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로자 룩셈부르크의 여성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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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해제: 정호영(회원), 번역: 서의윤(회원)

 

 

[차례]

해제

  – 페미니즘 ≠ 여성 운동

  – 로자 룩셈부르크는 페미니즘을 비판한다

  – 페미니스트들이 로자 룩셈부르크를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다

  – 부르주아 여성 운동과 프롤레타리아 여성 운동은 어떻게 다른가

  – 로자 룩셈부르크의 여성론을 읽자

전술적 질문(1902년)

국제 사회주의 여성 회의에서의 연설(1907년)

여성 참정권과 계급투쟁(1912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여성(1914년)

로자 룩셈부르크 연표

 

 

해제

 

페미니즘 ≠ 여성 운동

페미니즘은 여성 해방론ㆍ여성 운동론ㆍ여성론과 동의어가 아니다. 여성 운동에는 페미니즘/부르주아 여성 운동과 맑스주의 여성 운동/프롤레타리아 여성 운동이 있다. 맑스주의 여성론은 현재 국내에서는 거의 잊혀졌다. 그리고 현재 페미니즘의 분파들인 사회주의 페미니즘ㆍ맑스주의 페미니즘ㆍ유물론 페미니즘이 맑스주의 여성론으로 오해되고 있다.

사회주의 페미니즘ㆍ맑스주의 페미니즘ㆍ유물론 페미니즘은 사회주의, 맑스주의, 유물론이 아니라 페미니즘이라는 것은 맑스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가 여성 문제에 관하여 쓴 글들을 읽게 되면 분명하게 알게 된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비판한 페미니스트들의 암사자 같이 남성들의 특권에 맞선 여성 운동은 분배를 생산방식과 독립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이들 페미니스트들이 아무리 많이 맑스를 거론하더라도 사실상 맑스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또한 이들은 여성 문제가 남ㆍ녀의 생물학적 근거에서 출발한다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가부장제/재생산 개념을 고수하면서, 맑스가 가사 노동도 가치를 창출한다는 것을 무시했다고 맑스주의를 비난한다.

이러한 페미니스트들의 등장은 노동 운동 내에 계급적 입장의 운동이 몰락한 것과 관련이 있다. 계급적 입장의 노동 운동의 쇠퇴로 생산의 재조직화가 아니라 재벌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 같은 분배를 중점에 둔 움직임 등의 몰계급적 입장의 노동 운동이 등장했다.1) 페미니스트들이 사회주의ㆍ맑스주의ㆍ유물론을 이름으로 내걸고 만든 사회주의 페미니즘ㆍ맑스주의 페미니즘ㆍ유물론 페미니즘은 이러한 몰계급적 입장의 노동 운동과 함께 같이 등장하고 같이 성장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페미니즘을 비판한다

대표적인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인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는 맑스는 요리, 세탁, 보육과 사랑 등 … 여성의 무급 노동도 가치를 창출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라고 주장한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맑스주의 경제학에서의 가치, 사용가치의 과학적 구분을 무시하면서 맑스 이론을 왜곡하고 있다. 이런 식의 주장이 설령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름을 내거는 곳에서 나온다고 해도 그것은 맑스주의 여성 혁명가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관계가 없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실비아 페데리치의 주장은 100년 전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의 반복일 뿐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알렉싼드라 꼴론따이, 클라라 체트킨은 부르주아 여성 운동인 페미니즘에 모두 비판적이었고 페미니스트들과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꼴론따이는 명확하게 맑스주의 입장에서 페미니즘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페미니스트들의 요구가 겉보기에 아무리 급진적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의 계급적 입장에서 보아 페미니스트들이 현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인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 싸울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여성의 해방 역시 완결되지 못한다. 어떤 상황에서 모든 계급의 여성들이 갖는 단기적 임무가 일치할지라도, 장기간에 걸쳐서 그 운동의 방향과 사용되는 전술을 결정짓는 최종 목표는 양 진영이 명백하게 다르다. 페미니스트들에게 있어서 현재 자본주의 세계의 틀 안에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 그 자체로 충분히 구체적인 목표인 반면에, 프롤레타리아 여성에게 있어서 현재의 동등한 권리란 단지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착취에 맞선 투쟁이 나아갈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을 주적으로 보며, 남성들이 부당하게 모든 권리와 특혜를 쥐고서 여성들에게는 속박과 임무만 남겨 놓았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들에게 있어서 승리란 이전에 남성들이 독점적으로 누렸던 특권이 공정한 성에게 허용될 때를 말한다.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은 다르다. 그들은 남성을 적이나 억압자로 보지 않으며, 오히려 남성들을 일상의 고역을 나누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함께 싸우는 동지로 생각한다. 여성과 여성의 남성 동지는 똑같은 사회 모순으로 인해 착취되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똑같은 혐오스러운 굴레가 그들의 의지를 억누르고 그들에게서 기쁨과 삶의 매력을 앗아 가는 것이다. 현 체제의 몇몇 특정한 면들이 여성에게 과중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고용 노동의 조건들이 때로 여성 노동자들을 남성들의 경쟁자나 적대자로 만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듯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노동자계급은 잘 알고 있다.2) (강조는 인용자.)

 

로자 룩셈부르크, 알렉싼드라 꼴론따이, 클라라 체트킨 중 부르주아 여성 운동의 행보와 그 이론에 대해서 가장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이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맑스주의자라면 그 누구도 가사 노동의 사용가치에 대해 무시하지 않는다. 맑스주의자들은 단지 여성의 무급 가사 노동이 가치를 만든다라고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을 가리켜 그들은 사회주의자, 맑스주의자, 유물론자가 아닌 페미니스트인 것이라고 말할 뿐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가사 노동의 사용가치에 대해 분명하게 많은 희생과 노력이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그러나/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는 가사 노동도 가치를 창조한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에 대해서 이미 100년 전에 아래와 같이 일갈하였다.

 

이 여성들은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사회를 위해 생산을 한다. 이 말은 아이를 기른다거나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남성들을 돕는 집안일을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런 일들은 현대 자본주의 경제적인 의미에서는 생산적이지 않다. 많은 희생과 힘이 들어가는, 작은 노력들 천 개가 더해지는 큰 성취가 얼마나 있더라도 그렇다. 그런 것은 그 노동자의 사적인 일, 그의 행복과 축복 등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현대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일이다. 자본주의와 임금 체제가 지배하는 한, 자본주의 이익을 낳는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그런 종류의 일만이 생산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뮤직홀 댄서가 그 다리로 고용주의 주머니를 채워 주는 것이 생산적인 일이며, 프롤레타리아 여성들과 어머니들이 집 안에서 하는 그 모든 힘든 일들은 비생산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잔인하고 미친 것처럼 들리지만 그만큼 현재 우리의 자본주의 경제가 보여 주는 잔인함과 미친 짓에 정확하게 대응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잔인한 현실을 분명하고 명료하게 바라보는 것이 프롤레타리아 여성의 첫 임무이다. (여성 참정권과 계급투쟁.) (강조는 인용자.)

 

페미니스트들이 로자 룩셈부르크를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즘ㆍ맑스주의 페미니즘ㆍ유물론 페미니즘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조작하기 위해서 로자 룩셈부르크, 알렉싼드라 꼴론따이, 클라라 체트킨을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고 자신들의 글들에 이들의 사진을 넣는다고 해도 그러한 페미니즘이 맑스주의 여성론과 같을 수는 없다.

사회주의 페미니즘ㆍ맑스주의 페미니즘ㆍ유물론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중 소수 분파로서 신좌파의 부상과 더불어 서구의 강단에서 나온 이론으로 국내에도 80년대 초부터 소개되었다.3) 당시에도 사회주의 페미니즘(Socialist Feminism)과 맑스주의 페미니즘(Marxist Feminism)을 사회주의 여성 해방론과 맑스주의 여성 해방론으로 번역하여 맑스주의 여성론과 혼동을 초래했다. 이런 혼동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가부장제를 내세우는 이런 페미니즘 이론들은 이중체계론으로 번역해야 된다는 아래와 같은 주장도 있었다.

 

Socialist Feminism을 우리말로 직역하면 사회주의적 여권주의가 되나 수많은 오해의 여지가 있으므로 이중체계론으로 번역하기로 한다. 그것은 오해의 여지뿐 아니라 여러 선진국들의 여러 이론적 분파 중 하나의 분파에 불과한 것이 마치 계급적 (계급 운동) 성격을 명확히 띤 것처럼 잘못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Socialist Feminism는 논리상 이중체계론으로 구성되어 있는 하나의 이론적 조류에 불과하며 세계사적 보편성은 결여되어 있다.

이 이중체계론은 첫째는 개념적으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분리 사용하여 여성 노동력 착취의 가부장제전체 노동력 착취의 자본주의로 규정하나, 두 체계의 분리에 사실상 실패하여 우선 이론상으로조차도 자가당착적 논리에 빠져 버렸다. 두 번째는 소련 사회에 남아 있는 여성불평등의 문제를 물적 조건의 관점에서 파악하여, 가부장제는 하부토대를 지닌 것이라면서 새로운 여성 억압의 물적 조건을 찾으려고 온갖 정열을 기울이고 있다. 이는 모든 혁명이 기계적으로 물적 토대에 조응하고 사회는 그에 따라 자동으로 변한다는 속류 유물론의 전형으로서 반레닌주의적 반혁명적 경향을 보여 주고 있다. 세 번째는 대부분 진보적이기는 하나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 여성들이 그 계급적 한계 내에서 여성 문제를 관념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여성 문제에 계급 문제를 사상시킴으로써 여성 운동에서의 여성 노동자 주체성을 상실하였다. (백산, ≪사회과학개론≫의 이승희 씨 논문 참조.)4)

 

국내에서도 80년대에 맑스주의 여성론5)을 받아들였고, 페미니즘 이론인 사회주의 페미니즘ㆍ맑스주의 페미니즘ㆍ유물론 페미니즘에 대한 맑스주의 입장의 비판도 소개되었다.6) 1987년에는 국내에서도 사회주의 페미니즘ㆍ맑스주의 페미니즘ㆍ유물론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연구 성과들도 내었다.7) 사회주의 국가의 여성들에 대한 소개도 이어졌다.8) 현재 한국의 여성 운동은 페미니즘만 있고 프롤레타리아 여성 운동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의 여성 운동은 페미니즘만 있고 맑스주의 여성 운동이 전무하다시피 하다. 반갑게도 맑스주의 여성론 책이 ≪페미니즘인가 여성 해방인가―사회주의에서 답을 찾다≫라는 선명한 제목을 달고 곧 출간된다고 한다. 맑스주의 여성론의 고전 읽기와 더불어 이런 움직임들을 지지하고 부각시켜야 할 것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ㆍ맑스주의 페미니스트ㆍ유물론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스트들이지 맑스주의자들이 아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페미니스트ㆍ맑스주의 페미니스트ㆍ유물론 페미니스트는 자신들이 판매할 담론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 맑스를 극복한 페미니즘, 페미니스트의 맑스 읽기 같은 관용구를 쓰면서 로자 룩셈부르크 등의 맑스주의 여성 혁명가들의 이미지들을 계속 차용해 갈 것이다.

