위원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는 이유는 그것이 현재의 고통의 원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며, 이번 호 <이 달의 역사>에서는, 동족상잔의 비극 6ㆍ25라 불렸던, 그리고 여전히 그렇게 불리고 있는, 그러나 그것이 과연 정말로 동족끼리의 상잔이었는지? 그랬다면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 전쟁의 결과는 현재 한국 사회에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진실은 여전히 깊숙이 묻혀 있는, 한국 현대사 중에서도 가장 참혹했던 역사, 한국(조선) 전쟁을 돌아보고자 한다.

 

전쟁이라는 낱말의 사전적인 뜻은, 국가 간에 자국의 의사를 상대국에 강요하기 위해 수행되는 조직적인 무력 투쟁 혹은 폭력 행위의 상태 또는 정치적 권력 집단 사이에서 조직적인 정치ㆍ경제ㆍ사상 및 군사력 등을 사용하여 자기의 의사를 상대편에게 강요하는 투쟁 행위이다. 엥엘스는 권위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존재할 수 있는 가장 권위적인 수단소총, 총검, 대포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인구의 일부가 존재할 수 있는 가장 권위적인 수단인 소총, 총검, 대포로 또 다른 일부에게 자신들의 의지를 강요하는 행위혁명이라고 하며, 혁명은 존재하는 가장 권위적인 것이다1)라고도 말하고 있다.

 

 

한국(조선) 전쟁의 원인과 성격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 전쟁의 기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국 전쟁의 원인은 1945년에서 1950년 사이의 사건에서 찾아야 하며 … 이 막간의 시기―일본 통치로부터의 해방에서 시작되어, 분할된 두 국가의 수립을 거쳐, 1950년의 포성으로 끝난―는 하나의 역사적 단위를 형성하는데, 그 주된 특성은 혁명이다. 1945년 8월에 한국은 철저한 정치적, 경제적 및 사회적 변화에 대한 광범한 요구를 그 특징으로 하는 한 시대로 돌입했다. 정치적 변화에의 요구는 여러 가지 형태의 새로운 조직의 탄생으로 그 모습을 나타냈다. 정당들, 인민위원회들, 노동조합들 및 농민, 청년, 여성 등의 대중 조직들이 그것이다. …

1950년에 발발한 전쟁의 기본적 문제들은 해방 직후 불과 3개월 내에 이미 뚜렷해졌다. 그 결과로 농민반란, 노동쟁의, 게릴라 전쟁 및 38선 전역에 걸쳐 일어났던 공공연한 무력충돌 등을 통하여 결국 10만 명의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 모든 것이 표면적인 한국 전쟁의 발발 이전에 일어났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싸움의 성격은 내부적이며 혁명적인 것이었고, 1945년 직후에 시작되어 혁명과 반동의 논리 하에 진행되었던 것이다. 1950년 6월의 전통적 전투의 개시는 이 전쟁이 다른 방식으로 계속된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2) (강조는 인용자.)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부터, 그리고 특히 일제로부터 해방된 1945년 이후부터 한(조선)반도는 혁명 진영과 반혁명 진영의 격렬한 충돌이 계속되었다.3) 한(조선)반도는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쏘련과 사회주의 혁명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중국과 접하고 있어서, 사회주의 혁명에 고무된 인민들의 투쟁이 특히 활기를 띠었기 때문이다.

 

3ㆍ1 운동이 일어난 배경에도 러시아 혁명에서 강조된 레닌의 민족자결주의가 있었다.4) 3ㆍ1 운동 이후 결사의 자유가 일정하게 허용됨에 따라 1920년경부터 노농단체가 각지에 조직되었고 사회주의 성향의 활동가들이 점차 주도권을 쥐고 사회 운동을 이끌었다. 1921년에 조선 공산당이 조직되고 1924년에는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전국적 노농단체인 조선노농총동맹이 조직되었다. 이후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분립되어 조선청년총동맹과 함께 3총 시대를 열었고, 민족 해방 운동과 농민 운동, 노동 운동을 어느 때보다도 광범위하고 굳건하게 펼쳤다.