우리는 헌법상 공화국에서 살고 있다. 페미니스트들에게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내세우는 페미니즘 이론을 만들 자유가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름을 내세우면서 여성의 무급 가사 노동이 가치를 만든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고,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의 축적≫에 나오는 식민지여성, 최후의 식민지라는 문학적 표현과 동일한 의미로 읽고서 로자 룩셈부르크를 페미니스트로 만드는 시도를 할 수도 있다. 페미니스트들이 그렇게 로자 룩셈부르크를 페미니스트로 만드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다.

 

부르주아 여성 운동과 프롤레타리아 여성 운동은 어떻게 다른가

맑스주의 여성론은 현재 국내에서는 거의 잊혀졌다. 로자 룩셈부르크, 알렉싼드라 꼴론따이, 클라라 체트킨, 아우구스트 베벨 등의 맑스주의 여성론의 고전 읽기를 하면서 맑스주의 여성론에 대한 이론적 기억들을 찾아야 한다. 클라라 체트킨은 부르주아 여성 운동을 인정하면서도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으며, 당시 있었던 과격한 무정부주의 여성 운동에도 동조하지 말 것도 분명하게 당부하였다.

 

분명히 부르주아 여성들이 내딛는 독립을 향한 모든 발걸음은 진보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에 대한 인정이, 정치적으로 성숙한 프롤레타리아 여성 운동이 불확실하고 서투르고 암중모색하는 부르주아 여성 참정권자(Bourgeois suffragette)들의 행진에 참여하거나 그들을 과대평가하는 것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 우리들에게 반동 세력이 일시적인 분노를 퍼붓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무정부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의 금기가 되어야 한다.9)

 

클라라 체트킨이 위와 같이 말했던 시대는 여성이 지금보다 더 억압받는, 여성 참정권조차 없던 시대였다. 그러나 클라라 체트킨은 건물을 방화하던 수준으로 갔던 무정부주의적 부르주아 여성 운동을 여성이 오랫동안 억압받아 왔기에 일어날 수 있는 오류이니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다.10) 1890년까지 사회민주주의 내부에서 페미니즘에 대해 다소간 자제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지만 체트킨과 그녀의 동료들은 자신들의 진영을 향해 단호하게 숙녀들의 운동과 선을 그을 것을 요구했다.11) 페미니즘에 동조하여 또 여성 억압 사회를 바꾸려면 저항하는 서프라제트들과 함께하자, 그래, 우리는 서프라제트이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여성 맑스주의자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여성 참정권 운동은 페미니즘 진영과 프롤레타리아 진영으로 나누어졌었다.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온건파 서프라지스트(suffragist)와 강경파 서프라제트(suffragette)가 있었다. 서프라제트는 상점 유리창 깨기, 국립 미술관 작품 훼손, 전철이나 정치인의 집, 큰 건물 방화 등을 하면서 페미니즘 운동을 주도했다. 프롤레타리아 여성 운동이 받고 있는 탄압이나 주장하고 있는 요구 사항들은 페미니즘과는 분명하게 달랐다. 여성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부르주아 여성들이 참정권을 요구하는 페미니즘 운동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여성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살인적 장시간 노동, 현실 지옥인 노동 환경의 일상적 산업 재해 속에서 더 이상 죽지 않고 살기 위한 생존권 투쟁이었으며, 여성에게는 법으로 금지된 노동조합 활동, 집회 참가 활동을 하면서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프롤레타리아 여성이 수감되면 같은 죄목이라도 부르주아 여성들보다 더 혹독하게 처벌되었다.

페미니스트인 팽크허스트(Emmeline Pankhurst)와 서프라제트는 사회에서 받는 대우가 프롤레타리아 여성 운동과 달랐다. 그들은 수감되었다가 석방되고 나서 런던 사보이 호텔에서 만찬회를 가졌다.12) 팽크허스트가 감옥에서 단식을 할 때 자유당 국회의원은 그녀의 편지를 받고 사보이 호텔의 침대를 보내 주기까지 했다.13) 팽크허스트의 여성사회정치연맹(WSPU, 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은 노동 운동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 갔고 전쟁이 나자 전쟁에 여성들을 동원했다.14)

 

프롤레타리아 여성 운동은 페미니스트 운동과는 달리 반전 운동에 나섰다. 꼴론따이의 소설 ≪붉은 사랑≫은 러시아 혁명 후 과거 반전 활동에 대한 추억으로 이야기를 연다.

 

그녀는 공산주의자였다. 전쟁 초기부터 볼쉐비끼가 되었고, 처음부터 전쟁을 혐오했다.

전선을 위한 모금이 현장에서 진행되고 있었고, 사람들은 기꺼이 러시아의 승리를 위해 초과근무를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실리사는 거부했다. 전쟁은 피가 흥건한 공포일 뿐이다. 무엇 좋은 것이 있단 말인가? 전쟁은 사람들에게 고통만 주었다. 그리고 당신들은 군인들, 도살자에게 끌려가는 양 같은 젊은이들을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정연한 군사 대형으로 파견 가는 그들을 거리에서 보았을 때, 바실리사는 언제나 외면했다. 그들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음에도 목청이 터지도록 노래를 부르며 소리를 질렀다. 마치 휴가라도 가듯이, 그들은 에너지 넘치게 노래했다.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나? 그들은 거부해야 했다.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맞이하러 가지 않겠다. 우리는 다른 이를 죽이지 않겠다! 그랬다면 전쟁은 없었을 것이다.15)

 

계급이 다른 만큼 프롤레타리아 여성 운동과 부르주아 여성 운동은 같은 여성 운동이 될 수가 없다.

꼴론따이만이 아니라 로자 룩셈부르크, 클라라 체트킨 또한 1차 대전, 2차 대전 모두 전쟁 반대 운동을 했었다.16) 로자 룩셈부르크를 개머리판으로 죽였던 자들이 바로 애국을 외치며 남녀 노동자들을 전쟁에 밀어 넣던 자들이었다. 기반을 두고 있는 계급이 다르기에 프롤레타리아 여성 운동은 페미니즘과 다르다. 팽크허스트의 구호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는 참정권을 얻기 위해 했던 서프라제트의 무정부주의적 활동만이 아니라 여성들이 공장에 나가 일해서 전쟁 지원에 적극 가담할 것을 독려했다. 당국은 무정부주의적 활동으로 감옥에 간 서프라제트들을 모두 석방시켜 주었고, 1918년 전쟁이 끝나자 자산을 가진 30세 이상의 부르주아 여성들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법을 통과시켰다.17) 팽크허스트의 자서전은 여성들을 전쟁에 동원한 것에 대한 뿌듯함으로 시작한다.18) 러시아에서도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참정권을 곧 획득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전쟁 지원을 호소하였다. 전쟁 반대 운동을 했던 볼쉐비끼가 러시아 혁명 후 가장 먼저 한 것은 급진적인 여성 해방 법령을 통과시킨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여성 운동은 1917년 여성들 모두에게 투표권을 보장하는 성과를 달성하였다. 고용평등과 동일임금, 유급 출산휴가, 작업장에서 모유 수유 허용, 3시간마다 휴식 보장, 이혼 간소화, 낙태 합법화, 간통ㆍ근친상간ㆍ동성애 처벌 폐지 관련 법안도 제도화해 나갔다.19) 1987년에 한국에 프롤레타리아 여성 운동이 있었을 때에는 분명하게 프롤레타리아 여성 운동과 페미니즘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여기서 유의해 볼 것은 전자의 여성들이 전 여성의 이름, 생물학적 모든 여성의 이름을 내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은 부르주아 여성과 소수의 직업여성 등 특권적 여성의 평등만을 주장하였을 뿐이고, 후자의 여성들은 프롤레타리아 이름을 내걸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 여성만이 아닌 대다수 여성의 해방적 전제 조건을 내걸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여성 운동은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그 계급적 성격이 얼마만큼의 보편성을 가지느냐에 따라 운동의 보편성 또한 가지게 됨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계급적 성격에 따라 이데올로기, 억압의 기원과 해방의 조건 등을 보는 시각이 달라짐을 알 수 있다.20)

 

계급이 다른 만큼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참정권 운동도 부르주아 여성들의 참정권 운동과 달랐다. 페미니즘은 부르주아 여성에게만 참정권을 줄 것을 요구했지만, 프롤레타리아 여성 운동은 모든 남녀, 즉 프롤레타리아 남성과 여성 모두를 포함하는 보편적인 참정권을 요구했다. 자본주의에서 산재는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 산재는 남녀 노동자 모두 자본에게 착취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정도만 알아도 프롤레타리아 여성 운동이 페미니스트와 다르게 보편적인 참정권 요구를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2019년 2월 12일 MBC <100분 토론>에 출연한 페미니스트 최태섭은 고 김용균 씨의 사고를 언급하며 남자니까 안전장치 같은 것은 안 해도 된다는 식의 말을 나이 많은 남성들이 한다. 여성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냐?는 발언을 하며, 산재의 원인을 이윤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생산방식에 두는 것이 아니라 남성성에 두었다. 페미니즘의 가부장제/재생산 이론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결론이다. 그가 ≪한국, 남자≫란 책에서 한국 남자들에 대한 타당한 비판을 일부 수행한 것에서 페미니즘의 일부 순기능을 보여 주었다고 하더라도, <100분 토론>에서의 그의 발언은 페미니즘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를 보여 주었다. 프롤레타리아 여성 운동은 꼴론따이의 말대로 남성들을 일상의 고역을 나누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함께 싸우는 동지로서 함께 투쟁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여성 운동이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하거나 페미니즘 운동을 과대평가하지 않더라도 페미니스트들과 충돌할 필요는 없다. 클라라 체트킨이 분명히 부르주아 여성들이 내딛는 독립을 향한 모든 발걸음은 진보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전제를 먼저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21) 프롤레타리아 여성 운동은 페미니스트 운동을 전부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페미니스트 운동의 한계를 넘어서라고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클라라 체트킨은 여성 프롤레타리아들에게 페미니즘 운동에 동조하지 말고 다음과 같은 지도 이념을 분명하게 가질 것을 요구하였다.

 

우리의 지도 이념은 반드시 다음과 같아야 한다. 즉, 우리는 여성에 대한 특수한 선전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에게 사회주의 선전을 한다는 것이다. 여성 세계에 대한 사소한 급진적 이해는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우리의 임무는 우리의 계급투쟁에 있어서 현대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을 일치단결시키는 것이다.22)

 

프롤레타리아 여성 운동에게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페미니스트로 만드는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비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계급적 관점의 노동 운동이 부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벌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 등의 다시 뒤로 돌아가는 운동, 즉 분배를 생산과는 별개로 보는 몰계급적 운동이 있는 한, 사회주의 페미니즘ㆍ맑스주의 페미니즘ㆍ유물론 페미니즘은 그러한 몰계급적 운동과 함께 지속될 것이다. 이러한 몰계급적 운동들에 대해서는 그것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인 맑스의 고타강령 초안 비판을 다시 꺼내서 읽어 보자.

 

이제까지 개진한 것은 별도로 하더라도, 이른바 분배를 가지고 야단법석을 떨고 거기에 중점을 두는 것은 도대체 잘못된 것이다.

소비 수단의 그때그때의 분배는 생산조건 자체의 분배의 귀결일 뿐이다; 그런데 생산조건의 분배는 생산방식 자체의 특성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물적 생산조건들은 자본 소유와 토지 소유의 형태로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배분되는 반면에 대중은 인적 생산조건인 노동력의 소유자일 뿐이라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생산의 요소들이 이렇게 분배되면, 오늘날과 같은 소비 수단의 분배가 저절로 생겨난다. 물적 생산조건들이 노동자들 자신의 조합적 소유가 되면, 오늘날과는 다른 소비 수단의 분배가 생겨난다. 속류 사회주의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를 본받아 (그리고 이를 다시 본받아 일부 민주주의자들은) 분배를 생산방식과는 독립된 것으로 간주하고 또 그렇게 다루고 있으며, 따라서 사회주의는 주로 분배를 중심 문제로 하고 있다는 듯이 서술하고 있다. 진정한 관계가 이미 오래전에 해명되었는데, 무엇 때문에 다시 뒤로 돌아간다는 말인가?23)

 

맑스가 이와 같이 강조하듯이 다시 뒤로 돌아가는 몰계급적 노동 운동이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페미니스트 운동의 한계를 넘어서는 프롤레타리아 여성 운동이 시작되려면 무엇보다도 계급적 관점의 노동 운동이 자리를 찾아야 한다. 계급적 관점의 노동 운동이 성장을 하면서 프롤레타리아 여성 운동은 굳이 이론적 논쟁을 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페미니즘 진영인 사회주의 페미니즘ㆍ맑스주의 페미니즘ㆍ유물론 페미니즘과 차별성을 드러낼 것이다. 계급적 노동 운동이 성장하는 만큼, 몰계급적 운동과 그에 동반되는 사회주의 페미니즘ㆍ맑스주의 페미니즘ㆍ유물론 페미니즘은 퇴조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 페미니즘ㆍ맑스주의 페미니즘ㆍ유물론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보다는 계급적 운동의 복원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여성론을 읽자

룩셈부르크는 평생을 노동계급 여성 해방 운동에 투신했지만 그 스스로가 글로 쓴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도자이자 ≪평등≫지의 편집장이었던 클라라 체트킨을 뒤에서 지원하는 방식으로 노동계급 여성 해방 운동에 참가했다. 그렇지만 로자 룩셈부르크 사후 클라라 체트킨은 룩셈부르크의 흩어져 있던 모든 글을 모을 것을 제안했고, 그 덕분에 우리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쓴 맑스주의 여성론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혹자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혁명 운동에 치중하여 여성 운동을 경시했다고 주장을 하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1908년까지 독일에서 여성의 정당 가입이나 집회 참석, 노조 가입은 불법이었다. 1893년에 폴란드 사회민주당을 창설하는 데 참가한 여성인 로자 룩셈부르크로서는 자신의 활동 문제 때문이라도 여성의 참정권 획득이 중심이었던 여성 운동을 결코 경시할 수는 없었다. 여성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의 글을 읽기 전 당시 글들이 나온 배경을 잠깐 살펴본 후 본문을 읽도록 하자.

전술적 질문 ― 1902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개혁주의자들이 주도하던 벨기에 사회민주당이 자유주의자들의 여성 참정권 요구를 거부한 것에 대해 비판했다. 이 논설에서 여성 참정권은 사회 전체를 흔드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지도자부터 평당원까지 만연해 있는 숨 막히는 성차별주의도 흔들 것이라고 썼다. (출처: ≪라이프치히 인민신문(Leipziger Volkszeitung )≫, April 4, 1902.)

국제 사회주의 여성 회의에서의 연설 ― 1907년 행한 연설로 국제 사회주의 사무국이 있는 브뤼셀로 옮기면 그 독립적 존재를 상실할 수 있기에 슈투트가르트에 본부를 계속 둘 것을 주장하였다. (출처: ≪전진(Vorwärts )≫, August 18, 1907.)

여성 참정권과 계급투쟁 ― 1912년 연설로 프롤레타리아 여성 운동이 부르주아 여성 운동이 주도하는 독일 중산층 협회들로부터 계속 독립적으로 활동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출처: 1912년 5월 12일,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개최된 제2차 사회민주주의 여성 대회에서(at the Second Social Democratic Womens Rally(May 12, 1912), Stuttgart, Germany.))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여성 ― 국제 여성의 날을 위해 쓴 1914년 논설로 여성의 억압과 저항에 대해 감동적인 사회역사적인 스케치를 제공한다. 산업화된 나라들만이 아니라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에조차, 여성들이 식민주의자들과 자본주의 야만에 저항하고 있다는 것으로 강조한다. (출처: ≪사회민주주의 통신(Sozialdemokratische Korrespondenz )≫, March 5, 1914.)

 

 

전술적 질문(1902년)

 

몇 년 전 우리 내부에서 부르주아 정당들과의 동맹 문제가 특히 활발하게 토의되던 때, 정치적 동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벨기에의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의 사례를 조심스럽게 지적했다. 벨기에 노동자당은 보통 선거권 획득을 위한 오랜 투쟁 중에 자유당과 연정을 맺었고 이는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결합이 때로는 필요하며 정치적으로 무해하다는 사례가 됐어야 했다.

그러나 그 증거는 이미 무너진 상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노동계급을 지지하리라는 주장에 한 점 의심을 품지 않고 끌려 들어가는 자들은 벨기에 자유당이 무장한 프롤레타리아 동지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의심을 보이고 반복적으로 배신을 하려 했다는 것을 모르는 자들뿐이다. 오늘날 가장 최근에 열린 벨기에 사회민주주의 정당 회의(Party Conference of the Belgian Social Democracy)24)의 결의안은 우리는 이 문제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새롭고도 아주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알다시피 벨기에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15년간 최대한의 끈기를 가지고 싸워왔던 보통 선거권 투쟁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고 있다. 이들은 성직자 지도부와 복수 선거제25)에 맞서는 새로운 공격을 준비하는 중이다. 자유주의 부르주아 계급은 결의에 차 있는 노동계급의 압박에 지친 나머지 기력을 모아 사민당에 도움을 제공하며 합동 캠페인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의 동맹에서는 직접 물물 교환마냥 중재안이 제시되고 있다. 자유당은 복수 선거제를 없애고, 보편적이며 평등한 선거권(1인 1참정권)을 받아들이고, 그 대가로 사민당은 헌법적으로 유효한 투표 방식으로서 비례 선거제를 받아들여야 하며 여성의 참정권에 대한 요구와 참정권 투쟁에서의 혁명적 방법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브뤼셀 노동자당 연맹(The Brussels Federation of the Workers Party)은 이미 주요 지점들에서 자유당이 제시한 약관을 받아들인 상태다. 벨기에 사민당은 부활절 회의에서 이를 승인했고 그에 따라 이 정치 거래는 완료되었다.

그러므로 사민당이 추진한 이 동맹,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자유당과의 타협은 분명하고도 논쟁의 여지없이 자신들의 기본 신조 하나를 버린 셈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벨기에 동지들이 확언한 바에 따르면, 남성들을 위한 보통 선거권을 획득한 후에 다시 싸움을 시작하기 위해서 당분간만 여성 참정권 요구를 미뤄둔 것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강령이 메뉴판 같은 것이어서 각 요리가 차례로 하나씩만 먹을 수 있는 것이라는 이 개념은 모든 국가들의 사회민주주의 세력에게는 지금까지 없던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당이 특정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강령 내의 특정한 요구안을 선동하는 데 보다 더 무게를 둘 수는 있지만, 그 요구안들 전체는 계속해서 우리의 정치적 투쟁의 영속적 기반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강령 내의 어떤 요구안에 대해 일시적으로 주안점을 덜 두는 것과 그것을 비록 일시적일지언정 다른 것들을 위해 그 요구안을 노골적으로 희생하는 것 사이에는, 사회민주주의의 원칙적인 투쟁을 부르주아 정당들의 정치적 조작과 구분 지어 주는 것만큼의 상당한 거리가 놓여 있는 것이다.

벨기에의 여성 참정권의 경우, 우리는 그 요구안을 일시적으로 미루는 것이 아니라 희생시키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사실 브뤼셀 대회가 승인한 결의안은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말하고 있다. 다음의 헌법 소원은 남성들의 보통 선거권으로 제한될 것이다. 하지만 성직자들은 헌법 소원 중에 여성의 참정권을 위한 정식 청원을 내어서 자유당과 사민당 사이에 분쟁의 씨앗을 만들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우, 브뤼셀 결의안은 노동자당이 이 책략을 저지하고 보통 선거권 지지자 동맹을 지켜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풀어 말하자면, 여성의 참정권을 포기하는 쪽에 표를 던져야 한다는 말이다!

원칙만을 내세우는 것은 실로 불쾌한 일이며, 우리는 어떤 노동자당에게도 추상적인 강령 도식을 위해 당장의 실질적 성취를 포기하라고 요구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지금은 실제적이고 실질적인 성과가 아닌 단순한 허상을 위해 원칙이 희생되고 있는 것이다. 항상 그랬듯이 이 사례를 면밀히 살펴보면 정치적인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우리의 실질적인 성공에 장애가 된다는 것은 그저 환상일 뿐임을 알 수 있다.