 

1945년 해방 직후 조선의 남쪽에서 전개된 상황을 살펴보자. 일제로부터 해방되자마자 조선 공산당이 재건되고 혁명적인 노조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그리고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어 실질적인 통치 기능을 발휘해 나갔다. 전국에 건설된 인민위원회를 기초로 하여 1945년 9월 6일 인민 대표 1,000여 명이 서울에 모여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이처럼 해방 직후 민중적 자치기관 혹은 권력기구인 인민위원회를 기반으로 한 조선인민공화국이 건설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3주 후인,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이틀 후인 9월 8일에 조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은 이승만과 친미(친일) 지주 세력과 결탁하여 조선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를 무력으로 분쇄해 나갔다. 미군정은 조선 총독부로부터 권력을 인수한 후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정하고 자신만이 38선 이남의 유일한 정부이며 최고 통치권자임을 선언했다.

 

 

[사진] 조선 총독부(후 중앙청) 앞 국기 게양대에서 일장기가 내려지고,

그 자리에 성조기가 올라가고 있는 모습

 

이남의 인민들은 미군정과 이승만ㆍ친일(친미) 지주 세력의 반혁명에 맞서 투쟁을 전개한다. 1946년 전평의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 항쟁, 1947년 3월 전평의 2차 총파업, 1948년 2ㆍ7 구국투쟁, 5월 8일의 5ㆍ10 남조선 단선ㆍ단정 반대 총파업, 제주 4ㆍ3 항쟁과 여순 항쟁, 그리고 이남의 거의 모든 산악 지역에서 전개된 게릴라 투쟁 등으로 미군정과 맞섰다.5) 1949년에도 게릴라 투쟁이 지속 강화되고 있었고, 한국(조선) 전쟁 직전인 1950년 4월에도 한 달 동안 교전 횟수 2,948회, 참가 인원 6만5000여 명을 기록했다. 즉, 미군정과 친미파로 변신한 친일 지주 세력, 이승만 세력을 한편으로 하고, 노동자ㆍ농민을 중핵으로 하는 조선 인민들 사이에서 계급 전쟁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계급 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이른바 한국 전쟁으로 전면적인 전쟁으로 폭발한다.6)

 

 

한국(조선) 전쟁의 전개와 휴전 협정

 

한국(조선) 전쟁 과정에서 전선이 이동하는 격전은 전쟁 발발 초기부터 정전 회담이 시작되기 직전인 1951년 5월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그 이후 정전 협정 체결까지의 2년간의 전투에서 양쪽은 초기의 격전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냈고, 무수한 포탄을 썼으며, 개전 초기보다 훨씬 더 많은 병력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정전 협정 체결까지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정전 협정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이렇게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일까?

 

1950년 6월 25일 전면적인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군대를 즉시 투입하고 한강 북쪽에 대한 폭격을 시작했다. 6월 28일 조선인민군이 서울에 입성했고, 7월 14일 대통령 이승만은 미 극동군 사령관이자 유엔군 사령관인 맥아더에게 한국군의 작전권을 양도한다고 통고했다. 7월 20일 조선인민군이 대전과 전주, 순천까지 진출하고, 8월 중순경에는 마산-왜관-포항을 잇는 선까지 압박했다. 개전 직후부터 한국(조선) 전쟁에 투입된 미 공군기와 군함들은 조선인민군이 진출한 남쪽 지역에 무차별적인 폭탄 세례를 퍼부었다. 조선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보급 능력 자체를 말살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던 것이다. 전쟁이 발발하고 3개월 이내에 한(조선)반도 전체가 미군의 폭격으로 크게 황폐해졌다. 9월 15일 유엔군(대부분이 미군)의 인천 상륙 작전이 실시되고, 9월 28일 유엔군은 서울을 점령한다. 이어서 10월 초에는 38선을 넘어 북진하면서 10월 20일 평양을 점령하고 계속 북진했다. 그러자 11월 하순에 중국군이 전면적인 공격에 나섰다. 조선인민군과 중국군의 대공세에 1951년 1월 4일 한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에서 철수ㆍ후퇴했으나, 3월에는 유엔군이 서울을 다시 점령하였고, 3월 하순에는 문산-임진강까지 진출해서, 이후 지금의 휴전선 일대에서 양측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양상이 계속되었다.