진실로! 벨기에 사민당이 여성 참정권에 대한 요구를 고수하려 했다면 자유당과의 연정이 깨지게 되고 그 결과 캠페인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노동자당이 자유당과의 연정과 그 조건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는 자유당의 세 번째 조건인 혁명적 방법들에 대한 포기를 조용히 묵인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벨기에 사민당이 투쟁의 방법에 있어서 양손이 묶이는 것을 허용할 리는 분명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의 확고한 보장이라고 할 수 있는 투쟁의 고유한 힘이란 늙어 빠진 자유주의 시장들과 의원들을 지지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대중들의 전투 준비에서 나온다는 것, 즉 의회가 아니라 거리에서 나온다는 한 가지 확고한 사실로부터 그들이 등을 돌린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한 점 의심을 품는 것도 이상한 일인 이유는, 벨기에 노동자당이 앞서 승리했다고 할 수 있는 복수 선거제에 대한 부분적 제지의 원인이 바로 노동계급이 일으킨 대규모 파업과 거리 시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과 다름없이 벨기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대담하게 일으키는 첫 소요는 자유주의 부르주아 계급의 머리 위에서 우레와 같이 폭발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그 사회민주주의의 동맹자들은 의회적인 배신이라는 쥐구멍으로 재빨리 물러나서 노동자들에게 보통 선거권을 안겨 줄 것이다. 이렇듯 매력적인 전망조차도 벨기에 노동자당에게는 그저 이해 불가일 뿐이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사민당이 자유당과 이 은밀한 협정에서 세 번째 조건을 조용히 밀어내고 모든 가능성에 문을 열어 놓는다면, 그때서야 진정한 자유주의의 지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즉 공통의 길을 놓기 위한 조건적이고 일시적인 연정을 받아들이되, 이를 지금껏 해 오던 연장선에서 하며 그 진로에서 단 한발도 벗어나지 않는 그런 것 말이다.

이는 지금 여성들의 권리를 희생하여 얻고자 하는 소위 실질적인 성과조차 그저 허상일 뿐임을 논리적으로 보여 준다. 그래서 외국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타협을 위한 어리석은 사업이 대두될 때마다 우리가 기본 원칙을 포기하게 되면, 그 결과는 상상했던 바와 같은 실질적인 성취가 아니라 오히려 강령 요구안들을 희생시키는 결과가 될 것이다. 마음속은 원칙적으로 헤카베26)인 우리의 현실적인 정치인들에게 있어서 그 요구안들은 그저 너무 자주 제시되고 외쳐지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떤 실질적인 의미도 갖지 못하는, 이미 폐기된 형식상의 쓰레기일 뿐이다.

벨기에 사민당은 계속적으로 널리 여성의 투표권을 인정해 왔을 뿐 아니라, 의회 내의 노동자계급의 대표들 역시 1895년 만장일치 표를 던진 바 있다. 실로 지금까지 이 요구는 벨기에나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 실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었다. 오늘날, 여성의 참정권은 처음으로 정치적 의제의 안건이 될 위협을 보이고 있는데 이제 갑자기 노동자당 내에서 이 오래된 강령 요구안에 대한 단 하나의 의견도 우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더욱 대단하게도, 브뤼셀 연맹에서 드위니(Dewinne)27)가 말했던 바와 같이 당 전체가 여성 참정권 문제에 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 놀라운 드라마에서는 벨기에의 사민당이 여성 참정권에 반대하는 정당화의 근거를 볼 수 있다. 이것들은 러시아 제정이 사용했던 바로 그 주장이고, 정치적 불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독일이 사용했던 신성한 권리라는 교조와 똑같은 주장인 것이다. 대중은 투표권을 행사할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다. 마치 대중들에게 직접 이 권리를 행사하는 것 외의 다른 정치적 성숙도가 필요하다는 듯이 말이다! 마치 남성 노동계급 또한 점차적으로 투표를 무기로 삼아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지키는 법을 배우지 못했으며 이를 배워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이와는 반대로, 명료한 사고를 가진 모든 개인들은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 조만간에 정치적 삶에 참여함으로써 노동 운동이 강력하게 상승할 것이라고 기대해야 한다. 이러한 전망은 사민당의 선동 작업에 거대한 새 장을 열어 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여성이 정치적으로 해방된다면 강하고 새로운 정치적, 사회적 바람이 불어와서, 심지어 우리 당원들과 노동자들, 그리고 지도자들에게 매한가지로 영향을 주고 있는 현재의 속물 같은 가족생활이란 숨 막히는 공기를 청량하게 해 줄 것이다.

분명 처음에는 벨기에의 여성 참정권 결과와 같이 성직자 권위를 강화시키는 등의 바람직하지 않은 정치적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노동자당의 조직 전체와 선동 역시 철저하게 개조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여성의 정치적 평등은 담대하고도 거대한 정치적 실험인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밀랑(Millerand)28) 방식의 실험들에 최고의 찬사를 보내며 그 담대함을 높게 평가하는 모든 사람들이 여성 참정권 앞에서 움츠러든 벨기에 동지들에게 한마디 힐책조차 하고 있지 않다. 실로 밀랑 동지담대한 행정적 실험을 축하하기 바빴던 벨기에 지도자 안슬리(Anseele)29)조차도 자국 여성의 선거권을 얻기 위한 모든 노력에 대해 단호히 반대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의 현실적인 정치인들이 때때로 권유하는 그 담대함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명백히 볼 수 있다. 분명 그것은 사회민주주의 원칙들을 버리고서 얻어지는 기회주의적 실험들을 하기 위한 담대함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강령의 요구안들을 담대하게 이행하는 일일 때는 그 동일한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담대함을 내세울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그 논의되고 있는 강령의 요구안을 안타깝게도 당분간 포기해야 하는 구실을 열심히 찾는 것이다.

 

 

국제 사회주의 여성 회의에서의 연설(1907년)

 

국제 여성 운동이 브뤼셀에 있는 국제 사회주의 사무국(International Socialist Bureau)30)과 제휴하고자 하는 바람이 있어 왔습니다. 내가 이 사무국의 일원이고 사무국 내에서 더 공평한 성을 위한 유일한 일원이기 때문에 (환호) 나는 그에 대해 몇 가지 얘기하고자 합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에 대해 그러한 높은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은 멀리서 국제 사회주의 사무국의 영향력을 느껴 왔던 동지들뿐일 겁니다. (환호) 우리는 이제 온전히 기계적인 방식으로는 국제 사회주의 노동자 운동의 핵심을 이뤄 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맑스 자신이 국제주의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실질적인 핵심이었던 그 국제주의 시대는 갔습니다. 오늘날에는 몇몇 나라들의 대표들이 브뤼셀에서 정기적으로 모이고 있을 뿐이며, 그마저도 그들에게는 언제나 그다지 기쁘지 않은 의무입니다. 매번 우리는 사무국의 실제 업무의 백분의 일도 제대로 이루고 있지 못하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의 선의에 관한 것도, 현재 서기장의 불충분한 기술에 대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 불만은 거듭해서 국제 사무국이 산하의 국가 정당들에 의해 철저히 무시되고 있음을 부각시킵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운동들에 대한 짧은 보고서 하나 올라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운이 좋아서 산하 국가들 안에서 충분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도덕적 권위의 중심이 될 때라야 사회주의 운동을 위한 보다 실현 가능하고 보다 능동적인 중심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독일 여성 동지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 운 좋은 지위를 갖는 것은 바로 여러분이 될 것입니다. 나는 또 다른 비밀을 털어놓고자 합니다. (환호) 고통스럽게도 암스테르담31)에서 사 년간 브뤼셀 국제 사무국의 활동에 실망을 하고 나자, 국제 사무국을 첫째로는 독일로, 둘째로는 슈투트가르트(Stuttgart)로, 셋째로는 ≪평등(Gleichheit)≫32)의 편집국으로 옮겨야만 우리가 진정한 국제 사무국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뚜렷해졌습니다. 하지만 당 집행부는 국제 사무국을 독일로 옮긴다는 방안을 그 중요성만큼이나 간단하게 손짓 한 번으로 미뤄 버렸으며, 그래서 우리는 이 방안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이 국제주의의 도덕적 중심을 다시 살아나게 할 것이며, 나는 클라라 체트킨 동지 또한 이 짐을 함께 떠맡을 것이라는 사실에 감탄할 뿐입니다. 독일에 있는 국제 사회주의 여성 사무국을 브뤼셀로 옮기고자 하는 바람은 상황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것일 뿐입니다.33) 그 방안을 포기한다고 해서 뭔가를 잃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정말 좋았을 텐데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럴 필요는 없었습니다.34) (큰 환호와 박수.)

 

 

여성 참정권과 계급투쟁(1912년)

 

왜 독일에는 노동자 여성을 위한 조직이 없습니까? 왜 우리는 노동자 여성 운동에 관해 그렇게도 듣는 바가 없을까요? 독일 프롤레타리아 여성 운동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엠마 이러(Emma Ihrer)35)는 이러한 질문을 품고서 1898년 계급투쟁에서의 노동자 여성이라는 에세이를 발표했다.36) 그 이후 십사 년 만에 프롤레타리아 여성 운동은 엄청난 팽창을 보여 왔다. 15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조직되어 조합을 만들었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경제적 투쟁에서 가장 적극적인 군대가 되었다. 정치적으로 조직된 수천 명의 여성들이 사회민주주의 깃발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사민당 여성지인 ≪평등(Die Gleichheit )≫[클라라 체트킨 편집]은 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가지고 있으며, 여성 참정권은 사회민주주의의 강령에서 필수적인 사안이 되었다.

바로 이런 사실들로 인해 여성 참정권 투쟁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게 될 수 있다. 여러분은 여성들이 동등한 정치적 권리가 없는 데도 여성들을 교육하고 조직하는 데서 이렇게나 큰 진전을 이루지 않았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여성 참정권은 시급한 필요성이 없다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속은 것이다. 지난 십오 년간 여성 프롤레타리아 계급 대중들의 정치적이고 생디칼적인37) 각성은 엄청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노동자 여성들이 권리를 가지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노동자계급의 정치적이고 정당적인 투쟁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은 간접적으로나마 참여하던 남성 참정권 운동에 의해 뒤로 밀려나 있었다. 노동자계급의 거대한 남녀 대중은 이미 선거 캠페인을 자신의 대의로 간주한다. 여성들은 모든 사민당 선거 회의에서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며 때로는 다수를 차지하기도 하고 언제나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며 열정적으로 참여한다. 사민당 조직이 확고한 지역마다 여성들이 캠페인을 돕는다. 리플렛을 배포하고 캠페인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인 사민당 출판물의 구독자를 모으는 귀중한 일을 해 온 이들도 여성들이다.

자본주의 국가도 여성들이 이 모든 정치적 삶의 의무와 노력을 행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국가는 점차적으로 여성들에게 조직과 집회의 권리를 허락함으로써 그러한 가능성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권리만이 여성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투표권으로 입법부와 행정부에서 민중의 대변인을 직접 선택할 권리, 입법부와 행정부의 구성원을 선정할 권리인 것이다. 여성의 투표권을 막으려는 이유는 사회의 다른 분야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으로, 시작을 막아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시작은 이루어졌다. 현재의 국가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여성들에게 대중 집회와 정치적 단체를 허용한 것은 여성들의 승리와 같다. 그리고 국가가 억지로,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러한 것들을 허용했던 것은 노동계급이 들고일어난다는 저항할 수 없는 압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프롤레타리아 여성이 밀어붙인 바로 그 열정적인 압박이 있었기에 프로이센-독일 경찰국가가 그 유명한 여성 부문38)에게 정치적 단체 집회를 열도록 허락하고 여성들에게 정치적 조직화의 문을 활짝 열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실로 이것이 모든 것을 시작되게 만들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은 저항할 수 없는 진전이며 노동자 여성의 권리를 정치계의 소용돌이 속으로 쓸어 넣었다.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은 조합과 집회의 권리를 이용하여 정당 생활과 선거 캠페인에서 가장 적극적인 역할을 해 오고 있다. 오늘날 수백만 명의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 도전적으로, 그리고 자신 있게 참정권을 허하라!고 말하는 것은 그 운동의 당연한 결과이자 논리적인 결론인 것이다.

옛날 1848년 이전의 절대 왕정이라는 아름다운 시절에는 노동계급 전체가 정치적 권리를 행사할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다고들 했다. 이는 오늘날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에게 적용될 수 없다. 그들이야말로 정치적인 성숙함을 보여줘 왔기 때문이다. 모두가 아는 바대로,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열정적인 원조가 없었더라면 사민당은 1912년 1월 12일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얻지 못했을 것이며 425만 표를 얻지도 못 했을 것이다.39) 어쨌든 노동계급은 성공적인 대중 혁명 봉기를 통해 정치적 자유를 위한 성숙함을 갖췄다는 것을 항상 증명해 왔다. 왕좌에 앉아 있는 신수왕권 및 국가의 가장 잘나고 고결한 자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굳은살 박힌 주먹으로 눈을 맞고 무릎이 까이고 가슴을 채여야만 그제서야 인민들이 정치적으로 성숙했음을 번개처럼 빠르게 느낄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국가에게 여성이 이미 성숙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몫이다. 이는 모든 수단을 이용하는 지속적이고 강력한 대중 운동인 프롤레타리아 투쟁과 압력을 통해서 가능하다.

여성 참정권이 목표다. 하지만 그것을 견인할 대중 운동은 여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 남녀 모두의 공통된 계급적 관심사다. 독일에서 현재 여성이 가진 권리들이 부족한 것은 인민의 삶을 옭아매는 반동의 사슬 중 하나의 고리일 뿐이다. 그리고 이는 반동의 또 다른 기둥, 즉 군주제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상당히 산업화되어 있는 20세기 독일에서, 전기를 사용하고 비행기가 날라다니는 이 시대에, 여성의 정치적 권리가 없다는 것은 왕권신수설만큼이나 죽어 버린 과거의 반동적인 잔해이다. 첫째, 주요 정치 세력으로서의 신의 도구와 둘째, 정치 및 계급투쟁, 그리고 공적인 삶이라는 돌풍에 무지한 채 난롯가에서 새침하게 앉아 있는 여성이라는 이 두 현상은 모두 부패해 버린 과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시골에는 농노제가 있고 도시에는 길드가 있었던 그런 과거 말이다. 그 시대에는 그런 것들이 정당했고 필요했다. 하지만 군주제와 여성의 권리 부재는 둘 다 현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철폐되어 왔고 우스꽝스러운 광경으로 취급받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런 것들이 우리 현대 사회에서도 계속해서 존재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깜빡 잊고서 없애지 않았거나 환경이 지속성 및 관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군주제와 여성들의 권리 부재라는 두 가지 요소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것은 그것들이 인민을 위협하는 강력한 이해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착취하고 노예화하는 것을 지지하는 가장 악랄하고도 가장 무자비한 자들은 왕좌와 제단뿐만 아니라 여성의 정체적 노예화 이면에서 뿌리 깊게 존재하고 있다. 군주제와 여성의 권리 부재는 자본가 지배계급의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실로 우리나라는 노동자계급의 여성들에게만 투표를 허락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여성들이 전통적인 계급 통치의 기관들, 예를 들면 (분별력 있는 프롤레타리아 여성을 치명적인 적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군국주의, 군주제, 식품에 붙이는 관세와 세금에 의한 체계적인 강탈 등에 위협이 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국가에게 있어서 여성 참정권은 공포이자 혐오의 대상이다. 여성 참정권 뒤에는 수백만의 여성들이 버티고 서서 자본주의 내부의 적인 사회민주주의의 혁명을 강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여성의 투표에 관한 문제였다면 자본주의 국가는 적극 지지하고 나섰을 것이 분명하다. 남성들의 특권에 맞선 투쟁에서 암사자처럼 구는 부르주아 여성들 대부분은 참정권을 얻게 되면 보수적이고 성직자적인 반동 진영으로 순한 양떼처럼 몰려갈 것이다. 사실 그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남성들보다 훨씬 더 반동적이 될 것이 분명하다. 부르주아 계급의 여성들은 직업과 직위를 가진 소수를 제외하고는 사회적 생산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 부르주아 여성들은 부르주아 남성들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서 쥐어짜 낸 잉여가치를 부르주아 남성들과 공동으로 소비하는 소비자에 지나지 않는다. 부르주아 여성들은 사회에 붙은 기생충에 다시 붙는 기생충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동 소비자야말로 자신들의 기생충 같은 생활을 유지할 권리를 지키기 위해 계급 통치와 착취의 직접적인 하수인보다도 훨씬 더 과격하고 잔인해지는 게 일반적이다. 모든 위대한 혁명적 투쟁의 역사는 이것을 끔찍한 방법으로 보여 주고 있다. 위대한 프랑스 혁명을 보라. 자꼬뱅당이 무너지고 로베스삐에르가 결박당한 채 처형장으로 끌려갈 때 승리에 도취된 부르주아 계급의 벌거벗은 창녀들은 혁명의 추락한 영웅 주변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기쁨의 춤을 추지 않았던가? 그리고 1871년 빠리에서 영웅적인 노동자들의 꼬뮨이 기관총 앞에 패배했을 때 광기 어린 부르주아 여성들은 억압받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항한 유혈 복수에 있어서 짐승 같은 부르주아 남성들조차도 넘어서지 않았던가? 유산계급의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자신들의 존재를 위한 수단들을 노동자들에게서 간접적으로 뜯어내며 노동자들의 착취와 노예화를 항상 광적으로 옹호할 것이다.

착취하는 계급의 여성들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인구에서 독립적인 부분이 아니다. 그들이 가진 유일한 사회적 기능은 지배계급의 선전 도구로 쓰이는 것이다. 반면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여성들은 경제적으로 독립해 있다. 이 여성들은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사회를 위해 생산을 한다. 이 말은 아이를 기른다거나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남성들을 돕는 집안일을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런 일들은 현대 자본주의 경제적인 의미에서는 생산적이지 않다. 많은 희생과 힘이 들어가는, 작은 노력들 천 개가 더해지는 큰 성취가 얼마나 있더라도 그렇다. 그런 것은 그 노동자의 사적인 일, 그의 행복과 축복 등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현대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일이다. 자본주의와 임금 체제가 지배하는 한, 자본주의 이익을 낳는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그런 종류의 일만이 생산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뮤직홀 댄서가 그 다리로 고용주의 주머니를 채워 주는 것이 생산적인 일이며, 프롤레타리아 여성들과 어머니들이 집 안에서 하는 그 모든 힘든 일들은 비생산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잔인하고 미친 것처럼 들리지만 그만큼 현재 우리의 자본주의 경제가 보여 주는 잔인함과 미친 짓에 정확하게 대응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잔인한 현실을 분명하고 명료하게 바라보는 것이 프롤레타리아 여성의 첫 임무이다.

그래서 정확히 이런 관점에서 보면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동등한 정치 권리 요구는 확고한 경제적 근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오늘날 수백만 명의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은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공장에서, 작업장에서, 농장에서, 가내 공업에서, 사무실과 상점들에서 자본주의 이윤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장 엄밀한 과학적 의미에서 볼 때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은 생산적이다. 자본주의에 의해 착취받는 여성들의 규모는 매일 커져 간다. 산업이나 기술에서 새로운 발전이 있을 때마다 자본주의 이윤을 낳는 기계 속에 여성이 들어갈 새로운 자리가 생겨난다. 그래서 매일, 그리고 산업 발전의 매 단계는 여성이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가질 수 있는 확고한 기반에 새로운 돌을 더하는 것이다. 여성의 교육과 지식은 경제 메커니즘 그 자체에도 필요한 것이 되었다. 가부장제 친족의 편협하고 격리된 여성은 정치적인 요구는 물론이고 산업과 상업의 필요도 만족시킬 수 없다. 자본주의 국가가 이런 면에서 스스로의 의무를 게을리해 온 것도 사실이다. 지금까지 여성들의 정신과 도덕관념을 일깨운 것은 주로 노조와 사민당 조직들이었다. 수십 년 전에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독일에서 가장 유능하고 지적인 노동자로 알려져 있었다. 마찬가지로 노조와 사민당은 오늘날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을 그 좁고 답답한 존재 밖으로, 비참하고 시시한 가사일 밖으로 이끌어 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은 여성들의 지평을 넓혔고, 마음을 유연하게 만들었으며, 사고를 발전시켰고,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위대한 목표를 보여 주었다.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여성 대중의 정신을 부활시켰고, 그래서 의심할 여지없이 그 여성들을 자본에 생산적인 유능한 노동자로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보면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에게 정치적 권리가 없다는 것은 비열한 불의이며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최소한 반은 거짓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어쨌든 여성 대중은 정치적 삶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민당은 불의라는 주장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보다 초기의 감상적인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와 우리들 사이의 기본적인 차이인 것이다.40) 우리는 지배계급의 정의에 의존하지 않으며 노동계급의 혁명적 힘과 그러한 힘의 기반을 마련하는 사회 발전 과정에만 의지한다. 그러므로 불의 그 자체로는 반동적 기관들을 전복시키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주장이 분명 아닌 것이다. 하지만 과학적 사회주의의 공동 창시자인 프리드리히 엥엘스의 말처럼 사회의 큰 부분에 불의라는 감정이 있다면, 이는 항상 사회의 경제적 기반이 상당히 변화되었으며 현재의 조건들이 그러한 발전의 행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분명한 신호이다. 현재 자신들에게 정치적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심각한 부정으로 여기고 있는 수백만 명의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 일으키고 있는 강력한 운동은 이렇듯 지배 체제의 사회 기반이 부패해 있고 그 끝이 보이고 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신호인 것이다.