 

1951년 6월 23일 쏘련 대표가 유엔에서 휴전 협상을 제안했다. 7월 10일 미국과 조선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휴전 회담 본회의가 개최되었다. 조선은 즉시 정전과 함께 38선으로부터의 양군의 후퇴와 전 외국 군대의 한(조선)반도로부터의 즉시 철수, 모든 포로의 무조건 송환을 제안했다. 이에 반해 미국은 휴전을 위한 군사 경계선을 38선이 아닌 현재 양군의 접촉선으로 하자고 주장하면서 휴전 협정이 조인되기 전까지 계속 전투를 벌이도록 강제했다. 또한 외국 군대의 즉시 철수 문제의 논의도 거부하고 포로 교환도 희망자만 송환시키자고 주장했다.

 

휴전 회담이 아무런 성과 없이 계속 지연되면서 교전이 계속되고 미군의 북쪽 지역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격이 계속되자, 결국 조선은 미국 측의 주장 중에서 현 전선을 군사 분계선으로 하자는 것과 포로 교환에서 희망자만 송환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모든 외국 군대의 한(조선)반도 철수와 한(조선)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의 문제는 정전 협정을 체결하고 난 이후 3개월 이내에 쌍방이 정치 회담을 개최하여 협의할 것을 제안하였다.

 

결국 미국의 의도대로 휴전 협정은 타결되었다. 미국과 조선은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 조인식을 가졌다. 이후 조선 측이 제안했던 정치 회담이 열렸으나 아무런 성과 없이 결렬되었다.

 

 

주한 미군의 한국군에 대한 작전권 장악과 영구 주둔

 

미군은 유엔의 옷을 입고 한국(조선) 전쟁에 개입했다. 한국(조선) 전쟁이 발발하던 당시 쏘련은 대만의 중국 대표권에 대한 거부 표시로 유엔 참석을 보이콧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미국은 동맹국의 지원을 받아 조선을 침략자로 규정짓고, 38선의 원상회복을 권고하는 결의안을 1950년 6월 26일 유엔에서 통과시켰다. 이어서 7월 7일 유엔은 미국의 요청으로 유엔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유엔 회원국의 군대를 미국 정부 아래 둔다는 요지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미 극동군 사령관인 맥아더는 유엔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이와 함께 공군의 98퍼센트 이상, 해군의 83퍼센트 이상, 지상군의 88퍼센트가 미국군으로 구성된 이른바 유엔군이 창설되었다. 유엔군은 위장된 미군에 다름 아니었다.

 

1950년 7월 14일,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한국군의 지휘권을 양도했고 이어서 주한 미군에 대해 치외 법권을 보장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렇게 하여 미국은 한국(조선) 전쟁의 한 당사자로서 최고의 지위와 권한을 갖게 되었고, 한국은 국군 통수권과 사법권 등 핵심적인 주권의 상당 부분을 미국에 넘겨줌으로써 스스로 독립 국가로서의 존립 근거를 포기하고 말았다. 이로써 한국(조선) 전쟁은 초반부터 미국과 조선의 정면 대결이 되었다.

 

한국군에 대한 미군의 작전권 장악, 이는 사실상 한국군이 태동하면서부터 일관되게 유지되어 온 것이다. 그런데 한국(조선) 전쟁을 거치면서 이제 주한 미군 사령관의 허락 없이는 한국군의 사소한 부대 이동도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주한 미군은 한국군에 대한 거의 완벽한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원하는 대로 한국군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게 되었다.