백 년 전, 사회주의 이상을 외쳤던 최초의 위대한 예언자 중 한 명인 프랑스인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는 어떤 사회에서도, 여성 해방의 정도가 해방 일반의 본질적 지표라는 기념비적인 말을 적었다. 이는 현재 우리 사회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말이다. 여성의 참정권을 위한 작금의 대규모 투쟁은 해방을 위한 프롤레타리아 투쟁 일반의 한 표현이자 한 부분일 뿐인 것이다. 여기에 그 힘과 미래가 놓여 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 여성들로 인하여 여성의 일반 선거, 보통 선거, 직접 선거권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엄청나게 발전시키고 강화시킬 것이다. 이 때문에 부르주아 사회는 여성 참정권을 그토록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여성 참정권을 원하며 성취하게 될 이유이다. 여성 참정권을 위해 싸우면서 우리는 현재의 사회가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망치질 아래 내려앉아 폐허가 될 그날을 앞당기고 있기도 하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여성(1914년)

 

프롤레타리아 여성의 날은 사회민주주의 주간을 출범시켰다.41) 자기 몫을 박탈당한 자들의 당인 사민당은 새로운 땅에 사회주의의 씨앗을 심고자 여성 칼럼들을 8일간 최전선에 내보냈다. 그들이 노동계급 전반을 위한 새로운 지지자들을 모으고자 할 때 처음 내세운 것이 바로 여성들의 정치적 평등에 대한 요구였다.

오늘날 임금 노동자인 현대적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 노동계급의 여성 선구자이자 동시에 몇백 년 만의 첫 여성 선구자로서 공적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인민의 여성들은 항상 고된 노동을 해 왔다. 야만인 무리 사이에서 여성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음식을 채집했고, 원시 마을에서는 곡식을 심거나 빻았고 도자기를 만들었고, 고대에는 노예로서 주인을 섬기며 그들의 자식들에게 젖을 물려 키웠고, 중세에는 봉건 영주를 위해 물레를 돌렸다. 하지만 사유 재산이 설립된 이래로 인민의 여성의 일은 대부분 사회 생산이라는 거대한 작업장에서 분리되었고 그래서 비참한 가족 존재의 가내 축약판 안에 감금된 채 문화로부터도 분리되었다. 자본주의는 일단 여성들을 가족으로부터 떼어 놓은 후 사회적 생산이라는 멍에를 씌워서 다른 이들의 논밭, 작업장, 건물, 사무실, 공장, 창고로 끌고 갔다. 부르주아 여성의 경우에는 사회의 기생충이다. 부르주아 여성의 기능이라고는 착취의 열매를 먹어 치우는 것을 거드는 것뿐이다. 쁘띠부르주아 여성의 경우에는 가족을 위해 짐을 짊어지는 소라고 할 수 있다. 현대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처음으로 인간이 되었다. 프롤레타리아 투쟁은 인간이 문화에, 인류 역사에 기여하게 만든 첫 번째 투쟁이기 때문이다.

재산을 가진 부르주아 여성에게 있어서 집은 전 세계와 같다. 프롤레타리아 여성에게는 슬픔과 기쁨이 가득한 세계, 차갑도록 잔인한 어마어마한 크기의 전 세계가 자신의 집이다.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이딸리아에서 스위스로 가는 터널에서 행진하고, 막사에서 야영을 하며, 다이너마이트 폭발로 날라가는 절벽 옆에서 기저귀를 갈면서 휘파람을 분다.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계절 농업노동자로서 봄에는 수수한 가르마 머리에 스카프를 쓴 채로 혼잡한 기차역 한가운데 작은 꾸러미 위에 앉아 동에서 서로 이동하기를 차분히 기다리는 것이다. 원양선의 중앙 갑판에 탄 굶주린 프롤레타리아 인민들의 소란 속에서, 그 위기에서 나온 비참함을 떨치는 파도를 따라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한다. 마찬가지로 미국에서의 위기가 유럽에서 있었던 본래의 비참함에 반대되는 역류처럼 솟아나면,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새로운 희망과 실망으로 다시 빵과 일을 찾아 돌아갈 것이다.

부르주아 여성은 정치적 권리에 실제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회에서 어떠한 경제적 기능도 하지 않으며 계급 지배의 완제품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여성들 사이에서 여성 평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솟아날 때 그것은 물질적 기반이 없는 몇몇 빈약한 집단의 순수한 이념이자 남성과 여성 간의 적대라는 허상, 곧 변덕이다. 그것이 여성 참정권 운동의 우스운 본질인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정치적 권리가 필요하다. 프롤레타리아 남성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기능을 하고, 마찬가지로 자본을 위해 노예처럼 일하며, 마찬가지 방식으로 국가를 지탱하고, 마찬가지 방식으로 국가에 의해 피를 흘리고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프롤레타리아 남성들과 똑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있으며 똑같은 무기를 든다.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정치적 요구는 착취당하는 계급과 착취자들을 갈라놓는 사회적 심연에, 남성과 여성 간의 적대가 아니라 자본과 노동 사이의 적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형식적 수준에서 여성의 정치적 권리는 부르주아 국가와 상당히 조화를 이루며 간다. 핀란드, 미국, 그리고 몇몇 도시들의 예를 보면 모두 여성을 위한 동등한 권리라는 정책이 아직 국가를 전복시킨 바가 없으며 자본의 지배를 잠식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오늘날 여성의 정치적 권리는 사실상 프롤레타리아 계급만의 요구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자본주의 독일에서 여성의 참정권을 얻는다는 것은 마지막 승리와도 같다. 공화국, 민병대, 8시간 노동제와 마찬가지로 여성 참정권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 전체와 함께 성공하거나 실패하게 될 것이다. 여성 참정권은 프롤레타리아 투쟁 방식과 강제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방어될 수 있다.

여성의 권리를 지지하는 부르주아들은 정치적 권리를 원한다. 정치계에서 한 역할을 맡기 위해서이다.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노동자 투쟁의 길을 따를 뿐이다. 주로 법령을 통해 한 줌의 실제적 권력을 얻는 것과는 반대이다. 모든 사회적 발전의 시작에는 행동이 있었다.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은 모든 분야에서 활동함으로써 정치계에서 단단한 기반을 얻어야만 한다. 이 방법으로만 그들은 여성의 권리를 위한 기반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배 사회는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 법의 전당에 들어오기를 거부하고 있으나 또 다른 위대한 세력, 즉 사민당은 그들에게 활짝 문을 열고 있다. 여기 사민당의 대오에는 프롤레타리아 여성을 위해 정치 일과 정치권력이라는 광대한 분야가 열려 있다. 여기에서만 여성은 동등한 기반 위에 선 구성원이다. 사민당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역사의 작업장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 퀴클롭스42)적 힘들이 망치질을 하고 있는 곳에서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부르주아 헌법에 써진 법령이 없다 하더라도 진정으로 평등한 권리를 위해 싸우게 될 것이다. 여기서 노동자 여성은 남성들과 함께 기존의 사회 질서의 기둥을 흔들고, 그 질서가 여성의 권리라는 환영을 부여하기 전에 그 질서를 폐허 속에 묻어 버리는 데 한몫을 할 것이다.

미래의 작업장에는 많은 손과 의지가 필요하다. 여성이 겪는 비참함의 세계는 해소될 것이다. 농부의 아내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거의 스러져 가면서 신음한다. 독일령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에서는 일단의 독일 군사들에 의해 쫓기고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끔찍하게 죽어간 무력한 헤레로족 여성들의 뼈가 태양 아래 빛바래 가고 있다.43) 대양의 반대편인 푸투마요 강의 높은 절벽에서는 전 세계가 잊고 있는 순교자 인디언 여성들이 국제 자본주의자들의 고무 플랜테이션에서 스러졌다.44)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여, 가난한 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힘없는 자들이여, 자본주의 지배라는 공포로부터 여성과 인류를 해방시키기 위한 투쟁에 어서 합류하라! 사민당이 여러분에게 영예의 자리를 부여했다. 전선으로 달려오라, 참호 안으로!

 

 

로자 룩셈부르크 연표45)

 

1871년, 폴란드 자모시치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다.

1873년, 골수결핵에 걸렸는데 치료를 잘못해서 걸을 때마다 엉덩이가 흔들리면서 한쪽 다리를 절게 되다.

1887년,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폴란드 혁명 정당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세포 조직의 구성원이 되다.

1889년, 독일-폴란드 국경을 넘다.

1890-1891년, 스위스 취리히 대학의 철학부로 들어가 자연과학, 수학, 역사 수업을 듣다. 레오 휴기스와 만나다.

1892년, 법학부로 바뀌고 경제학과 공법학을 공부한다. 첫 출판물인 ≪메이데이의 축복≫을 내다.

1893년, 폴란드 사회민주당(SDKP)을 설립하다.

1894년, 폴란드 사회민주당의 첫 대회가 열리다. 빠리에서 박사 논문인 ≪폴란드에서 산업 발전≫을 쓰다. 폴란드 사회민주당 기관지의 편집자로 활동하다.

1896년, 빠리에서 지도적 사회주의자들과 만나다.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의 전술에 관하여를 쓰다.

1898년, 베를린에 도착하다. 독일 사민당의 수정주의자들과 논쟁을 시작하다. 클라라 체트킨과 교류하다.

1899년, 독일 사민당의 수정주의자 베른슈타인을 겨냥한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를 쓰다.

1901년, ≪라이프치거 폴크스차이퉁≫의 편집자를 프란츠 메링과 같이 맡다.

1905년, 폴란드 저널인 ≪Z 폴라 와키≫를 설립하다.

1906년, 레오 휴기스와 체포되다. ≪대중파업론≫을 쓰다.

1907년,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 5차 대회에 폴란드 리에투바 사회민주당의 대표이자 독일 사회민주당의 특별 대표로 참가하다. 국제 사회주의 여성 회의에 참가하여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국제 사회주의 여성 사무국을 국제 사회주의 사무국이 있는 브뤼셀로 옮기는 것을 반대하는 제안을 한다. 여성 운동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1910년, 칼 카우츠키와 격렬한 정치적 대립 이후 결별을 하다.

1912년, 클라라 체트킨과 함께 바젤에서 열린 국제 사회주의 대회에 참가하다. 의회 크레틴병(의회에서 모든 정치투쟁을 다하려는 사고)을 비판하는 캠페인을 시작하다. 프롤레타리아 여성 운동이 부르주아 여성 운동과는 선을 긋고 활동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다.

1913년, 로자 룩셈부르크, 알렉싼드라 꼴론따이, 클라라 체트킨 등 맑스주의 여성 혁명가들은 전쟁과 군국주의 반대 캠페인을 열정적으로 지도하다. 이에 반해 각국의 부르주아 여성 운동인 참정권자들은 전쟁 찬성을 하며 여성도 전쟁을 최대한 지원할 사업들을 진행하였다. 프롤레타리아 여성 운동이 부르주아 여성 운동과 독립적인 활동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자본의 축적≫이 발간되다.

1914년, 로자 룩셈부르크, 프란츠 메링, 칼 리프크네히트, 클라라 체트킨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공식적인 입장과 자신들의 입장을 다르다는 서신을 해외로 보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민주주의의 위기(유니우스 팜플렛)≫를 쓰다.

1916년, ≪유니우스 팜플렛≫이 은밀하게 배포되다. 정기적으로 ≪스파르타쿠스 레터스≫에 기고하다.

1917년, 러시아 볼쉐비끼 혁명이 일어나다.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이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분리되어 나왔다.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립사회민주당 내에서도 소수파인 스파르타쿠스단을 이끈다.

1918년, 룩셈부르크는 석방되어 나오다. 독일 11월 혁명이 일어나고 12월 독일 공산당 창당 대회에서 연설을 하다.

1919년,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는 1월 15일 살해되었다. 룩셈부르크의 시체는 5월 31일 하수구에서 발견되었다.  노사과연

 

 


1) 이에 대한 비판은, 김성진, “노동자는 ‘재벌 사내 유보금 환수 투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정세와 노동≫ 제137호(2017년 10월)를 참조하라.

 

2) 알렉싼드라 꼴론따이ㆍ블라지미르 일리치 레닌, ≪콜론타이의 여성 문제의 사회적 기초ㆍ세계 여성의 날≫, 서의윤 역, 좁쌀한알, 2018, pp. 38-39.

 

3) 로버타 해밀턴, ≪여성해방논쟁≫, 최민지 역, 풀빛, 1982; 앨리슨 재거ㆍ폴라 로덴버그 스트럴, ≪여성해방의 이론체계≫, 신인령 역, 풀빛, 1983; 다마에, ≪여성해방사상의 흐름≫, 김희은 역, 백산서당, 1983; 여성평우회 편, ≪제3세계 여성노동≫, 창작과비평사, 1985; 안네트 쿤ㆍ안마리 울프 외, ≪여성과 생산양식≫, 강선미 역, 한겨레, 1986; 하이디 하트만 외, ≪여성해방이론의 쟁점, 사회주의 여성해방론과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 김혜경ㆍ김애령 역, 태암, 1989; 한국여성연구회문학분과 편역, ≪여성해방문학의 논리≫, 창작과비평사, 1990; 한국여성연구회 편, ≪사회주의 여성해방의 현재와 미래≫, 백두, 1992. (한국여성연구회는 1998년 한국여성연구소로 개편을 했고, 2001년 여성부 산하의 사단법인이 되었다. 현재는 ≪페미니즘연구≫를 정기 간행물로 내고 있다.)

 

4) 김지해 편, “이 책을 내면서”, ≪세계여성운동 1: 사회주의 여성운동편≫, 동녘, 1987, pp. 3-4.

 

5) 필립 S. 포니 편, ≪클라라 체트킨 선집≫, 조금안 역, 동녘, 1986; 맑스ㆍ엥엘스ㆍ레닌ㆍ쓰딸린, ≪여성해방론≫, 조금안 역, 동녘, 1988; 아우구스트 베벨, ≪여성론≫, 이순예 역, 까치, 1990.

 

6) W. 쉬바르츠 외, ≪사적 유물론과 여성해방≫, 엄명숙ㆍ강석란 역, 중원문화, 1990. 이 책의 원제는 ≪가부장제와 사회(Patriarchat & Gesellschaft )≫이다. 목차를 보자. ‘가부장제의 역사적 성격 / 봉건사회의 여성노동과 자본주의 이행과정에서의 여성노동 / 사적 유물론이냐, 유물론적 페미니즘이냐? / 재생산영역에서의 여성노동 / 가사ㆍ자녀ㆍ컴퓨터.’ 목차를 보면 페미니즘이 몰역사적인 ‘가부장제’ 개념으로 이론화 작업을 했기에 페미니즘의 ‘가부장제’를 역사적으로 추적하고 여성 문제가 자본주의 내 여성 문제임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7) 이승희, “여성문제의 본질과 형태”, 윤한택ㆍ조형제 외, ≪사회과학개론≫, 백산서당, 1987; 이승희, ≪여성운동과 정치이론≫, 녹두, 1994.

 

8) 양계조ㆍ가원남, ≪새로 태어난 여성―중국 창녀 개조사≫, 김하림 역, 한마당, 1990; 클로디 브로이엘, ≪하늘의 절반: 중국의 혁명과 여성해방≫, 김주영 역, 동녘, 1985; 헬렌 버제스, ≪소비에트 여성은 말한다―우리의 삶, 우리의 꿈≫, 여성한국사회연구회 역, 앎과 함, 1989.

 

9) 필립 S. 포니 편, “1895년 여성 권리 청원에 관하여”, 앞의 책, p. 79.; Clara Zetkin, Selected Writings, 2015, p. 68.

 

10) “태일해”(전태일처럼 분신자살해 버려라)라는 망언이 남성들을 공격하기 위해서 급진 페미니스트에게서 나올 때에도 거기에 대해 비판을 하지 않는다. 어린 여공들을 위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고 분신자살한 전태일을 모독한 것조차도 페미니즘으로서는 지나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어떤 대중 운동이 ‘오류’가 있을 때, 이렇게 오랫동안 그 오류를 비판하는 것조차도 반동으로 간단히 처리하는 것이 또 언제 있었을까? 대중 운동의 오류의 예로 자주 드는 러다이트 운동도 1년을 가지 않았고 초기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11) 리차드 사이츠, “여권주의와 싸우는 사회주의 여성운동”, 김지해 편, 앞의 책, p. 199.

 

12) “Suffragettes at dinner―from gaol to the Savoy Hotel”. <https://blogs.lse.ac.uk/lsehistory/2018/12/05/suffragettes-at-dinner-from-gaol-to-the-savoy-hotel>

 

13) June Purvis, Emmeline Pankhurst: A Biography(Women’s and Gender History), Routledge, 2002, p. 112. 당시 부르주아 계급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당은 부르주아 여성들이 선거권을 가지게 되면 자신들의 지지 기반이 넓어질 것이기 때문에 페미니스트 운동을 지지했다는 설이 있다.

 

14) June Purvis, “19. War work and a second family(September 1914–June 1917)”, Ibid., p. 268.; “20. War emissary to Russia: Emmeline versus the Bolsheviks(June–October 1917)”, Ibid. 영화 ≪서프라제트≫에서 서프라제트가 공권력에 의해 탄압받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맞지만, 영화에서 나오듯 모든 계급의 여성이 하나가 되어 서프라제트 운동을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15) 알렉싼드라 미하일로브나 꼴론따이, ≪콜론타이의 붉은 사랑≫, 정호영 역, 노사과연, 2013, pp. 13-14.; 볼쉐비끼의 반전 주장에 대해서는 레닌의 1914년에서 1915년 사이의 글들인 Lenin, Collected works, Vol. 21, pp. 295-338을 참조하라. 이 시기에 레닌은 노동자들에게 참전을 요구했던 카우츠키 등의 독일 사회민주당과는 결별을 하게 된다. 레닌의 반전 관련 연설, 저술을 편집하여 단행본으로 만들어진 책으로는 Lenin―socialism and war 가 있으며 국내 번역본으로는 레닌, ≪사회주의와 전쟁 외≫, 오영진 역, 두레, 1989가 있다.

 

16) 필립 S. 포니 편,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은 준비하자(1914년)”, “전쟁을 중지하라(1933년)”, 앞의 책.

 

17) Emmeline Pankhurst―Suffragette. <https://www.bbc.com/bitesize/articles/zh7kdxs>

 

18) Emmeline Pankhurst, My Own Story, Foreword, 2011. <https://www.gutenberg.org/ebooks/34856>

 

19) 리차드 사이츠, 앞의 책, pp. 249-251.

 

20) 김지해 편, 앞의 글, p. 5.

 

21) 물론 이 연설은 1895년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1차 대전이 반발했을 때 참전 페미니즘 vs 반전 프롤레타리아 여성 운동의 구도로 여성 운동이 선명하게 나누어졌을 때와는 다르다.

 

22) 필립 S. 포니 편, “오직 프롤레타리아 여성과의 결합을 통해서만 사회주의는 승리할 수 있다(1896년)”, 앞의 책, p. 91.

 

23) 맑스, “고타강령 초안 비판”,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4권, 박종철출판사. p. 378.

 

24) 1902년 3월 30일-31일 열린 정당 부활절 회의에서 벨기에 노동자당은 1인 1표를 요청했으나 오래된 여성 참정권 요구는 제쳐 두었다.

 

25) 복수 선거제는 1인 1표가 아니라, 교육 정도나 자산 유무에 따라 1인이 2표 이상을 행사하는 선거 제도이다.