 

주한 미군의 한국군 전면 장악의 또 하나의 증거는 한국군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각종 군수 물자의 공급이 미국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는 점이다. 미국은 1945년부터 1960년에 이르는 16년 동안 약 30억 달러에 이르는 무상 원조를 한국에 쏟아부었는데, 그중 80퍼센트 이상이 한국군의 유지 비용을 조달하기 위한 군사 원조로 구성되어 있었다.

 

1949년 6월 일시적으로 철수했던 주한 미군은 이렇게 한국(조선) 전쟁 때 다시 들어오게 되었고, 결국 영구 주둔하게 되었다. 주한 미군의 영구 주둔을 공식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1953년 10월 1일 한미 양국 간에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제4조는 상호 합의에 의하여 결정된 바에 따라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주변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許與)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라고 되어 있다.7) 이에 따라 미국은 한국 정부와의 아무런 협의 없이도 자유자재로 자국의 병력을 이 땅에 주둔 배치할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8)

 

 

한국(조선) 전쟁의 결과

 

한국(조선) 전쟁은 이남의 혁명 세력의 그 주변부까지의 절멸이었다.9) 전쟁에 직접 참여한 군인들보다 민간인들의 희생이 훨씬 많은 전쟁이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수천 건의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전쟁 발발 직후의 보도연맹 학살, 좌익 수감자들에 대한 학살, 거창 민간인 학살 등의 부역자 색출이라는 이름하에 자행된 학살, 유격대 토벌 과정에서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학살,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 의한 학살, 노근리 사건 등 미군에 의한 학살 등등, 그 학살의 목록은 끝이 없다.10)

 

전쟁은 최악의 계급적 억압을 의미하며 일체의 비판 세력에게 재갈을 물리는 구실이 된다.11) 한국(조선) 전쟁은 스스로 주인인 나라를 건설해 가는 민중들을 탄압하고 죽이면서, 그러나 그런 만큼 파멸을 향해 치닫고 있었던 이승만 정권을 되살렸다. 전쟁을 계기로 급성장한 군사력으로 유격전의 형태를 띠고 있던 한국 민중의 저항을 완벽하게 분쇄한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휴전 회담도 끝까지 반대하며 북진 통일을 주장하는 역할을 맡아 주한 미군의 영구 주둔을 성사시키고 한국 사회를 반공주의 국가로 만들기 시작했다. (다음 호에 계속)  노사과연

 

 

[참고 자료]

브루스 커밍스, ≪한국 전쟁의 기원≫, 김자동 역, 일월서각, 1986.

권정기, “한국노동운동의 역사에 대한 하나의 관점”, ≪정세와 노동≫ 제121호(2016년 3월), 노사과연.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1≫, 돌베개, 2015.

한홍구, ≪대한민국사≫, 한겨레신문사, 2003.

 

 



1) F. 엥엘스, “권위에 관하여”,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4권, 박종철 출판사, p. 278.

 

2) 브루스 커밍스, ≪한국 전쟁의 기원≫, 김자동 역, 일월서각, 1986, pp. 13-14.

 

3) 권정기, “한국노동운동의 역사에 대한 하나의 관점”, ≪정세와 노동≫ 제121호(2016년 3월).

 

4) 심미숙, “[이 달의 역사] 2ㆍ8 독립 선언”, ≪정세와 노동≫ 제148호(2019년 2월).

 

5)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8년 8월 15일 이남에는 미군정과 이승만ㆍ친일(친미) 지주 세력의 국가인 대한민국이 수립되었고, 이북에는 인민위원회의 기초 위에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6) 권정기, 앞의 글.

 

7) SOFA(주한미군지위협정)는 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의 하위 협정이라고 할 수 있다. SOFA의 공식 명칭은 ‘대한민국과 아메리카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 내에서의 미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 및 동 부속문서’이다.

 

8) 싸드 배치가 거침없이 강행되는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9) 권정기, 앞의 글.

 

10) 한홍구, ≪대한민국사≫, 한겨레신문사, 2003.

 

11)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운영위원회, “한(조선)반도 평화체제의 전망과 노동운동의 진로”, ≪정세와 노동≫ 제144호(2018년 6/7월), p.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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