 

26) 헤카베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헤카베≫와 ≪트로이아 여인≫에 나오는 트로이의 왕비이다. 비극 ≪트로이아 여인≫은 전쟁이 여인들에게 주는 잔혹함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는 전쟁 승리자들의 영웅적인 면모는 없다. 아가멤논은 신조차 손대지 않은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를 첩으로 삼았고, 목마를 이용해 그리스의 승리에 기여한 오디세우스는 왕비 헤카베를 종으로 끌고 가고,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는 아킬레우스 손에 죽은 헥토르의 아내 안드로마케를 노예로 삼고, 안드로마케의 어린 아들과 트로이의 공주 폴뤽세네는 희생 제물로 바쳤다. 비극 ≪헤카베≫는 헤카베의 복수를 그렸다. 헤카베가 죽은 딸을 묻으려는데 아들의 시신이 바다에서 떠내려온다. 트라케 왕 폴뤼메스토가 보물을 뺏으려고 아들을 죽인 것이다. 헤카베는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에게 복수를 간청해도 들어주지 않는다. 이에 헤카베는 손수 복수를 결심한다. 헤카베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폴뤼메스토와 그의 아들들을 천막으로 유인하였다. 그곳에서 트로이아 여인들이 그를 눈멀게 하고 그의 아들들을 죽인다. (에우리페데스,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 천병희 역, 숲, 2009 참조.)

 

27) August Dewinne. 사회민주당의 개혁주의자.

 

28) Alexandre-Etienne Millerand. 1899년에 상무상(商務相)을 수락해 최초로 ‘부르주아’ 정부에 들어간 프랑스의 사회민주주의자이다. 1883년 드가스뷔 파업의 지도자를 변호하여 유명해지고, 1885년 급진 사회주의자로서 하원 의원이 되었다. 제3 공화국 11대 대통령(임기: 1920-1924)이었다.

 

29) Eduard Anseele. 사회민주당의 주요한 개혁파.

 

30) 제2 인터내셔널은 1889년 빠리 국제 노동자 회의에서 설립되었고, 1900년 벨기에의 브뤼셀에 국제 사회주의 사무국을 설치하였다. 카우츠키와 쁠레하노프는 맑스주의를 제2 인터내셔널의 공식 이념으로 하는 데 기여하였다. 소속된 당들은 영국 노동당을 제외하고는 맑스주의가 지도 이념이었고, 독일 사회민주당이 가장 큰 정당이었다.

 

31) 1904년 암스테르담에서 국제 사회주의 회의가 열렸다. 이 해에 사회주의자들은 21개국에서 선거에 참여하여 660만 표를 획득했고 의회에서 261석을 얻었다.

 

32) ‘평등’이라는 의미로 클라라 체트킨이 창간한 사회민주당의 여성 잡지.

 

33) 이 회의에서 노동자 여성의 투쟁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위한 국제 여성 사무국의 설립을 안건으로 붙였다. 체트킨이 지도자가 되었고, ≪평등≫은 공식 기관지가 되었다.

 

34) 요제프 빅토르 폰 셰펠이 쓴 ≪제킹엔의 나팔수(Der Trompeter von Säkkingen)≫는 오페라로 만들어졌는데, 이 오페라의 노래인 “신의 가호가 있기를(Behüt Dich Gott*)”의 가사를 인용한 것이다.

* 독일어에서 작별 인사로 쓰이던 말이다.

 

35) Emma Ihrer(1857-1911)는 1885년 여성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베를린 노동자 클럽(Berliner Arbeiterinnenverein)을 설립했다. 1890년 최초의 여성 잡지인 ≪여성 노동자(Die Arbeiterin)≫를 발간하였고, 1892년부터는 이 잡지를 후에 룩셈부르크도 기고하는 여성 운동의 주요 출판물이 된 ≪평등≫으로 발간하였다. ≪평등≫지에는 여성 클럽, 교육 과정, 노조 조직을 한 수많은 순회강연들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독일 여성 운동의 역사는 다음을 참조하라. 로제마리 나베-헤르츠, ≪독일 여성운동사≫, 이광숙 역, 지혜로, 2006; 김지해 편, “1장 2절. 독일 사회민주주의와 여성해방 전술(Jean H. Quataert, “part C”, Reluctant Feminists in German Social Democracy 1885-1917, 1979.)”, 앞의 책; 베른트 파울렌바흐, ≪독일 사회민주당 150년의 역사≫, 이진모 역, 한울아카데미, 2017.

 

36) 1898년에 사회주의자 여성들은 베를린에서 여성 노동자와 노동 감독관의 중재 기구로 고충위원회를 세웠다. 이 위원회는 무명의 원고를 위해서 노동보호법 위반을 감독관에게 보고했다. 이후 이 위원회는 다른 지역에서도 세워졌다.

 

37) 생디칼리즘은 노동자에 의한 생산ㆍ분배 수단의 소유를 목표로 하는 조합주의이다.

 

38) 여성 부문은 1902년 프로이센 수상인 폰 하머스타인에 의해 제도화되었다. 정치 모임에서 여성들을 위한 특별한 공간을 마련하였다. 1878년 제정된 사회주의 탄압법은 1890년 폐지되었지만, 바이에른 국회법 15조은 여성의 정치적 활동을 금하고 있었고, 경찰은 여성 노동자 조직을 비밀 정치클럽으로 규정하여 엄청난 탄압을 하였다. 독일은 1908년 5월 15일까지 여성이 정치 단체나 집회에 참석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노동 계약의 자유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여성과 좌익당과 중도파당들은 오래전부터 여성이 (각 정당에서) 단체를 결성할 수 있는 자유(Vereinfreiheit)를 위해서 투쟁했고 1908년 5월 15일 이 자유가 허용되었다. 이에 따라 여성들이 당의 회원이 될 수 있었고 선거권이나 피선거권은 아직 없었다.” (로제마리 나베-헤르츠, 앞의 책, p. 55.)

 

39) “(라살레로 대표되는) 라살레 진영과 (마르크스로 대표되는) 아이제나흐 진영이 결합한 1876년에 약 3만 8000명이었던 사민당원 수는 사회주의자법 아래에서 전반적으로 증가하다가 1890년에는 약 10만 명을 기록했다. 1907년까지 당원 수는 약 50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이는 제1차 세계대전까지 다시 두 배로 늘어났다(1914년 기준 당원 1100만 명, 노동조합원 2500만 명). 당원 수가 매우 많았기 때문에 유권자 가운데 당원이 차지하는 비중도 매우 높았다. 이는 지지 유권자들과 사민당의 단단한 결속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 깨닫게 해 주는 사실이다. 사민당에 대한 지속적인 정치적, 사회적 멸시에도 불구하고 제국의회 선거 결과의 발전도 인상적이었다. 1877년에 50만 표(9.1%득표),1890년에 이미 1400만 표(19.7%), 1912년에는 4250만 표를 얻었다. 이는 득표수의 34.8%로 전체 유권자의 1/3 이상이 제국의회 선거에서 사민당을 선택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베른트 파울렌바흐, 앞의 책, p. 34.)

 

40) 경제학 공부가 덜 되었고 사적 유물론의 기반을 아직 세우지 못했던 청년 맑스는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인 샤를 푸리에의 영향을 받고 ≪1844년 빠리 경제철학 초고≫에서 ‘여성의 억압’에 대해서 썼다. 과학적 사회주의자가 되기 전의 청년 헤겔학파 시기의 맑스와 맑스주의 확립 후의 로자 룩셈부르크 등의 맑스주의자들을 비교해서 읽으면 과학적 사회주의가 어떻게 푸리에 등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를 극복해 나갔는가를 알 수 있다.

“약탈물로서 그리고 공동체의 육욕의 시녀로서 여성에 대한 관계 속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실존하는 끝없는 타락이 나타나는데, 이 관계의 비밀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직접적 자연적인 유적 관계가 파악되는 방식 속에서 분명하고 결정적이며 공공연하게 뚜렷한 표현을 가지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직접적, 자연적, 필연적 관계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관계이다. 이러한 자연적 유적 관계 속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곧바로 인간에 대한 인간의 관계이며; 인간에 대한 관계는 곧바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 인간의 고유한 자연적 규정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계에서 어느 정도로 인간에게 인간적 본질이 자연으로 되어 있는지 또는 어느 정도로 자연이 인간의 인간적 본질로 되어 있는지는 감각적으로, 직관 기능한 사실로 환원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관계에서 인간의 교양 단계 전체를 판단할 수 있다. 이 관계의 성격에서 어느 정도로 인간이 유적 존재로서, 인간으로서 형성되어 있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로 인간이 자신을 유적 존재로서, 인간으로서 파악하였는지가 도출된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관계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가장 자연적인 관계이다.” (칼 맑스, ≪경제학-철학수고≫, 강유원 역, 이론과 실천, 2006, p. 126.)

 

41) 1914년 국제 여성의 날인 3월 8일에 사회민주당의 “붉은 주일”이 시작되었다. 이 기간은 시위, 모임, 당원 모집의 기간이다.

 

42)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외눈박이 거인으로 제우스의 무기이며 번개를 쏘는 아스트라페, 하데스의 투명 투구, 포세이돈의 삼지창인 트라이던트를 만들었다.

 

43) 1904년 독일령 서남아프리카(현재의 나미비아)에서 독일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독일군은 이들을 격파하고 오마헤케 사막으로 몰고 갔다. 사막으로 몰린 이들 대부분은 끔찍하게 태양 아래 탈수로 말라 죽어 갔다. 이 학살로 헤레로인 24,000명과 나마인 10,000명이 죽었고 이를 ‘헤레로 전쟁’의 대학살이라고 부른다.

1985년, 국제연합의 휘태커 보고서는 이 사건을 서남아프리카에서 헤레로인과 나마인의 씨를 말리려는 시도로 20세기 최초의 집단 학살 사례 중 하나라고 규정했다. 학살에 대해 결코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에 비해 유대인 학살에 대해 공식 사죄를 하고 금전적 배상을 한 독일 정부가 낫다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나미비아는 국제적 영향력이 없기 때문인지 독일 정부는 2004년이 되어서야 사건의 존재를 인정했다. 또한 2016년이 되어서야 공식 사과를 했고 피해자 후손들에 대한 금전적 배상 얘기는 하지 않는 대신 인프라 건설 지원을 약속했다.

 

44) 20세기 초에 푸투마요, 아마존 유역의 고무 노동자들의 노예화가 있었다.

 

45) 다음 책의 연표를 가져오되 여성 운동 관련된 부분을 추가하였다. Sobhanlal Datta Gupta eds, Readings in revolution and organization―Rosa Luxemburg and her critics, 1994; LeninㆍLuxemburgㆍTrotskyㆍStalinㆍLukács, Rosa Luxemburg: A Chronicle of Events, Calcutta: Pearl Publishers.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6월 8th, 2019 | By | Category: 제152호(2019년 6월), 번역 | 조회수: 817

댓글 한 개 “[번역] 로자 룩셈부르크의 여성론”

  1. 보스코프스키 댓글:

    너무나 반가운 문서입니다. 이미 Marxist Internet Archive(MIA)에 마극사/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여성에 관한 견해 편도 존재합니다.